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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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큰 방인데 창문은 하나도 보이질 않았고 무척 어두웠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탁자와 그 위에서 타고 있는 촛불하나.
거기엔 흉측한 가면을 쓴 사람이 앉아있었다.
앉아있던 이가 손을 뻗어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길리안은 걸어가 메고 있던 짐을 옆에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어서 오시오.”
쇠를 긁는 것 같은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다.
“무척 만나기 힘든 분이시군요. 익숙한 얼굴이라 반갑기는 하네요.”
상대가 쓰고 있는 고불린 가면을 보고 한 말이었다.
“로렌의 약속을 확인하러 오셨다고 들었소만?”
바로 본론을 물어보는 상대를 보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싸여있는 천을 풀고 작은 반지를 꺼내들었다.
“이 반지를 아십니까?”
“로렌의 눈물.”
묻자마자 바로 나오는 상대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반지의 주인이시군요. 그럼 손을 좀 주시겠습니까?”
길리안의 말에 상대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은 길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대를 쳐다보았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은 확인이 불가.
체구가 좀 작기는 하지만 굵으면서도 상당히 듣기 거북한 목소리를 듣고 남자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손을 잡아보니 작고 보드라운 것이 꼭 여자의 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은 여자인 것 같은데... 목소리는 남자 같고... 음...’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뭐 어차피 상관없지.’
잠시 생각을 하던 길리안이 입을 열었다.
“로렌과의 약속을 이행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이번 물음에는 바로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길리안은 상대의 눈을 직시하면서 한동안 대답을 기다렸다.
“아직.”
한참 만에 나온 짧은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면인의 손을 놓고 다시 반지를 손에 쥐었다.
“후우...”
길리안은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영지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있는 로렌아저씨의 부탁을 행하는 중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고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분이기도 하셨다. 영지에서 평판도 좋은 그냥 보통 술집아저씨처럼 보이는 분이었다.
길리안이 떠나기 1년 전쯤 들려준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보아온 로렌아저씨는 과거가 어떻든 간에 좋은 분이었다.
아버지도 로렌아저씨의 과거를 알고 있는 듯해서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아저씨에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상이야기도 많이 들었고, 수도까지 오는 여행길에 그에게 들은 얘기들은 확실히 많은 도움이 됐다.
사람이 없는 산맥을 돌아다니는 것과 사람들이 북적이는 세상을 돌아다니는 것은 달랐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밝은 곳과 그 이면의 어둠이 존재하고, 지금 마주대하고 있는 상대는 그 어두운 면의 일부라고 하면 맞을 것이다.
로렌아저씨와의 약속을 이행하러 나온 자.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약속을 이행한다고 말하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준비가 안됐다고 하면 반지를 보관하고 있으라고 했다.
“언제쯤이면 약속을 이행하실 수 있는 겁니까?”
“그리 쉽게 결정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음...”
길리안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고향인 라이라프 영지에서 수도인 아라네스는 엄청나게 멀고 대부분은 교향을 떠나 먼 곳까지 가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누가 어딜 간다거나, 상단이 영지에 들르면 이런저런 부탁을 많이 한다.
길리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는 길에 여러 사람에게 부탁을 받았고, 대부분은 편지 같은 것을 전하는 것이었다.
솔직히 로렌아저씨의 부탁은 좀 까다롭고 이상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일이고 꼭 전해야하는 물건이라고 해서 받아들고 온 것이다.
그리고 아저씨가 저쪽에서 분명 약속을 지킬 거라고 말해서 그냥 반지만 전해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가 지금 당장 그것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가급적이면 빨리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만.”
“혹시 그 약속에 대해 알고 있소?”
가면인의 물음에 길리안을 고개를 저었다.
“당신과 로렌아저씨 사이에 무슨 약속이 오갔는지는 모릅니다. 전 단지 아저씨를 대신에 이걸 전하러 온 것이지만,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그 약속의 내용을 알고 있다면 아마 지금처럼 말하지는 못했을 거요. 아니 부탁자체를 거절했겠지.”
그 말에 길리안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로렌아저씨가 위험해진다거나...”
“아아 그런 것은 아니요.”
“그럼...”
“궁금하다면 로렌에게 직접 물으시오.”
“음.. 그러지요.”
길리안은 반지를 다시 품에 넣었다.
“잘 보관하시오. 우리에겐 소중한 것이니.”
그 말에 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면인의 말 때문에 찜찜하기는 했지만 부탁을 받은 이상 대충할 수는 없는 노릇.
반지는 잘 보관했다가 고향에 가게 되면 직접 로엔에게 전해주거나, 그전에 이자가 약속을 지킨다고 말하면 넘겨주면 되는 것이다.
