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3장(3)
카미르는 케빈이 팔을 당겨 다시 몸을 숨기고 왕의 행차를 보고 있었다.
왕의 행렬은 길었다.
선두에서 크락시스가 길을 열고 오른쪽에 드겔을 왼쪽에 루퍼드를 거느린 왕의 모습.
근위병과 근위기사들 말고도 많은 기사들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거기에 뒤를 따르는 일반인들은 수천이 넘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그러시오 드겔 경?”
“별것 아닙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때 한쪽을 쳐다보며 웃는 드겔을 따라 살펴봤지만 특별히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에게 물으니 아니란 대답에 에런 왕이 루퍼드를 봤다.
그 또한 드겔과 같은 곳을 보며 웃고 있었다.
“경들이 보고 있는 곳에 뭐라도 있는 것인가?”
왕의 물음에 루퍼드가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전하께서 꼭 만나보셔야 할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왕이 손을 들었다.
행렬이 멈춰서고 왕이 입을 열었다.
“모습을 보이라.”
그 말에 풀숲에서 한사람이 일어나 예를 취했다.
“아이작 경? 그곳에서 뭘 하고 있었소?”
왕의 물음에 아이작이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임무를 수행 중이었습니다.”
“임무라.”
그의 임무는 프란트 왕자를 보호하는 것.
잠시 후 그의 옆에서 하나둘 일어나는 이들이 보였다.
“경도 이곳에 있었는가?”
“예.”
“잘 됐군. 그렇지 않아도 부를 참이었으니. 경도 나를 따르라.”
“예.”
길리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왕이 프란트를 보고 헛웃음을 흘렸다.
“왕자도 이곳에 있었는가?”
왕의 물음에 당황했던 프란트가 낮은 한숨을 쉬며 작게 대답했다.
“허허 아이들도 아니고 이곳에 숨어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아무래도 모습을 보이기가 좀 그래서 잠시···.”
“하긴. 그래 옆에 있는 다른 이들은 누구더냐?”
“모두가 제 소중한 친구이옵니다.”
처음과 달리 힘주어 말하는 프란트를 보고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 뭐 그것도 괜찮겠지.”
그리고 다시 길리안을 보면서 말했다.
“좋은 친구가 곁에 있으니 왕자가 어긋날 일은 없겠구나. 숨어있을 필요 없으니 왕자도 나를 따르라.”
“예.”
길리안은 왕의 말에 카미르가 프란트 왕자라는 것을 알고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드겔과 시종장이 있던 자리에 함께 있었고, 현장조사 때도 함께 했다. 그때만 해도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왕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발끈 했을 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이유가 있을 만했다.
누가 아버지를 함부로 말하면 자신도 그럴 테니까.
자신뿐 아니라 안톤과 그렉도 놀란 눈을 하고 그를 보고 있었다.
‘왕자와 친구라.’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왕을 섬기는 기사이니 왕가의 일원은 보호의 대상이고 상황에 따라 명을 받아야 할 상대.
처음부터 카미르가 프란트 왕자인걸 알았다면 친구처럼 지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냥 안톤이나 케빈처럼 평 귀족인줄만 알았으니까.
‘하긴.’
생각해보면 아무리 평 귀족이라지만 평민이었던 자신이 그들과 친구가 된 것부터가 예전엔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고향에서 귀족의 권위와 위엄을 크게 내세우지 않는 영주와 그 가족들의 영향도 있었지만, 일단 시작은 케빈이 살갑게 다가오면서 부터였다.
그때는 평민이었고 지금은 기사라지만, 왕자와의 신분차이는 여전히 크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때 옆에 있던 아이작이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중한 친구라 하지 않았는가? 왕자님도 그러시는군. 친구는 그냥 친구인걸세.”
굳이 대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무슨 말인지는 이해를 했다.
‘친구는 그냥 친구인건가?’
길리안은 다른 기사들과 인사를 주고받는 동안 프란트의 시선을 느꼈지만 지금은 그에게 뭐라 말 할 수가 없었다.
왕이 신호를 보내자 다시 앞선 기사들이 출발했다.
그때 왼쪽에 있던 루퍼드가 뒤로 처져 검을 뽑아 검 면을 가슴에 대고 길리안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와 동시에 검을 뽑는 소리가 줄지어 들렸다.
왕이 고개를 돌려보니 루퍼드를 필두로 한 기사들이 전부 검을 뽑아 같은 모습으로 길리안에게 예를 표하고 있었다.
“허허.”
“기사들이 기분을 좀 내게 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옆에서 들리는 드겔의 말에 왕이 작게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하던가.”
