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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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은 얼마나 퍼졌나요?”
“지금쯤이면 모든 영주의 귀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그럼 본격적인 파티를 시작해 볼까요?”
“파티라 하시면···?”
“수도로 오는 영주들을 공격하세요.”
자신의 말에 바로 대답이 들리지 않자 벨리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에녹스 경, 왜 대답이 없지요?”
“폐하의 명에 너무 벗어나신 것 같아···.”
에녹스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벨리타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리더니 뭐가 그렇게 웃긴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한참을 웃던 벨리타가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하아, 하아~. 인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네요. 경은 참 재밌어요.”
“폐하의 명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드린 것뿐입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왜 인제 와서 다시 그 말을 꺼내는지 묻는 겁니다. 내가 이러기 위해 온 것을 경도 알고 있고 지금까지 잘 해주었는데 이러는 이유가 정말 궁금하군요. 요즘 에스토의 기사들을 보니 폐하께 없던 충성심이라도 생긴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전 황녀님의 기사입니다.”
“그런데 왜, 도대체 왜 그러는 건가요?”
“황녀님을 위해서입니다.”
“나를 위해서요? 내가 뭘 바라는지 알면서 날 위해 그런다고요?”
“예. 태자님은 위험합니다. 보석을 얻고 사람이 너무 달라지셨습니다.”
“후훗, 그야 당연한 것이 아닌가요? 그만한 힘을 얻고도 예전처럼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건가요? 우리 남매가 그간 겪어온 설움을 경도 알고 있지 않나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는 듣고 싶지 않아요. 내가 오라버니를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남매이고 또···.”
말끝을 흐리던 벨리타가 다른 말을 꺼냈다.
“할아버님의 시대는 곧 끝납니다. 이미 모든 실권을 오라버니가 쥐고 있고 곧 황위에 오르실 겁니다. 그리고 칼랜베르크를 진정한 제국으로 만들 겁니다. 베이가를 치고 에스토를 병합하고 기안도 결국 우리의 일부가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경을 에스토의 왕으로 만들어 주겠어요.”
그 말에 에녹스가 고개를 저었다.
“제 일은 황녀님의 곁을 지키는 겁니다. 그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말에 벨리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경에게는 늘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에녹스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내 곁을 지켜줄 거라 믿어요. 그리고 날 위해 내가 원하는 일들을 해줘요. 부탁해요.”
그 말에 에녹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뭘 걱정하는지는 알아요. 오라버니는 붉은 보석의 힘으로 사람들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지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나도 경도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오라버니는 그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을 몰라요. 또 다른 보석의 존재를 모르고 그건 나의 것이 될 거에요. 결국, 나도 같은 힘을 가지게 될 거라는 말이죠. 경이 그렇게 해줄 테니까요. 그렇죠?”
“원하신다면.”
“물론 시간이 조금 필요해요. 그의 힘은 아직 약하지만, 점점 나아지겠죠. 지금처럼 계속해서 힘을 사용하다 보면 말이죠.”
잠시 말을 멈춘 벨리타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경에게 명하겠어요. 영주들을 공격하세요.”
“알겠습니다. 다만 영주 중 백작 이상의 대귀족들은 공격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겁니다. 겁을 먹고 도망칠 만큼 그들은 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꼬리를 밟힐 수도 있습니다.”
“음, 그러면 귀족 기사단에 속한 영주들을 움직여야겠군요. 대 귀족들이 빠진다면 수라도 많아야겠지요.”
“그렇게 되면 내전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걸 원해요. 아니 그래야만 합니다. 에스토가 칼랜베르크에 구원을 요청하게 만들어야 해요.”
“내부 정리에 외국의 힘을 빌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걸려도 자체적으로 처리하려 할 겁니다.”
“그럴까요?”
“예. 오히려 에스토의 혼란을 노려 기안이 움직일 빌미를 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에녹스의 말에 벨리타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네요. 기안이 에스토에 힘을 쏟으면 우리는 베이가를 치면 됩니다. 그 후에 힘이 빠진 둘을 처리해도 되겠지요. 그건 오라버니께서도 생각하고 계셨던 거니까요. 하나를 먼저 먹느냐 둘을 같이 먹느냐의 차이일 뿐이에요.”
벨리타의 말에 에녹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말은 국력만 놓고 보면 가능한 얘기이기는 했다.
칼랜베르크는 오랜 세월 사라센 제국의 침략을 막으며 대륙의 방패 역할을 해왔다.
처음에는 대륙의 여러 나라에서 도움을 받았고 침략을 물리치고 제국으로 진군하기도 했었다.
사라센 제국의 영토에 여러 나라의 영지가 생겨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전력을 재정비한 제국의 반격은 매서웠고 점령당했던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그 후에는 지루한 공방이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고, 처음에는 도움을 주던 왕국들도 하나둘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칼랜베르크 왕국만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야 했다.
그 와중에 베이가 왕국은 칼랜베르크를 침략했고 몇 개의 영지를 빼앗겼다. 그전에도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 후로는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십여 년 전 칼랜베르크는 사라센 제국과 서로 황가의 일원을 결혼시키며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베이가를 치는 것이었다. 수개월 만에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기안이 개입했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처음 칼랜베르크의 황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종결됐다.