“당신은 로렌과 어떤 관계요?”
가면인의 물음에 길리안은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열었다.
“그런 물음을 들으면 아저씨는 친구라고 대답하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솔직히 제가 친구라고 하기엔 나이도 너무 많으시고, 오히려 저보다는 아버지의 친구분이시기도하고...”
“대답은 간단히. 당신과 로렌과의 관계는?”
다시 묻는 상대를 보던 길리안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로렌의 친구. 됐습니까?”
“친구라... 하긴 그러니 반지를 맡겼겠지. 어쨌든 로렌의 친구라면 나와도 친구가 될 수 있소.”
그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전 얼굴모르는 사람이랑은 친구 안합니다.”
“내 얼굴이 궁금한가보군.”
“조금은요. 익숙한 얼굴이기는 한데... 친하게 말을 주고받던 사이는 아니라서 말이죠.”
상대가 쓰고 있는 고블린 가면.
확실히 고블린은 꽤 많이 보아온 몬스터였으니까.
작고 무리를 지어 사는 녀석들인데, 작고 볼품없게 생겼다고 무시했다간 큰코다친다.
혼자서는 절대 덤비거나 하지도 않고, 위험할 땐 미리 파놓은 땅굴로 숨어버려서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말 한대로 많이 봐서 익숙하긴 했지만 말보다는 서로 칼침을 주고받던 사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 얼굴을 보면 당신은 이곳에서 나갈 수 없소.”
그 말에 길리안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안내해준 거인이 문을 막고 서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어둠에 가려 다 보이지 않는 방안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천장과 바닥까지 두리번거리고 난 후에 씨익 웃었다.
한동안 서로를 응시했다.
“그 웃음의 의미는?”
“별 의미는 없습니다. 제가 원래 잘 웃는 편이라 서요. 아 그리고 이거.”
길리안이 짐 속에서 작은 자루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무엇이오?”
“받은 정보에 대한 대가는 이곳에서 지급하기로 계약했으니까요.”
“넣어두시오. 그 건은 이미 지급이 끝났으니.”
“지급이 끝나다니요? 전 하나도 지급한 기억이 없습니다만?”
가면인은 대답대신 손짓을 했다.
그러자 어둠속에서 한명이 걸어 나왔다. 가면을 쓰진 않았지만 복면을 하고 있어서 얼굴은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무거워 보이는 자루를 길리안의 옆에 내려놓고 가면을 쓴 이의 뒤에 가서 섰다.
“의뢰한 뒷정리를 하고 남은 것이요. 계약대로 5:5로 나눴고 그동안 제공한 정보의 비용등도 제했소. 이것이 내역서이니 잘 확인해 보시오.”
말과 함께 내미는 서류를 받아든 길리안을 그것을 살폈다.
“금화로만 하면 양이 많아서 보석과 금괴도 섞었소. 하지만 금화로 환산했을 때의 가치는 틀림없으니 걱정 마시오.”
그 말에 옆에 놓여있는 큰 자루를 보며 쓰게 웃었다.
“무척 많아 보이는군요. 이런 건 예상 못했는데...”
“마법자루에 담았소. 무게를 줄여주기는 하지만 그래봐야 반 정도니... 무거울 것 이오. 가져가기 힘들다면 말하시오. 모두 보석으로 바꿔줄 수도 있으니까.”
그 말에 길리안은 다시 한 번 자루를 살펴보고 살짝 들어보았다. 어지간히 힘을 줘선 꿈쩍도 하지 않는 자루를 내려다 보다 웃으며 말했다.
“뭐 큰 지장은 없어 보이네요.”
“그렇다면... 아무튼 길드에서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고객과의 신뢰. 계약은 철저하게 지키지. 그리고 좋은 정보가 몇 가지 있소. 원한다면 우선적으로 줄 수도...”
“아닙니다. 당분간... 아니 꽤 오래 현상범을 잡으러 다니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가면을 쓴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군.”
“그런데... 혹시 이돈 보관이 가능합니까?”
가면을 쓴 이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보관은 하지 않소. 전달이나 투자라면 모를까.”
“후우... 그렇군요.”
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 길리안을 보면서 가면을 쓴 이가 말했다.
“재미있군. 보통은 이정도 돈을 보면 좋아하는 것이 정상 아니오?”
“글쎄요. 뭐 좋기도 한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고 금액이 상상 이상이라 부담도 되고... 딱히 쓸데도 없고... 팔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 팔아도 되겠군요.”
“팔 것이 있다? 무슨 물건인지 볼 수 있겠소? 불법적인 거라면...”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러면서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안에 있는 것을 하나 집어 상대에게 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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