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5)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기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티란테의 말에 볼란트는 뒤를 돌아봤다.
왕자의 호위를 위한 긴 행렬.
넘버즈 No.3인 자신과 No.4인 티란테가 선두에 서고 기사 200명이 왕자가 탄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거기에 뒤따르는 시종과 짐 마차에 병사들까지 하면 대략 500여 명.
왕국의 국경을 모두 둘러본다는 건 상당히 긴 여정.
왕국을 크게 한 바퀴 도는 일이고 각 영지나 요새마다 며칠 머물며 국경을 둘러보고 또 이동하고 하다 보면 거의 1년은 걸렸다.
앞으로 몇 개월이면 기안과 인접한 국경 쪽을 모두 돌아보고 끝나게 돼 있었다.
이건 다음 대 왕이 될 왕자가 해야 하는 일종의 의무 같은 것으로 지금까지 모든 왕이 왕자 시절 해왔던 일이었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인데 중간에 돌아오라는 소식을 받고 서둘러 귀환하는 중.
전쟁이 발발한 것이 아닌 이상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는데, 전령에게 받은 것은 빨리 귀환하라는 왕명뿐이었다.
수도 한복판에서 방화사건이 있었다는 소식은 접했고 그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건 봄에 있었던 일.
표면적으론 일단락 된 일이라 인제 와서 그 일로 불러들이는 건 아닌 듯했다.
수도에서 발생하는 일은 계속 자신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다만 계속 이동했기 때문에 소식을 전하는 이와 엇갈리는 경우가 많아 시일이 좀 걸린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아무튼,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복귀하라는 명에 서둘러 이동했고 왕실 직영지 근처에 도착해서야 상황을 좀 파악할 수가 있었다.
솔직히 수도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정리된 기사가 수백에 달하고 관료들의 수는 더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귀족 출신들이었다.
그 때문에 휘하기사들이 동요하는 거였다.
정리된 기사 중엔 확실히 도가 좀 지나친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몇 명을 제외하면 다들 그 정도로 저런 벌을 내리냐는 말들이 많았다.
예전부터 다른 기사들도 다 그랬고 지금까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이러는 것이 이상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 중.
귀족에 대한 견제가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기사건 신료건 따지고 보면 왕가의 가신.
그런 이들을 벌한다는 것은 관계된 가문도 쳐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건 왕의 힘도 줄어든다는 말이었다.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내부정리에 대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무슨 기미라도 있었으면 대비를 했겠지만, 문제는 이미 시작이 됐고 그렇게 따져보면 이중에도 반 정도는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거였다.
기사들이 불안해할 만했다.
그리고 어쩌면 자신이나 티란테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었다.
그래도 자신은 넘버즈이고 가문의 후광도 있으니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사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티란테의 물음에 뒤를 보던 볼란트가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어떻게 하고 말고 할 것이 있소?”
“음···. 이대로 수도에 도착하면 처벌을 피할 수 없는 이들이 좀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는 막아 줄 수도 있지 않겠소?”
“그리 간단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이오? 그들에게 도망이라도 가라고 할 생각이시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 왕실 직영지에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곧 영주 회의가 있다니 그때까지만 시간을 번다면 다들 별 탈 없이 지나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티란테의 말에 볼란트는 즉시 대답하지 않고 앞을 본 채 말을 몰았다.
“지금 수도에 갔다가는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직영지에 도착하면 늦습니다. 그러니 조금 돌아가시지요.”
그 말에 볼란트가 고개를 돌려 티란테를 봤다.
“영주 회의 전에 도착하면 안 된다고 보시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영주들이 도착하기 전에 빨리 정리를 하고 싶을 테니까요. 우리가 힘을 합친다고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내무대신과 법무대신은 영주인데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넘버즈 상위번호라고 안 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왕자가 우리 편이라고 해도 아직 왕자입니다. 왕이 내린 결정을 왕자가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하긴. 그래도 너무 지체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아주 늦을 필요는 없습니다. 며칠이면 됩니다. 영주 회의가 시작된 직후라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그때라면 가문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둘만이 아니라 뒤에 있는 이들의 가문까지 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음, 영주회의를 소집하며 국경에 나가 있는 모든 왕실기사를 소집했소. 그 말은 영주회의 때 반발을 예상하고 그들을 압박하겠다는 거겠지. 그리고 영주들과 무력충돌도 각오하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러면 별로 영향을 주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이라도 우리의 힘이 필요할 겁니다. 영주들이 힘을 합치면 왕의 힘보다 강합니다. 예측한 것과 직접 맞닥뜨리는 건 다릅니다. 정리를 위해 쳐낸 이들이 아쉽게 느껴질 테고 그건 우리에게 좋게 작용할 겁니다.”
“흐음···.”
“물론 저 뒤에 있는 이들을 버리실 거라면 지금 수도로 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둘은 빠져나갈 방법이야 있겠지요. 하지만 저들이 살겠다고 입을 놀리기 시작하면 우리도 무사하기는 힘들 겁니다. 넘버즈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끝나면 좋게 끝나는 거겠지요.”
“이 속도라면 해 질 녘에서나 직영지에 들어설 테니 생각 좀 해봅시다.”
그렇게 말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티란테의 말을 듣고 나니 불안하기도 했다.