“왠지 부러워하시는 눈빛이신지라···.”
“허허 내 그리 속 좁은 왕은 아니오. 어차피 기사의 공은 군주의 것이니 존경받는 기사를 품으면 그 존경 또한 나를 향할 것 아니오. 사람을 어떻게 보고. 에잉.”
낮게 투덜거리는 에런 왕을 보고 드겔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왕이 도착하자 귀족들이 분분히 예를 취했다.
허나 왕은 그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런 왕은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품에 안겨드는 노엘리아를 다독이며 왕비를 보았다.
“괜찮으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내가 못나서 험한 꼴을 보게 하였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말씀 마세요.”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그때 막사로 들어온 아레샤가 왕비에게 뛰어가 품에 안겼다.
자신의 품에 안긴 노엘리아와 왕비의 품에 안긴 아레샤를 번갈아보던 에런 왕이 미소를 지었다.
“허허 이것 참. 우리 공주들은 다 커서도 이리 어리광을 부리니 어찌 시집을 보낼꼬.”
그러면서 노엘리아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꼬옥, 꼭 오시리라 믿었습니다.”
울먹이며 말하는 노엘리아를 다시 한 번 다독인 에런 왕이 말했다.
“이 왕국에 속한 그 누구도 왕가를 무시할 수 없다. 내 아내와 내 딸들에게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다.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노엘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에런 왕이 왕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십시다.”
왕비가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는 빼지 마시오. 내 가슴이 철렁 했으니.”
그리고 손에 든 반지를 그녀의 손가락에 다시 끼워주었다.
“다시는 빼지 않겠습니다.”
그런 왕비를 보며 왕이 미소를 지었다.
“길리안, 안톤, 그렉. 미안하다. 일부러 숨기려던 건 아니··· 음, 신분을 숨긴 건 맞지만 이유가 있었고 곧 말하려고 했다.”
“넌 알고 있었나?”
안톤이 케빈을 보면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어제 알긴 했다만. 어제 얘네 집에 같이 갔거든.”
그러면서 카미르의 등을 툭툭 쳤다.
“보는 눈이 많다.”
안톤의 말에 케빈이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방금 왕께서도 그러지 않았냐. ‘그것도 괜찮겠지’ 라고. 그 정도면 공인된 친구사이지 암.”
그 말에 안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와~. 그럼 나 왕자랑 친구야?”
그렉이 말하자 프란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백마 타냐?”
뜬금없는 물음에 잠시 생각하더니 아니 라고 대답했다.
“왕자는 백마라던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통수로 날아오는 케빈의 주먹을 막은 그렉이 다시 말했다.
“아~ 정말 왕자구나. 친구하나는 기사단 하나 해체시키는 기사고, 하나는 왕자고. 음 내가 아카데미 잘 들어 왔구나.”
“그러니까 너도 정신 차리고 열심히 좀 해라. 여기서 네가 제일 빠지거든.”
케빈의 말에 그렉이 피식 웃었다.
“야 나도 길리안이랑 똑같은 게 두 개나 있거든?”
“허, 정말?”
“그래. 길리안이 그러는데 그림을 보는 눈이랑 음악을 듣는 귀는 자기랑 같다더라.”
그 말에 케빈이 한숨을 쉬었다.
길리안이 제일 모자란 부분 두 가지가 바로 저것.
“그래 좋겠다. 아무튼 길리안 프란트도 나름 사정이 있으니까 일단 얘기부터 들어줘라. 어제 널 위해서 최선을 다한 친구니까.”
그 말에 아무 말도 없던 길리안이 입을 열었다.
“프란트 왕자님.”
“어? 하아~.”
“공과사만 구별하면 되겠습니까?”
“어. 그렇지.”
“그럼 나중에 편하게 얘기하자. 보는 눈이 많으니까.”
말을 마치고 씨익 웃는 길리안을 보고 프란트도 같이 웃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너희는 왜 왕비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냐?”
재판관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왕의 왼쪽에 앉은 왕비와 그 옆에 있는 공주들이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왜 대답이 없는가?”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뭐라 변병을 하기도 전에 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두 내말이 우습게 들리는가? 내 이곳에 와서 날 폐하라 칭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였다. 이제 그 말을 입에 담는 자는 혀를 뽑을 것이다.”
사람들을 둘러본 왕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변명을 해보라.”
“그, 그것이 재판에는 절차가 있습니다. 왕비님께서 주관하시는 재판이니 더욱 절차에 따라야 법이 바로 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원리원칙에 충실한 재판관이로군. 그럼 평민과 귀족이 재판을 하면 평민은 귀족을 대리인으로 세우는 관례가 있다는데 들어본 적이 있느냐?”
