넘버즈. 1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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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지만, 대답이 나올 리 없었다. 아니 이미 자신도 그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란 것을.
다른 이들은 기사서임을 받을 나이에 그는 이미 정점에 올라 있는 것이다. 귀족이고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었다고 해도 23살의 나이에 저 자리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없었다.
지금까지 없었기에 그가 최초이니까.
서른이면 이른 나이에 넘버즈에 오른 것이다.
물론 지금의 넘버즈에는 서른이 채 안 되는 이들이 5명이나 있다. 20대가 넘버즈의 반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루퍼드 이전에 넘버즈에 올랐던 이들도 천재라 칭해졌고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 루퍼드 앞에서 빛이 바랬다.
에스토 왕국의 수많은 기사 중 그의 위에 단 한 명만이 존재한다는 것. 이제는 그가 언제 No.1이 될 것인지 관심이 집중돼있었다.
행렬의 앞에는 사람들이 던진 수많은 꽃송이가 깔렸다. 이제는 많이 가까워져 좀 더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었다.
다행히도 투구를 쓰지 않아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소문만 들었을 때는 2m가 넘는 거인에 엄청나게 우락부락한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 생각 외로 새하얀 얼굴에 놀랐다.
어깨너머로 내려온 웨이브 진 금발. 금빛 눈썹과 파란 눈동자, 붉은 입술.
전체적으로 선이 굵지 않은 얼굴에서는 남자다움보다는.
‘아름답다?’
라는 생각이 드는 자신에게 놀랐다.
분명 남자로 알고 있는데 언뜻 보면 여자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의 외모였다. 강함보단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외모만큼이나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미소와 눈빛에서도 온화함이 느껴졌다.
금발에 금빛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사자 같은 느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이는 것일 뿐.
길리안은 몸이 긴장하는 것에 깜짝 놀랐다.
‘기세를 뿜어내고 있다?’
누군가를 위협하는 것도 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주변을 아우르는 기세.
절대 위협을 하는 기운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몸이 긴장되고 투지가 끓었다. 가능하다면 당장 달려가서 한 번만 겨뤄보자고 하고 싶을 정도였다.
다만 불가능함을 알기에 꾹 눌러 참을 뿐.
길리안의 시선은 금빛의 사자 루퍼드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어이 자네 뭐하는 거야?”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네 오는 게릭 때문에 홀린 듯 루퍼드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길리안은 그때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예? 왜 그러세요?”
“시골에서 올라온 티를 내는군. 다른 사람들도 좀 보라고 넘버즈가 3명이나 더 있다네.”
“아, 네. 어?”
대답하던 길리안은 어깨 위로 올라와 있는 자신의 오른팔을 보고 깜짝 놀랐다.
루퍼드를 보는 내내 스스로 이렇게 팔을 올린 줄도 몰랐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취하고 있는 자세는 등 뒤에 메고 다니는 검을 뽑을 때의 동작이었다.
길리안은 들어 올렸던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쓰게 웃었다.
‘다행이군. 검을 두고 와서···’
아마 검을 가지고 왔었더라면 자신도 모르게 그 커다란 검을 뽑았을 테고, 그 뒤에 벌어질 일은 별로 생각하기 싫었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어이가 없었다.
넘버즈를 보겠다고 한시도 떨어뜨려 놓지 않던 검을 맡겨놓았던 것도 잊고 달려온 것도 그렇고, 있지도 않은 검을 뽑으려는 동작을 취한 것도 그랬다.
“어이 저기 보라고.”
들려오는 게릭의 말에 길리안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루퍼드님 오른쪽에 조금 처져서 말을 모는 파란 갑옷 보이지? 저분이 환영의 기사야.”
“환영의 기사···”
No.5 환영의 기사, 로렌스 폰 지그먼트.
그도 서른이 채 되지 않은 현재 29살이었다.
