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11)
바닥을 구르다 멈춘 투구를 제나가 조심스럽게 집어 들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 도련님.”
“아! 도련님이구나.”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길리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뭘 하긴요. 당신 기다리고 있었죠.”
“그 복장은···. 하아~.”
길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반긴 것은 노예인 제나가 아니라 라데카였다.
그냥 어서 오라고 하는 거였으면 마주 인사를 했을 텐데, 제나가 처음에 입고 있던 옷을 입고 주인님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서 정말 깜짝 놀랐다.
손에 들고 있던 투구를 떨어트릴 만큼.
다 드러난 어깨나 가슴골은 그렇다고 쳐도 맨발에 허벅지까지 올라온 짧은 치마 때문에 드러난 다리.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이상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런 옷을 입은 겁니까.”
“당신이요. 당신 보여주려고 엄청 용기 내서 입은 거라고요.”
그 말에 다시 한숨을 내쉰 길리안이 등에 있던 디스트로이어를 벽에 기대 놓고 라데카에게 다가갔다.
찌푸린 얼굴로 다가오는 길리안을 본 그녀가 한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설마 화났어요?”
길리안은 대답 없이 망토를 풀어 라데카의 몸을 덮어주고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화가 난 건 아니지만 불쑥 찾아와 이러는 건 부담스럽습니다.”
“일 때문에 온 거라고요.”
“무슨 일입니까?”
“금방 끝날 얘기는 아니에요.”
“그럼 씻고 올 테니 옷을 갈아입으세요. 그리고 제나.”
“예.”
“이 옷 다 버리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만.”
“죄송합니다. 그저 잘 때 입으려고···.”
“제나는 잘못 없어요. 내가 하는 말을 거부할 위치가 아니니까. 내가 억지 부려서 이렇게 된 거니까 나무랄 거면 나한테 해요. 그리고 이 옷 하타 배울 때 입으면 어떨까 하고 물어보려고 입고 있었던 거라고요.”
“안 됩니다. 그리고 하타 가르쳐 드린다고 확답한 적도 없습니다.”
“고개 끄덕했잖아요.”
“미네르바 경에게 한 거죠.”
“우으! 나한테도 가르쳐 달라고요. 피로도 풀리고 머리도 맑아진다면서요. 마법사한테 맑은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나 왕국 마탑 소속 마법사라고요. 내가 마법 발전에 기여하면 결국 왕실에 좋고 왕국에 좋고 많은 사람들한테도···.”
“알겠습니다. 단! 이 옷은 절대 안 됩니다.”
“왜요? 엔젤 언니가 입었던 옷보다는 이게 훨씬 나은 거 같은데. 솔직히 그 옷이 더 부끄럽다고요. 그리고 내 다리가 그렇게 엉망이냐고요. 보자마자 가려버릴 만큼 못 봐줄 정도냐고요.”
“엔젤 경이 입었던 옷도 안 됩니다.”
“치. 엔젤 언니도 기사처럼 대하기로 했나 보네요. 나도 기사 작위를 받든가 해야지.”
“옷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니···.”
“알았어요.”
“그럼 잠시 후에 뵙죠. 그동안 갈아입으세요.”
“네. 옷 갈아입고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됐죠?”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길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길리안이 사라지자 라데카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가 웃으며 망토를 벗었다.
치마 밑으로 훤히 드러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다가 길리안의 놀란 표정이 다시 떠올라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오기 전부터 제나라는 노예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왕이 괜한 짓을 했다고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었다.
길리안의 형이 한 이야기는 자신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일. 그래도 조금 더 알고 싶어서 어릴 때 그가 겪은 일에 대해서 자세히 조사하게 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알게 됐다.
그래서 더 궁금하기도 했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자 노예는 어떻게 대하는지가.
“목욕시중은 정말 안 하나 보네요?”
“예.”
“갑옷 벗는 거는요?”
“혼자 입으시고 혼자 벗으십니다. 다른 옷들도···.”
그녀의 말을 들으며 라데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역시 강제로는 아무것도 안 할 사람이네. 어릴 때 받은 충격은 무서운 거지.’
자신도 어릴 때 사형 집행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었다.
목이 잘려나가고 피가 쏟아지는 걸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가질 않았고 너무 무섭기까지 했다.
그때부터 피를 보는 것이 너무 싫었고 피 냄새도 싫었다.
기사들의 결투를 보다가 기절한 후에는 절대 보지 않았다.
길리안의 경우야 좋아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관전했지만, 그가 다치거나 한 것도 아닌데 결과는 역시나 기절.
크리스와의 결투 때도 끝내는 기절.
그만큼 어릴 때 각인되다시피 한 공포는 무서운 거였다.
길리안의 경우도 그럴 것 같았다.
절제력이 강하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아예 그럴만한 계기를 만들지를 않는다는 것.
