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8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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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갑자기 들리는 낮은 헛기침소리에 어둠속에서 뭔가를 하고 있던 이가 화들짝 놀라 돌아섰다.
언제 빼들었는지 손에는 작은 단검이 들려있었는데, 어둠속에서도 스스로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말.. 론?”
작은 여자의 음성에 어둠의 일부처럼 서있던 검은 인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가씨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쉿! 목소리가 크단 말이야.”
“저택에 깨어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인과 집사가 나가고 다시 눈을 붙이고 있지요.”
“그래? 그건 다행이네.”
“그보다 아직 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계셨던 겁니까?”
“뭘 하긴 그가 어떻게 하고 사나 궁금해서 와봤지.”
그렇게 말하며 길리안이 쓰는 침대에 걸터앉아 복면을 내렸다.
커다란 눈과 어울리는 오뚝한 코와 작고 붉은 입술. 일전에 고블린가면을 쓰고 있었던 그녀였다.
“난 얼굴도 예쁜데 매일 이렇게 가리고 다녀야 하는지. 하아... 말론이 보기에도 내가 안타깝지 않아?”
“아가씨께 얼굴을 가리고 다니시라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대답을 하면서 복면사이로 나와 있는 눈으로 방안을 훑어봤다. 그러다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는 곳으로 다가가 그림을 만졌다.
“금고를 여셨다면 뒤처리도 깔끔하게 하셔야지요.”
“아... 그거. 그냥 뭐가 들어있는지 궁금해서. 돈을 꽤 많이 썼더라고.”
“그가 뭘 하고 있는지는 모두 보고 드렸습니다.”
“에이 듣는 거랑 보는 거랑 같아? 다르지. 나중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관리는 잘하는지 어떻게 꾸며놓고 사는지...”
“반지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어머 아니라니까. 말했잖아.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온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아 침대가 별로 푹신하지 않네. 난 푹신한 게 좋은데. 봐 취향이 다르잖아. 이런걸 알아보러 온 거라고.”
마치 아이가 나쁜 짓을 하다 아빠에게 들켜서 딴청을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던 말론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 정말이라니까. 이거 봐. 이거.”
그러면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장식장을 열었다.
그 안에 있던 것을 꺼내들고 말론을 향해 흔들어보였다.
“이게 뭔지 알아? 여자향수야.”
“향수에 남녀구별은 딱히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음... 그건 말론이 몰라서 그래. 이건 분명히 여자향수야. 어린 게 벌써 여자를 알아서. 여자관계도 확실히 조사한 거 맞아?”
“그에 대한 모든 자료는 모아서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 향수에 관한 것도 보고를 드린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 그랬나?”
“혹시 반지를 찾으시는 거라면... 여기에선 찾으실 수 없을 겁니다.”
“반지 때문에 온 게 아니라니까 자꾸 그러네.”
라고 말하며 말론에게 다가갔다.
“그래도 잘 간수하고 있는지 조금 궁금하기는 한 걸? 어디에 보관하는지 알아?”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말하는 그녀를 보던 말론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늘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잊어버리면 어쩌려고?”
“목걸이에 끼워 걸고 다니고 있으니 크게 걱정하시진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목걸이가 얼마나 잘 끊어지는데!”
“그런 걱정까지는 안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적어도 집에 두고 다니다 도둑맞는 것 보다는 안전할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 하긴 요즘 수도에 도둑도 많은데 조심해야지.”
자신과는 무관하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말론은 작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목에 걸려있단 말이지? 흐음...”
“반지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으십니까?”
“응. 오라고 하면 말을 안들을 것 같아서 말이지.”
“시험이 끝나면 합격자들을 축하하는 파티가 아카데미에서 열립니다.”
“아 맞다. 그렇지. 그런데 우리 꼬마는 시험에 합격하는 거야?”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마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변이라...”
“예를 들면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던지....”
“아 그러고 보니 귀족기사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했었지?”
“예.”
“그건 말론에게 맡긴 것 같은데?”
“슈발리에에 정보를 조금 흘려보냈습니다. 대응을 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지요.”
“언제쯤 움직일 것 같아?”
“오늘이 가장 좋을 겁니다. 산행은 어려운 코스고 부상자도 꽤 나오지요. 가뜩이나 말이 많은 코스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온다면 슈발리에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겁니다.”
“그렇겠지. 뭐 큰 사고가 난다고 해도 알아서 살아오겠지?”