왕자를 설득해서 며칠 돌아서 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보자고 했지만 벌써 돌아가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잘 쉬었는가?”
“예.”
“몸은?”
“괜찮습니다.”
“다행이군. 그런데 경은 내가 그리 못 미더웠는가?”
“무슨 말씀이신지···.”
“넘버즈 승급 대결을 말함이네. 경이 이기고 그가 물러나게 되면 그 죗값을 치르게 할 요량이었네. 굳이 목숨을 걸 필요가 없었다는 말이네.”
에런 왕의 말에 길리안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 상태로 승부가 끝났다면 저도 그리고 그도 그 승부에 만족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한 번 더 결투를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에런 왕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경은 참. 음···. 지난 일이니 더 말은 하지 않겠네. 경을 나무라는 것도 아니고. 허나 앞으로는 목숨을 좀 더 소중히 하게. 할 일이 많을 것이니.”
“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독을 쓴 것은 아직 발표하지 않았네. 넘버즈의 대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또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넘버즈의 위상은 어떤 일이 있어도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지. 물론 그런 자를 넘버즈에 임명한 나의 잘못이지만, 경을 볼 면목이 없군.”
“괜찮습니다. 전 그 일은 신경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죽었고 저는 살아있습니다. 그뿐입니다. 그리고 넘버즈에 실망한 것도 사실이지만 모두가 그와 같은 것도 아니고, 그건 지금이라도 바꾸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길리안의 말에 에런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이번 일로 베어드 백작 가에서 경에게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못하게 할 것이네. 그건 내 약속하지.”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가 않네. 나의 기사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러니 경은 신경 쓰지 말고 경의 일을 하게.”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경과 이렇게 둘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군.”
“그렇습니다.”
“처음 경을 보았을 때가 생각나는군. 아직도 내가 다른 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는가?”
“예. 기사는 자신의 주군 이외의 사람을 위에 놓지 않습니다.”
“경에게 그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군. 생각해보니 경을 통해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하고선 그러질 못했군.”
“이미 많이 들으셨습니다.”
“음?”
“이번에 많이 말씀드렸고 그 말씀을 들어 주셨지 않습니까?”
“허허.”
헛웃음을 흘린 에런 왕이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게 그렇게 되는군. 내 이번에 성 밖에 나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느낀 것이지만 내게 하고픈 말이 무척이나 많았는데 전해지질 않았더군. 앞으로도 경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게.”
“어찌 저 혼자 모두의 말을 전하겠습니까. 직접 들으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임은 경도 알고 있지 않은가? 그들과 약속한 것도 있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군. 경에겐 좋은 방법이 없는가?”
그 말에 길리안이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제가 자란 라이라프에선 영주가 한 달의 한 번 마을 촌장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마을 촌장들은 영주와 만나기 전에 마을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결국, 모든 영지 민의 말을 듣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영지라서 가능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체계를 잡으면 왕실 직영지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흐음, 그렇군. 내 다른 이들과 상의해 보도록 하지. 라이라프의 영주라···.”
그를 만나본 적이 있었다.
바로 영지의 승계와 작위를 인정할 때.
딱 그때 한 번이었다.
영주에게 주어진 의회의 의원 자리도 자신에게 대리인을 임명해줄 것을 위임하고 그 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영주들은 서신도 보내고 선물도 보내고 하는데 그는 그런 것도 없었다.
자신을 떠난 엘런이 라이라프의 영주를 섬기는 것도 알고 그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었지만, 찾아오는 일도 없고 딱히 부를 일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내부정리를 하면서 영주들과 얽힌 것도 꽤 많았는데 라이라프의 영주는 단 하나도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 영주도 참 고집스럽다고 해야 할까?
툰족과 교역을 허락해 달라는 것도 몇 년 전부터 요청한 것인데 자신에게까지 올라오지를 않았다.
알았으면 허락을 해줬을 텐데 몰라서 못 해 준 것이다.
계속 절차를 밟아서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써도 될 텐데 그러지 않고 계속 절차를 밟고 있었던 게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
길리안의 형이 올라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이번에 사람을 보내면서 그 건에 대한 승인도 해주었다.
생각해보면 참 재밌는 곳이었다.
인구는 대략 1만인 동부 끝자락의 작은 영지.
그곳에 엘런이 있고, 크롬의 영웅이 나왔고, 이제는 넘버즈가 나왔다.
그리고 십수 년 전 왕실에 도움을 줄 이들을 키우겠다던 로렌미어 자작이 아들인 부르스에게 작위를 넘기고 떠난 곳도 라이라프였다.
그러고 보니 별다른 보고가 없어서 시간이 오래 지나 잊고 있었던 일.
이번에 보고도 들을 겸 그도 불러들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영주회의 때 라이라프의 영주를 볼 테니 그때는 그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볼 생각이었다.
그와의 만남이 기대될 정도였다.
생각을 접은 에런 왕이 길리안을 보며 말했다.
“이제 경은 날 만나는 데 아무런 제약도 없으니 언제든 와서 내게 좋은 말을 해주게.”
“그러겠습니다.”
“그럼 가서 경의 일을 하게. 아, 곧 좋은 날을 잡아 정식으로 임명식을 할 것이니 그리 알게.”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사람은 역시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이건 어제분입니다.
오늘 분은?
오늘 집에 와서 또 써야죠.
전 이만 자러 ㅋ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