제나의 옷을 보통 여자들이 입는 긴 치마차림으로 바꿔 놓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문제는
‘다른 여자한테 가드 치는 건 고마운데 나한테까지 그러면 곤란하다고.’
그거였다.
어디 가서 딴짓은 안 하겠지만, 자신한테도 아무 짓도 안 할 가능성이 크다는 거였다.
‘그래도 아까의 반응을 보면 제대로 여자로 보고 있기는 하네.’
여자로 보고 있지 않으면 그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테니까.
‘너무 자극이 심했나?’
라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은 라데카가 말했다.
“참 재밌는 사람이죠?”
“좋은 분이십니다.”
“이 옷 생각보다 편하네. 치렁치렁한 옷들보다 훨씬 편하고 좋은데. 아~ 유행시키고 싶다. 남들 앞에서 입기엔 부끄럽지만. 고생 많았겠어요.”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나의 말에 라데카가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이런 옷 입고 있으면 남자들의 시선을 단숨에 빼앗을 테니까. 가만히 두지도 않았을 테고.”
제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이 옷은 버리도록 해요. 시키는 일 잘하고 하지 말라는 일 하지 않으면 내칠 사람은 아니니까.”
“예.”
“그가 예의 있게 대한다고 본분을 착각하면 곤란해요. 무슨 말인지 알죠?”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노예의 삶에 적응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반항한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없고 돌아오는 것은 모진 체벌 뿐.
적응이 아닌 체념이라고 봐야 했다.
그나마 고급 노예로 분류돼서 에스토 왕궁까지 오게 됐지만, 노예는 노예일 뿐.
그런데 새로운 주인으로 모시고 나서부터 세상이 변했다.
언제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노예인 자신을 사람으로 대해준 사람.
“아, 잠옷은 내가 몇 벌 보내 줄게요.”
“감사합니다.”
제나는 고마움을 담아 깊게 허리를 숙였다.
새로운 주인을 모시고 아무도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없었지만, 라데카의 경우는 놀랍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기억을 못 하겠지만, 자신은 라데카를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눠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자신에게 저렇게 말할 만한 신분이 아니었으니까.
“아까부터 계속 의아한 모양인데 그런 눈으로 볼 것 없어요. 그 사람이 당신을 대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대하는 거니까요. 나 옷 갈아입는 거 좀 도와주겠어요?”
“예.”
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라데카의 뒤를 따랐다.
“완성된 겁니까?”
영광의 갑옷을 만져보며 말하는 길리안을 보고 라데카가 말했다.
“며칠 만에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아직 손봐야 할 부분은 있지만, 결투가 코앞이라 가져왔어요. 입어 봐요.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팔찌를 끼고 아무 데나 손을 대봐요.”
길리안이 팔찌를 끼고 손을 대자 전처럼 갑옷이 열렸다.
그때는 등 뒤에 있는 문양에 손을 댔고 빛도 일어나고 열릴 때 소리도 났는데 이번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훨씬 부드럽다고 해야할까?
길리안이 갑옷에 맞춰 서자 라데카가 투구를 건넸다.
그걸 쓰자 전처럼 갑옷이 본래 모양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불편하지는 않아요?”
몸을 움직여 본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착용감은 좋습니다. 그런데 안면 가리개를 부탁드렸습니다만.”
“물건이 와야 마탑에서도 작업을 하죠. 말만 하면 뚝딱 나오는 줄 알아요? 그거 저기에 붙이는 것도 일이라고요.”
그러면서 길리안의 얼굴에 손을 대려 했다.
손이 막히자 웃으며 물러나 기록을 했다.
“얼굴을 다 가리는 투구가 위협적으로 보이고 표정도 숨길 수 있어서 필요하다는 건 아는데, 투구 부분 실드는 일단 되니까 이번 결투는 그 상태로 하세요.”
그러다가 뭔가 생각이 났는지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에 있던 가면을 집어 들었다.
“아니면 이거 써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면 어디서 난 거예요?”
“라이라프 산맥에서 주웠습니다.”
“주웠다고요? 음···.”
잠시 가면을 보던 라데카가 다시 말했다.
“이 가면 상당히 특별한 물건이에요. 내가 당신 갑옷 강화해 줬을 때 조금 확인해 봤거든요. 사실 이것 때문에 그날도 늦게 도착한 거고요.”
“저도 알아보려고 생각했다가 깜빡하기는 했습니다. 혹시 어떤 면에서 특별하다는 건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그날 시간이 없어서 자세히 확인은 못 해봤지만, 이거 마법 식을 새길 수가 없어요. 지금 내 능력으론 강화 같은 건 안 돼요. 그리고 마법도 안 통해요.”
“마법이 안 통합니까?”
“직접 보는 게 빠르겠네요. 이거 들고 있어 봐요.”
길리안이 가면을 받자 옆으로 손을 뻗게 한 라데카가 물러나서 주문을 외웠다.
잠시 후 그녀의 손에 빛나는 작은 화살이 생겨났다.