“그건...”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아직 딱히 마음이 가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향수를 뿌렸다.
“음... 이런 취향이구나. 아주 나쁘진 않네. 해 뜨면 향수나 사러가야겠어. 말론 나 먼저 갈게.”
그렇게 말하곤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녀가 도망치듯 사라진 창밖을 보던 말론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고 움직였다.
그녀가 누웠던 침대를 정리하다 떨어진 머리카락 한 가닥을 집어 들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정리가 끝난 후에 품에서 뭔가를 꺼내 방안에 뿌렸다. 그러자 방안을 맴돌던 향수냄새가 서서히 옅어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동안 방안을 살펴본 후에야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창문이 닫히자 길리안의 방은 어둠과 고요 속에 물들었다. 처음부터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시험이 끝날 때쯤 도착점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마차에 내려 배웅하는 집사에게 웃어 보인 길리안이 돌아서 걸었다.
“어이. 길리안!”
누군가가 큰 소리로 불러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그렉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옹기종기 모여서 얘기를 나누던 지원 생들의 시선이 길리안에게 쏠렸다.
여러 가지 의미가 담겨있는 복잡한 눈빛들.
길리안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그렉에게 다가가 웃었다.
“일찍 왔구나.”
“그럼. 내가 좀 부지런하거든. 야, 근데 너 괜찮은 거냐?”
“응.”
“정말 괜찮아?”
“어.”
“이런... 사람 같지 않은 녀석.”
그렉의 말에 피식 웃었다.
어제의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점심시간에 불려갔다 온 후에 기분이 무척 상해서, 오후시험에 대한 의욕도 별로 없었다.
그렉과 케빈이 아니었다면 그냥 설설하고 넘어갔을 지도 몰랐다. 둘의 말은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고도 난 이만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라는 응원이었다.
그리고 아카데미 같은 교육기관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실력 있고 잘하는 게 최고라고 했다.
성적이 곧 실력.
그 말에 정말 이를 악물고 시험에 임했다.
최선을 다하는 수준이 아니고 정말 죽을힘을 다했다는 것이다.
실력을 어느 정도 감추라는 스승의 말도 떠올랐지만 어차피 검을 들고 임하는 싸움도 아니었고, 힘을 보일 때는 보여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으니까.
둘의 말처럼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난 그런 것 쓰지 않고도 이만큼 할 수 있다고, 눈이 있다면 똑똑히 봐두라고 말이다.
총교관이 직접 참관한 오후 시험에서는 역대기록까지 다 갈아치워 버렸다.
지금 그렉에게 괜찮다고는 했지만 솔직히 어제 좀 무리한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도 피로가 남아있을 정도였으니까.
“케빈은?”
“그녀석도 곧 오겠지. 나만큼 부지런하진 않거든. 용케 첫날 시험을 통과하긴 했는데 아마 밤새 끙끙 앓았을 거다. 안 봐도 훤하지.”
어제 합격 통지를 받자마자 기다시피 마차에 올라 떠나갔던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아 난 산이 싫은데. 길리안 넌 산 좀 타지? 영지에 산 많다며?”
“어. 조금.”
타그로스 산맥이 험하다고들 하는데, 라이라프 산맥을 한번 봐야 “아 이게 산맥이구나.” 하지 길리안이 보기에는 그냥 그랬다.
“자 모두 모여라. 곧 시험이 시작된다. 늦게 오는 녀석들은 시험을 볼 자격도 없다. 빨리 빨리 움직여.”
교관의 우렁찬 외침에 길리안은 그렉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나죽는다. 아아... 아 내 다리.”
길리안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죽는 소리를 내는 케빈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오. 저걸 버리고 가던가 해야지, 하필 저게 우리 조에 걸려가지고.”
하는 말은 그렉의 투덜거림이었다.
길리안은 모여 있는 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케빈과 그렉은 알지만 나머지는 처음 보는 이도 있었으니까.
이번 산악시험의 경우 룰이 조금 바뀌었다.
원래 이 산행은 개인의 끈기와 용기를 시험하는 코스로, 해가지기 전까지만 목적지로 가면 완료가 되는 것이었다.
점수는 있지만 가산 점 같은 것도 없었고, 중도에 포기하면 탈락이기에 완주를 해서 합격하느냐 아니면 불합격하느냐만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바뀐 룰은 아카데미 측에서 어제 성적을 토대로 편성해준 조별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제성은 없었다.
10명의 조원이 함께 완주하면 가산점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산 점은 없었다.
