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0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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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말! 내가 왜 여기서 이런 걸 해야 하는 거냐고!”
“그야 내가 네 야옹이들 먹이를 반년 동안 대주기로 했으니까.”
“아~ 그랬지.”
“그러니까 잡담할 생각 말고 확실히 해라.”
“나도 말하면서 이것저것 할 수 있다고. 뭐 어려운 거라고.”
“그렇구나. 역시 내 동생이다. 다른 건 몰라도 일은 잘하지.”
“나 다른 것도 잘하거든?”
“그래, 그렇다고 치자.”
그렇게 말하는 케빈에게 클라라가 종이를 구기더니 던졌다.
자신의 머리에 맞고 떨어진 종이를 보고 케빈이 인상을 쓰며 클라라를 봤다.
“뭐 하는 짓이냐?”
“계약서. 사인하라고.”
그 말에 종이를 펴서 쓱쓱 읽은 케빈이 아래쪽에 서명하고 대충 구겨 클라라에게 던졌다.
“내가 설마 약속을 안 지킬까 봐 그러냐?”
“거래는 거래니까. 확실한 게 좋잖아?”
“그건 그렇지.”
계약서에서 케빈의 서명을 확인한 클라라가 미소를 지으며 그걸 돌돌 말아 가슴골 사이에 넣었다.
그걸 본 케빈이 피식 웃었다.
“가슴도 없는 게 별걸 다 하는구나.”
“남들만큼 있거든?”
“뭐? 네 주변엔 남자만 있냐?”
“싸우자는 거야?”
“그렇다고 치자. 어쨌든 그렉 동생 실비아랑만 같이 다니지 말고 여자랑 다녀라.”
“걔 여자거든. 애가 얼마나 용감한데?”
그 말에 고개를 저은 케빈이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고, 입술을 삐죽인 클라라도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러고도 한동안 둘의 대화는 계속됐다.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열심히 뭔가 적기까지 하는 둘.
그때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정말. 아까 들어온 서류가 마지막이라고 하지 않았나?”
클라라의 투덜거림에 케빈이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원래 일이란 게 그런 거다. 끝났나 싶었을 때 또 생기곤 하지.”
“오빠란 사람이 저녁때 몇 시간씩 자리만 비우지 않았어도 벌써 끝났겠지.”
“그러려고 널 부른 거다만. 그리고 그 시간 메우려고 삼 일째 한숨도 못 자고 있다만.”
“나도 누구 때문에 끌려와서 이틀을 한숨도 못 자고 있거든?”
“그래도 너는 받는 거라도 있지. 나는 아무것도 없다만.”
그 말에 클라라가 고개를 숙인 채 피식 웃었다.
“나도 그게 무척 이상하거든. 돈벌레 케빈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열심히 왕가의 일을 하는 걸까?”
“오빠라는 호칭이 빠졌단다. 동생아. 아무튼, 친구들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하지.”
“오~ 사랑? 알뜰한 여자를 드디어 찾았나 보네?”
“그건 모르겠다만 알뜰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제야 아버지가 이해가 되더라. 돈 좀 쓰면 어떠냐? 내가 좀 더 벌면 되지. 그런 건 사랑으로 얼마든지 포용할 수 있는 거다.”
“와~ 누군지 정말 궁금하네. 집에는 언제 데려올 건데?”
“나중에. 보여줄 만해지면 그때.”
“애? 남한테 보이기 부끄러울 만큼 우리 집이 이상한가?”
“몰랐냐? 미친 듯이 돈 버느라 얼굴도 보기 힘든 아버지에, 미친 듯이 돈 쓰느라 얼굴도 보기 힘든 어머니에 사자를 고양이라고 우기는 여동생에···.”
“자기만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비정상적인 오빠란 사람도 있지.”
“난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만.”
“어련하시겠어. 그런데 정말 여기 있으면 고양이 기사가 오는 거야?”
“고양이 기사? 설마 금발의 사자 루퍼드 경을 말한 거냐?”
“어.”
“너 자꾸 사자보고 고양이라고 하는데···. 됐다 말을 말아야지. 누가 데려갈지 몰라도 벌써 불쌍해지는구나.”
“자기 걱정이나 하셔. 그런데 오는 거냐고.”
“오겠지. 루퍼드 경 집무실이니까. 그런데 넌 본적 없냐?”
“없어.”
“내동생이지만 정말 대단하구나.”
“어떻게 생겼어?”
“음···. 확실한 건 너보다는 예쁘게 생겼다.”
라는 케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풋 하는 소리와 함께 크게 웃는 소리가 들려 둘 다 고개를 들었다.
문 쪽을 본 케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무표정의 루퍼드와 그의 뒤에서 웃는 미네르바, 로렌스, 드레드가 보여 서였다.