“이렇게 시전자 주변에 화살이나 불덩이 같은 걸 만들어 쏘아 보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다만 적중률이 떨어지고 상대가 피할 수도 있죠. 그래서 몇 가지 마법을 더 써서 표적을 따라가게 하는데 생략할게요. 위력은 약하게 했지만 아마 사람 몸을 관통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거예요.”
말을 마친 라데카가 손을 쭉 뻗자 손 위에 떠 있던 빛나는 화살이 가면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리고 가면에 채 닿기 전에 부서지듯 사라져버렸다.
“어때요?”
“가면에 닿기 전에 사라졌습니다.”
“타격감은요?”
“없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라데카가 말했다.
“좀 더 알아보고 싶지만 일단은 참아야겠네요. 참고로 공격마법은 대상에 직접 사용하는 것도 있고 일정 지역과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있어요. 그날 시험 했을 때는 둘 다 안 통했어요. 마법이 무효화 되는 느낌이랄까?”“그렇군요.”
“그렇군요가 아니에요. 완벽한 마법 방어 아이템일지도 모른다고요. 더 확인해 보고 싶지만 나보다는 교수님, 아니 마탑주께 맡겨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늘 가지고 다녀요. 직접 마법 공격을 당할 일은 별로 없겠지만, 마탑주 사건 때 도망친 마법사도 몇 있으니까. 혹시라도 그자들과 마주치게 되면 도움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가면은 동굴이라고 해야 할지 던전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런 곳에서 얻은 겁니다. 이 가면과 책 몇 권을 같이 얻었습니다.”
“몇 권이요? 보통 마법사들 연구하는 곳에는 더 많을 텐데···.”
“많지 않았습니다. 제가 읽지 못하는 거라 집에 가져다 놨습니다만. 혹시 그게 있으면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아무리 봐도 지금은 만들 수 없는 물건이고 적어도 수백 년 전에 만든 것 같으니까요. 개인적으론 마도 시대의 물건이 아닐까 생각했었어요. 책도 그렇게 오랜 시간 보존이 돼 있었다면 정말 엄청난 걸지도 몰라요.”
말을 하는 동안 눈을 빛내며 얼굴까지 상기된 라데카를 보고 길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형에게 집에 있는 물건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도착하면 보여드리죠.”
“정말요? 정말이죠?”
“예.”
환하게 웃던 라데카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에요. 안 볼래요.”
“네?”
“그거 받으면 약점이 될 거 같아서요. 그럴 사람은 아니지만.”
라데카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전 단지 이 가면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을 뿐입니다. 이게 아니었다면 제 얼굴도 상처투성이였을 테니까요. 신기한 물건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대장장이들은 전부 모른다고 하고 변형도 안 되고 녹지도 않습니다. 줄이 없는데도 얼굴에 달라붙어 있고 구멍도 없는데 숨도 쉴 수 있고 쓰고 말도 할 수 있죠. 가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곤 했으니까요.”
“정말 신기하네요.”
“그래서 더 알아보고 싶습니다. 실력 있고 믿을 수 있는 마법사시니까요. 믿고 맡길 수 있겠지요.”
“마법사인 내 실력을 당신이 어떻게 알아요? 물론 실력 있다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하지만.”
길리안은 대답 없이 오른쪽 팔뚝 부분을 쓰윽 문질렀다.
그러자 문양이 하나 나타났고 그걸 누른 후에 투구를 벗자 갑옷이 벗겨졌다.
처음 입었을 때 벗겨지지 않아서 뜯어냈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다가 말했다.
“영광의 갑옷은 대단한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새겨진 마법 식 중에는 마탑주님도 처음 보는 것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건 맞아요.”
“아무리 간단한 확인이라고 해도 아무나 보내지는 않겠지요. 가겠다고 우긴다고 보낼 분도 아니고요. 마탑주님은요.”
“잘 알고 있네요. 마법사로는 인정해줘서 고마워요. 마법사이기보다는 여자로 더 인정받고 싶지만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길리안이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거에 대해 할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라데카가 한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오늘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들으면 많이 혼란스러울 수 있어요. 결투를 앞두고 있잖아요.”
“언제든 싸울 수 있습니다. 싸움이 시작되면 상대에게 집중 할 수 있습니다. 언제 어떤 때라도.”
그 말에 라데카가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오늘은 싫어요. 궁금하면 찾아오라고요. 당신이 나를요. 내가 왔을 때 한꺼번에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요.”
“음.”
“그리고 누가 갑옷을 벗으라고 했어요? 다시 입어요. 아직 확인할 게 많다고요. 나가서 기사들 불러서 대련도 좀 해요. 안전한지 확인해야 하니까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길리안이 알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갑옷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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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두 편을 올리려고 했는데 다음 편이 조금 감정 잡고 써야 하는데 잘 안 써지네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주인님?의 범인은 라데카였음이 밝혀졌습니다.
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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