보기 드물게 두 자루의 검을 사용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번개처럼 빨라서 상대는 그의 환영만을 쫓게 된다고 한다. 물론 과장이 붙은 것이겠지만 검술도 현란하고 빨라서 막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마차 옆에 검은 갑옷을 입은 분이 검은 절망의 기사라고 불리는데, 보통은 흑기사라고 하지.”
No.7 검은 절망의 기사, 또는 흑기사라 불리는 드레드 폰 피게로아.
검은 갑옷에 방패와 검까지도 검은색이라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투구를 벗은 일이 거의 없어서 얼굴을 본 이들도 별로 없고 과묵해서 말도 잘 안 한다고 했다.
그와 상대한 적은 그 강함에 깊은 절망을 느낀다고 해서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 맨 뒤에 있는 분이 순백의 기사님이지.”
No.9 순백의 기사, 크리스 폰 베어드.
흑기사와는 대조적인 인물로 그의 모든 것은 백색이었다.
미남자로 알려졌고, 수려한 외모만큼 유창한 말솜씨로 여자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고 한다. 넘버즈에 든 실력자인 만큼 검술도 대단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길리안은 게릭이 가르쳐준 이들을 찬찬히 살폈다.
루퍼드를 제외한 이들은 투구까지 쓰고 있어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넘버즈를, 그것도 4명이나 볼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거기에 오늘 본 이들은 다들 서른이 되기 전에 넘버즈에 든 천재들이었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넘버즈.
먼 훗날 저들의 동료가 될지, 아니면 넘어야 하는 벽이 될지는 몰랐다. 아니 어쩌면 올라가 보지도 못하고 꿈이 꺾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해보지 않았고, 중도에 절대로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들을 보면서 다짐을 하던 길리안은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설마, 날 보는 건가?’
자신과 시선이 마주친 인물.
길리안은 루퍼드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옆에서 공주의 얼굴을 보라고 흥분하며 툭툭 치는 게릭의 행동조차 인지하지 못할 만큼 집중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옆에서 들리는 말에 루퍼드는 시선을 앞으로 향하며 살짝 입술을 움직였다.
“아무것도.”
“분위기가 평소랑은 좀 다른 것 같았는데?”
“재미있는 녀석을 발견했어. 내게 투기를 쏘아 보내는···”
“음···?”
로렌스가 루퍼드가 쳐다보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투기라··· 난 느끼지 못했는데?”
“그래서 재미있다는 거지. 나에게만 쏘아 보냈으니까.”
“경비병과 같이 있는?”
로렌스의 물음에 루퍼드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 정도 실력자로 보이지는 않는데···.”
로렌스가 말을 하며 손을 들어 투구의 눈구멍을 가렸다. 그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붉은빛이 번뜩이는 듯했다.
“쓸데없는 짓을.”
나무라는 루퍼드의 말에 로렌스가 손을 내리며 말했다.
“궁금한 건 참기 힘든 성격이라. 그런데 생각보다 어리군. 네 말대로 재미있는 녀석 같다.”
“그냥 둬.”
“너를 보고 투기를 일으켰다면 원한 관계일 수도 있으니 조금 조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랬다면 살기였겠지. 그렇다 해도 네가 나서는 건 쓸데없는 참견이다.”
“뭐, 그렇다면.”
그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뭐였을까?’
잠깐이지만 금발의 사자 루퍼드와 눈이 마주쳤었다. 군중들을 보며 환호에 보답해 손을 흔드는 중이니 어쩌다 마주쳤을 수도 있었다.
그보다는 그다음에 느껴진 기분 나쁜 느낌 때문이었다.
뭔가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것도 워낙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그냥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오늘은 이래저래 이상하군.’
낯선 수도에 처음 발을 디뎌서인지 행동도 감각도 평소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넘버즈들을 봐서 좀 흥분한 상태이기도 했으니까.
‘너무 들뜬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나쳐가는 넘버즈들을 눈에 담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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