그 후에 칼랜베르크는 국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지금도 베이가 왕국을 칠 힘이 있음에도 그러지 못하는 것은 기안 때문이었다.
오랜 동맹인 에스토는 베이가 와는 불가침 조약을 맺고 계속 우호를 다지고 있었다. 십여 년 전에도 그들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기안만 관여하지 않는다면 베이가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는 있었다.
벨리타의 말처럼 기안이 에스토와 전쟁에 돌입하면 베이가에 대한 지원은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다.
그건 자국에 있는 늙은 황제도 젊은 황태자도 마찬가지다.
전쟁에서 직접 싸우지 않는 그들은 결과만을 생각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죽어갈 이들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그건 단지 숫자에 불과할 뿐이고 그 후에 얻는 영토와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전쟁을 겪었고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었다.
그 참혹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지만,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르고 그들은 계속 전쟁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아~ 그자가 오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의 말에 에녹스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그자라 하시면···?”
“에스토의 일 왕자.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군요.”
“윈스톤입니다.”
“그렇군요. 그자는 어떤가요? 에스토의 왕은 내가 그자와 결혼하러 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과연 내게 어울리는 사람인가요? 보고받은 것을 보면 영 아니던데···.”
“황녀님께 어울리지 않는 자입니다.”
“왕으로는 요?”
“그가 왕이 된다면 모든 이에게 불행이 될 겁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벨리타의 말에 에녹스가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봤다.
“에스토의 왕은 무능할수록 좋아요. 지금의 왕도 무척 무능하게 봤는데 조금은 생각이 있는 것 같아서 아쉬웠거든요. 그자를 왕으로 만들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요.”
“음···.”
다음 대 왕이 될 왕자를 왕으로 만들 방법은 딱 하나다.
“왜 그러죠?”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요. 그래서 생각해 본다고 한 거예요. 섣부른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그녀의 말에 에녹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에녹스 경. 나는 경이 내 어머니와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 주리라 믿어요.”
에녹스가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물론입니다. 모든 것은 황녀님의 뜻대로 될 겁니다.”
그런 에녹스를 보며 벨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선 지시한 일을 부탁해요. 파티를 시작해야지요.”
에녹스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예를 취한 후 실내를 벗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는 밝은 햇빛에 눈을 찡그리다가 피식 웃었다.
같은 태양이지만 이곳의 태양은 모국보다 조금 약한 느낌이었다.
밝은 태양을 지나가는 구름이 가리자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 하는 일은 성미에 맞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칼랜베르크의 황제는 너무 오래 살았다.
아들들은 전쟁으로 병으로 죽고 늙어서 죽는 동안 그는 살아있었다.
90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정사를 돌보고 있었다.
하지만 건강은 좋을지 몰라도 정신이 맑지 못하다.
했던 말을 기억도 못 하고 잊어버리기 일 수.
일생 수많은 일을 했고 칼랜베르크 역사에 획을 그을 일도 많았다.
위대한 왕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미 실권은 그의 손자이자 황태자에게 모두 넘어가 있고 그의 눈과 귀는 이미 모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스무 살 밖에 안 된 황태자가 상황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그 전에 제국의 실세라 불린 인물.
수십의 황자 중 서열도 낮은 이를 황태자로 만들고 칼랜베르크를 좌우하던 붉은 눈의 주인.
그자가 모든 것을 그렇게 만들었다.
황태자도 처음에는 그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그런 황태자가 그의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자신 때문이었다.
붉은 눈의 주인을 죽인 것도 그 눈을 뽑아 황태자에게 준 것도 자신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후회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
바꿀 수 있다고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때와 같은 상황이 된다고 해도 자신은 또 그렇게 할 것이다.
이유는 바로 약속 때문.
지금까지 살아있고 또 살아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으니까.
‘어차피···.’
다른 것을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벨리타가 원하는 대로 해주면 자신의 일은 다 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자신은 그녀만 괜찮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궁을 나서며 인사를 건네는 에스토의 기사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답례를 하고 지나쳤다.
요즘 그들은 너무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 왔을 때 에스토의 상황을 보고 어이가 없었을 정도.
칼랜베르크와 비교하면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진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멀어도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내부를 정비하고 뭔가를 하기 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 보였다.
물론 그걸 가속하는 게 자신이기도 하지만 미안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나가는 에스토의 기사들을 보며 에녹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 고개를 저으며 말에 올랐다.
‘난 나의 일을 할 것이다. 나를 원망하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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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어제는 엎드려 쓰기 스킬을 시전하다 잠들었습니다.
턱에 주름이 잡혔습니다.
2편이 밀렸군요. 쿨럭.
내 무덤을 내가 파고 있는 기분이고 점점 양치기 소년이 돼가고 있는 것 같지만...
나이 제한에 걸려서 소년은 아닌...
무슨 말인지...
이제 슬슬 타국 이야기도 나오고 할 겁니다.
다음 장에 영주회의 시작하고 하면... 바빠지겠군요.
누가? 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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