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7장(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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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안 경은 어떤가요?”
“괜찮습니다.”
“정말 다행이네요.”
낮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엔젤을 본 윌리엄이 미소를 지었다.
동생이 쓰러졌을 때는 정말 놀랐다.
그 정도로 쓰러질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독이라는 말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죽은 놈을 살려서 갈갈이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이미 죽은 놈을 어쩔 수는 없는 일.
그나마 동생이 무사해서 화는 많이 가라앉았다.
앞으로 위험한 일이 더 많을 테지만, 그저 조심하라는 말 외에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는 길리안에게 그러마 하고 대답했었다.
어차피 자신이 내색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일.
그래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진심으로 동생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적이 많아졌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시간이 좀 지나면 동생의 주변엔 뜻을 같이하는 더 많은 이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들을 등에 업고 뭔가를 도모할 녀석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테니까.
“아아~ 정말 길리안 경은 대단해요. 뭔가 더 멋진 표현이 있을 텐데 당장 떠오르질 않네요. 동생이 정말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이베트가 더 좋은 갑옷을 준비해 준다고 해도 굳이 자신의 갑옷을 입고 넘버즈의 승급 결투에 나선 길리안.
마치 자신의 한이라도 풀어주려는 듯했다.
그래 주길 바란 적은 없지만,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비록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선 것은 아니었지만, 동생을 통해 그 기분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길리안에게 더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자신을 위해주는 건 그 정도면 차고 넘칠 정도였으니까.
난 괜찮으니 너의 길을 가라고,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라고 말했다.
“어깨에 랜스가 박혔는데도 어쩜 그리 태연하게 말을 몰수가 있죠?”
열띤 목소리로 말하는 엔젤을 보며 윌리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큰 고통을 견디고 살아온 녀석이고, 더 큰 상처를 입고서도 티를 안 내던 녀석이었다. 길리안은 자신이 모르고 있는 줄 알았겠지만, 그냥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저 라이라프 산맥으로 갈 준비를 할 때면 포션 한 병을 건네는 거로 걱정을 대신했을 뿐.
그것마저도 아껴 쓰던 녀석이 길리안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 말에 윌리엄은 머릿속에 유명한 기사들을 떠올려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수도에 머물렀던 건 아카데미에 다니는 동안뿐이었고, 크롬에서 상처를 입고 훈장을 받을 때 잠시 머물었던 게 다였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이 관심을 두던 기사들은 넘버즈나 그에 준하는 기사뿐이었고 그게 벌써 몇 년 전이니까.
“어떤 기사를 말씀하시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윌리엄의 말에 엔젤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말하는 기사는 크롬의 영웅 윌리엄 클라우드 경입니다.”
그 말에 윌리엄은 피식 웃었다.
“절 놀리시는 겁니까?”
“어머, 그럴 리가요. 늘 있는 국경 순찰이라 랜스도 지니지 않고 요새를 출발. 적과 조우했을 때 적의 수는 두 배 이상. 기안 기사들의 랜스 돌격을 받아 냈을 때 아군 기사의 반 정도가 사망 또는 전투 불능. 세 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엔젤의 말이 시작됐을 때는 놀란 표정이었던 윌리엄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그녀의 말이 계속될수록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
늘 있는 순찰이라 랜스를 두고 간 것이 아니다.
선임 기사들과 지휘를 맡은 기사가 필요 없을 테니 두고 가자고 해서 그 말에 따랐을 뿐.
출발 인원은 지휘기사 포함 30명.
보통의 순찰은 말을 타고 달리며 2시간 정도 이루어진다.
기안의 기사들과 조우했을 때, 아무도 전투가 벌어질 거로 생각지 않았다.
그전부터 서로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고 들었고, 실제로 몇 번 마주쳤지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은 적들이 랜스를 들고 돌격해왔다.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랜스도 없는데 지휘기사는 무기를 빼 들고 돌격 명령을 내렸다.
용감한 것이 아니라 무모하고 멍청한 명령이었지만,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다들 마상 무기를 들고 적과 마주쳤다.
자신도 마찬가지.
랜스를 방패로 빗겨 막으며 다른 적을 타격하고 지나쳤다. 적이 말에서 떨어졌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말을 달리며 주변을 살피니 수가 반으로 줄어있었고 지휘를 맡았던 기사도 보이질 않았다.
달리던 동료들이 말머리를 돌렸고 그들과 대열을 유지했다. 그때 비틀비틀 일어서는 아군기사 두 명이 보였다.
그들을 향해 달려는 기안의 기사들.
아군을 두고 말을 돌릴 수는 없는 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모두 말을 달려 2차 돌격을 했고 그때 왼쪽 어깨에 랜스가 박히고 말에서 떨어졌다.
충격이 컸지만 쓰러져 있을 새도 없었다.
또다시 적이 돌격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기안의 기사들은 자신들을 포위하고 말에서 내려 무기를 빼 들었다.
남은 아군은 여덟.
두 번의 격돌로 죽인 적의 숫자보다도 적었다.
랜스 돌격이 아니라고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고, 그때부터는 정말 미친 듯이 싸웠다.
얼마나 싸웠을까?
적들이 물러나고 그들의 지휘관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자신을 상대해서 버티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는 정말 강했다.
심한 부상 때문이 아니라 멀쩡했어도 이기기 힘든 상대.
결국, 그자에게 팔을 내주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적을 11명이나 죽인 경은 정말 대단 하단 말이 부족할 정도예요.”