쉽게 말해 힘을 합쳐 가산 점을 받을 건지, 개인플레이로 그냥 합격점만 받을 건지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 모두 주목!”
교관의 우렁찬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이쪽에 있는 여기사 지망생들과 같이할 조를 찾는다. 조별 배당인원은 한명. 한명이 추가된 만큼 조별 통과 가산점 외에 추가 가산점이 붙는다. 선착순 다섯 조만 받는다.”
교관의 말에 지원 생들이 웅성거렸다.
“저건 또 뭐냐?”
그렉의 말에 다 죽어 가던 케빈이 퀭한 눈을 뜨고 말했다.
“문제가 생겨서겠지. 여자들만으로 조를 짜기엔 그렇고, 다른데 넣었더니 불만이 폭주하고. 그러니 저러는 거겠지.”
“그냥 다섯 명이서 보내면 되겠는데? 에이 신경 끄고 우리나 어떻게 할지 빨리 정하자. 야. 케빈 어떻게 할 거냐?”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냐?”
“너 귀족이잖아. 우리 조에 귀족은 너밖에 없거든?”
“아 그렇지.”
많이 힘들긴 한지 신분까지 잠시 까먹었던 케빈이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난 모두 함께 갔으면 한다. 힘든 코스다. 혼자서도 잘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분명 힘을 합치면 좀 나을 거라 본다. 그리고 함께 완주하면 가산점이 크다. 격차를 벌리고 합격의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지.”
그의 말에 다른 조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귀족이라고 해서 너희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빨리 의견을 정리하고 리더를 정해 출발하는 게 좋다고 본다. 끝까지 함께 가보겠다는 사람만 손을 들어라.”
그렇게 말하고 케빈이 제일먼저 손을 들었다.
그런 케빈을 보던 그렉이 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들자, 그걸 시작으로 서로눈치를 보면서 한명씩 손을 들었다.
그렇게 길리안을 뺀 모두가 손을 들었다.
“길리안 넌 싫은 거냐? 이런 건 한명이라도 다른 생각이 있으면 힘들다. 함께할 건지 따로 갈 건지 신중히 결정해라. 물론 내가 보기에, 우리가 너에게 방해가 되는 것 같기는 하다만...”
그 말에 길리안이 웃으면서 손을 들었다.
“아 미안.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난 어차피 너희와 함께 갈 생각이었어. 수도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들인데, 같이 합격해서 같이 다니고 싶거든.”
길리안의 말에 그렉과 케빈이 씨익 웃었다.
“그럼 모두 함께 가는 걸로 결정된 거다. 나중에 딴소리하는 녀석은 내가 가만 안 둔다.”
그렇게 으름장을 놓은 케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리더는 길리안을 추천한다.”
“네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신분도 우리 중 가장 높고.”
길리안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저었다.
“신분으로 해먹는 건 싫다. 내가 산을 좀 알긴 하지만 아무래도 네 능력이 더 뛰어나니까.”
“음...”
“나도 길리안 네가 했으면 좋겠다. 케빈 녀석이 산을 안 다고 하는데, 그거 개뿔 아무것도 모르면서 저러는 거다. 절대 저놈이 하면 안 돼.”
그렉의 말에 케빈이 발끈했다.
“내가 왜 산을 모르냐?
“너 산에 올라가본 적도 없잖아.”
“그걸 꼭 가봐야 아냐?”
그러면서 옆에 끼고 있던 책을 들어보였다.
“이안에 다 있다. 사람은 책을 통해 지식을 쌓고,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지. 그걸 간접경험이라고 한다. 이 무식한 것아.”
“그래 좋겠다. 산을 글로 배워서. 암튼 난 길리안.”
“나도 길리안 네가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넌 강하고 충분히 책임감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솔직히 너와 경쟁하는 코스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한다.”
덩치가 큰 녀석의 말이었다.
그렇게 다들 길리안을 지목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단 끝까지 함께 가는 거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내가 한 가지 더 의견을 내도될까?”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있는 여기사 지망생중에 한명 데려가면 어떨까?”
“음...”
“가산 점에 가산 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다. 여자라지만 어제 그 힘든 코스에서 살아남았으니 여기 있는 남자들보다 못하지 않을 거란 말이다. 10명이나 11명이나 큰 차이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건 모두의 의견을 들어봐야지. 아까와 같다. 케빈의 말에 찬성하는 사람 손.”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재미있다. 손!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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