“그건···.”
“대답하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흐음, 들어본 적이 있다? 해본 적은 없다는 말인가?”
“그것이···.”
“여기 있는 재판관들의 재판기록을 가져오라.”
“이, 있습니다.”
“있다? 그럼 내 묻겠다. 귀족을 대리인으로 세워도 평민은 재판에서 이기질 못한다는데 그럼 대리인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이냐?”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없는 재판관을 보며 왕이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또 재판에 따로 비용이 든다던데 그 이유는 무엇이냐?”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자 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편히 앉아 돈을 버니 그 재미가 솔솔 하더냐? 너희가 재판관이냐? 아니면 장사치냐? 언제부터 법이 돈으로 사고파는 물건이 되었느냔 말이다!”
처음엔 차분하게 말하던 왕의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나를 대신해 법을 바로 세우라고 너희를 그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이다. 그런 자들이 없는 관례를 만들고 따로 돈을 받으면 내 어찌해야겠느냐?”
“주, 죽여주십시오.”
그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법을 잘 아는구나. 보채지 말라. 곧 그리해줄 것이니.”
재판관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럼 설마 살길 바라였느냐? 법을 집행해야 할 자들이 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어기고, 아니 앞장서서 법을 어긴 것인가? 그러고도 살길 바라였느냐? 너희 중에 떳떳한 자가 있으면 앞으로 나서라. 내 그에게 법무대신의 자리를 줄 것이니.”
아무 말도 못하는 재판관들을 보던 왕이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한사람을 쳐다봤다.
“법무대신.”
“예. 폐··· 전하.”
“그대가 대신의 자리에 오른 지가 몇 년이오?”
“올해로 10년이 됐습니다.”
“그렇군. 내가 그동안 그대를 너무 믿은 듯하오.”
“죄송합니다.”
“그대의 일이 무엇이오?”
“법관들을 관리하고 법이 잘 집행되는지 법에 허술함은 없는 지 필요 없는 악법은 없는지 살피고···.”
“잘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것이오? 그대가 그 자리에 앉아 저런 자들의 잘못을 묵인하고 아직도 재판관으로 있게 둔 것을 내 어찌해야 하겠소?”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 책임은 어떻게 지려하오? 설마 물러나면 끝날 것이라 생각했소?”
“음···.”
“이곳이 어디인줄 아시오?”
“왕국의 수도입니다.”
“그렇소. 왕국의 심장이자 내 직영지의 중심이고 나의 거처요. 이곳의 인구가 자그마치 30만이 넘소. 그중에 평민이 얼마나 되는지 아시오?”
“잘은 모르지만···.”
“25만이 넘소.”
“예.”
“그들이 내게 야유를 하고 등을 돌렸소. 나에게 세금을 내고 무기를 들면 내 병사가 되고, 또 기사가 되기도 하는 사람들이 말이오. 그들이 가난해지면 내가 가난해지고 마음이 떠나면 사람이 떠나고 사람이 줄면 내 힘이 약해지오. 난 그리 생각하는데 그대는 어떻소?”
“맞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떠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법 때문이오. 아니 법을 집행하는 자들 때문이지. 재판에서 져서 재산을 잃고 신분을 잃고 노예가 되고 목숨을 잃은 자도 있소. 그렇게 가난해지고 사람이 줄고 사람이 떠나오.”
“죄송합니다.”
“내가 왕위에 올라 처음 가장 신경 쓴 것이 법의 정비요. 그런 법을 마음대로 휘두른 자들이 저들이고 그들의 제일 위에 있는 이가 바로 그대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내 다시 묻겠소. 내 힘을 약하게 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오?”
“저,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없다? 그대도 말도 안 되는 관례나 다른 것들을 알고 있다 하지 않았소?”
“그, 그건···.”
“알면서도 방치하고 바로잡지 않았소. 그대에게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라도 하겠소. 아니 내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라도 했다면 내가 묵인한 것이니, 내 그대에게 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오. 헌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않소? 그걸 알면서도 방치했다는 것이 내 힘을 약하게 하려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이오!”
왕의 호통에 법무대신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
에런 왕은 한동안 그를 보기만 할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천의 사람이 모여 있음에도 숨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다.
“자아~. 이제 한번 말해보시오.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잘못을 따지면야 왕의 잘못이 제일 크지만...
왕이니까요. ^^;;;
그나저나 이번 주는 좀 바쁘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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