윌리엄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마치 그 자리에서 직접 보신 것처럼 자세히 알고 계시는군요. 저에 대한 조사라도 하신 겁니까?”
“아,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어요. 약간 알아보기는 했지만 조사한 것은 아니에요. 그리고 그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건 그 자리에 있던 기사에게 들었기 때문이에요.”
엔젤의 말에 윌리엄은 마틴을 떠올렸다.
크롬에 가기 전에 술 한잔하자던 녀석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크롬으로 떠나기 전에 마틴 경이 다녀갔어요.”
윌리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
“마틴 경이 그러더군요.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존경하는 기사가 윌리엄 경이라고. 그 자리에 있던 그 누구도 경처럼 싸우지 못했다더군요.”
“전 그저 살기 위해 싸웠을 뿐입니다. 용기가 필요했던 상황이라기보단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살기 위해 몸부림쳤을 뿐입니다.”
“마틴 경의 말은 다르던데요? 그는 자신은 영웅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어요. 그저 한 기사에게 목숨을 구원받은 거라고 하더군요. 전의를 상실한 자신의 앞을 지킨 윌리엄 경 때문에 살아있는 거라더군요.”
“마틴이 쓸데없는 말을 한 겁니다. 며칠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제 검으론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아니에요. 마틴 경이 전해달라고 하더군요. 경의 검으로 자신을 지켜줬으니 그날의 일로 더는 자책하지 말라고요. 남자들은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게 참 서툰 모양이에요. 다른 사람을 통해 전해달라고 하는 걸 보면.”
윌리엄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경에 대해 조금 알아봤어요. 길리안 경의 형이 어떤 사람이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어차피 슈발리에 졸업생이라 어렵지도 않았고요.”
아무 말도 없는 윌리엄을 보며 엔젤이 계속 말했다.
“길리안 경이 입학시험 때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보유하고 있던 기록도 많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역시 아카데미 때 성적도 정말 우수하더군요. 통합축제 때는 운이 없었지만요. 한사람과 계속 얽히기도 힘든데 그게 로렌스 경이었다니.”
그건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어이가 없기는 했다.
“졸업하자마자 치른 왕실 기사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셨더군요.”
“그건, 다른 넘버즈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대결과 시험은 다르니까요. 그런데 억울했겠어요.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왕께 직접 서임을 받는 영광을 귀족에게 빼앗겼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그런 일은 흔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그랬던 것 같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네요.”
그때야 윌리엄이 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건 다행이군요.”
“이번 기회에 많은 것이 변했으면 좋겠어요.”
엔젤의 말에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변하는 게 아닙니다.”
“변하는 게 아니라고요? 그럼···.”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죠.”
“네?”
“군주는 군주의 몫을 다하고, 신료들과 기사는 그 본분에 충실하고, 법을 어기는 자는 벌을 받는 것이 당연한 세상. 어릴 때도 그렇게 배웠지만, 아카데미에서도 그렇게 가르쳤고 전 그렇게 배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말해온 세상. 그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멍한 표정으로 윌리엄을 보던 엔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 형에 그 동생이군요.”
“길리안은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생각도 저보다 바르고 마음도 저보다 강합니다.”
보통 집안에서 뛰어난 인재가 나와 명성을 드높이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더 난리다.
자길 닮아 그렇다는 말 정도는 누구나 하는데 윌리엄은 오히려 자신을 더 낮추고 동생을 치켜세웠다.
그런 윌리엄을 보는 엔젤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길리안 경 덕에 아카데미의 명성이 정말 많이 높아졌어요. 제대로 가르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이득만 취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요.”
윌리엄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네?”
“직접 가르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전 슈발리에 출신이고, 제가 이곳에서 배운 걸 길리안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가르친 것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지요.”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 길리안 경에게 더욱 신경 쓸 거예요.”
“저야말로, 동생에게 늘 힘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 아~ 오늘은 정말 가슴이 뛰네요. 갑옷을 입고 신나게 말을 달리고 쓰러질 때까지 검을 휘두르고 싶은 기분이에요.”
그런 엔젤을 보며 윌리엄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마찬가지여서 그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제 검 좀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윌리엄 경.”
윌리엄이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보시다시피 전 엔젤 경의 검을 받을 만한 기사가 못 됩니다.”
“경이라는 칭호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기사로 봐주시니 기사로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엔젤의 진지한 표정과 눈빛에 윌리엄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엔젤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으로 다가가 두꺼운 책 한 권을 밀었다.
그러자 책장이 옆으로 밀리며 입구하나가 나타났다.
“그런 곳이 있었군요.”
놀란 듯 말하는 윌리엄을 보며 엔젤이 싱긋 웃었다.
“여긴 총장 전용 수련실이에요. 슈발리에 아카데미 총장은 늘 기사, 아니 기사가 아니면 될 수 없으니까요. 기사에게 수련은 생활이니까요. 그럼 먼저 들어가 계세요.”
“저 혼자 말입니까?”
“이러고 검을 휘두를 수는 없으니까요.”
치마를 잡고 살짝 무릎을 굽히며 말하는 엔젤.
그걸 보고 웃은 윌리엄이 수련실로 들어가다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에 기사와 검을 맞댈 생각을 하니 긴장됩니다.”
“엄살이 심하시네요. 완전 무장하고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윌리엄이 등을 돌린 채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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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드디어 제 연휴의 시작이네요.
다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시길 바랍니다.
고향에 즐거운 마음으로 조심히 다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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