“하하하,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왔지. 푸흣.”
대답한 로렌스가 또 웃음을 터트리자 루퍼드가 뚱한 표정으로 그를 봤다.
“그렇게 재밌나?”
“하하, 당연하지. 예쁜 고양이기사님. 크크.”
“음···.”
루퍼드가 시선을 돌려 케빈을 보자 케빈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제 동생인 클라라입니다.”
그러면서 클라라에게 눈짓을 했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넘버즈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 그녀가 루퍼드를 보고 고개를 갸웃한 후에 말했다.
“우리 만난 적이 있군요.”
“그렇습니다. 레이디 클라라.”
“음~. 이제 확실히 기억나네. 게빈은 잘 크나요?”
“지금은 앤디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렇군요. 잘 크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둘의 대화를 듣던 케빈이 의아한 표정으로 클라라에게 물었다.
“본 적 없다며?”
“있어. 고객이거든. 넘버즈 루퍼드 경인지는 몰랐고. 남자가 참 예쁘게 생겼다 했지.”
그 말에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그때도 루퍼드라는 이름을 밝혔습니다만.”
“아~ 그랬죠. 같은 분인 줄 몰랐을 뿐이에요.”
클라라의 대답에 케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해하십시오. 원래 키우는 고양이들 말고는 다른 데 관심이 없는 애라. 그리고 동생아. 자꾸 걔들한테 내 이름이랑 비슷한 이름 붙이지 말라고 한 것 같은데?”
“시끄러워요. 오빠. 그보다 루퍼드 경. 언제든 오세요. 또 같이 식사라도 하죠.”
그녀의 말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루퍼드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날 보는 거지?”
“루퍼드 경께서 제 동생이랑 집에서 식사를 했다고요?”
케빈의 물음에 루퍼드가 고개를 끄덕했다.
“언제? 어떻게? 왜? 아 죄송합니다. 너무 궁금하고 이상해서 그만.”
케빈의 말에 피식 웃은 루퍼드가 말했다.
“사자를 키워보고 싶은 차에 소개를 받고 가게 됐지.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지.”
“신선한 경험이요?”
“사자 우리에서 식사하고 차를 마셔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혹시 제 동생이 결혼하자고 하지는 않던가요?”
그 말에 루퍼드가 다시 피식 웃었다.
대답은 클라라에게서 나왔다.
“겁이 하나도 없어서 그러려고 했는데 너무 예쁘잖아. 그래서 포기.”
“얼굴을 안 가린다고 하지 않았냐?”
“나도 여잔데 나보다 예쁜 남자랑 어떻게 같이 살아?”
“그건 그렇지.”
대화를 듣던 미네르바가 루퍼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예쁘다는 말에도 별로 신경 안 쓰나 보네? 그 말 싫어하지 않던가?”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만,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니까. 그날도 무척 많이 듣기도 했고, 내 앞에서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도 없었거든. 그리고 당신도 아름답습니다. 레이디 클라라.”
“오~.”
루퍼드의 말에 넘버즈들이 장난 섞인 표정으로 그를 봤고 케빈은 안경을 벗었다.
“이거 써보시겠습니까? 기사는 눈이 좋아야 한다던데.”
그 말에 케빈의 어깨를 툭 친 루퍼드가 말했다.
“동생에게 그러면 쓰나. 그나저나 둘이 남매였다니 나도 놀랍군. 그런데 정말 그 많은 서류를 다 정리한 건가?”
그 말에 케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했다.
“제가 누굽니까? 이런 건 일도 아니지요.”
“와 혼자 다 한 것처럼 말하네? 내가 처리한 게 반이거든?”
“크흠. 물론 클라라도 열심히 했습니다. 아무튼, 할 일은 다 한 것 같으니···.”
케빈이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로렌스를 봤다.
“잘 해 주었다. 그리고 아직 할 일은 많다. 내일은 처음으로 기사 회의가 열리니 참석하도록.”
“네? 제가요? 왜요?”
“서류정리만 한 것이 아니지 않나? 우리에게 해줄 말이 더 많을 텐데?”
“뭐 그건 따로 정리해 드리면 됩니다만.”
“너의 공을 가로채고 싶은 생각은 없다. 슈발리에의 기사 학부에 다닌다는 건 기사가 목표가 아닌가?”
“저야 그저 기사의 작위가 필요할 뿐입니다. 뭐 그것도 아버지께 인정받고 사업을 좀 받으려고 그런 건데 지금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도 기사가 되고 싶겠지. 길리안의 옆에 서고 싶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제 실력은 제가 제일 잘 압니다. 솔직히 그쪽으로는 재능도 별로 없고 노력도 많이 하고 있지 않습니다.”
“꼭 말을 타고 잘 싸워야 기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장에서 세운 공만이 공이 아니다. 머리를 쓰는 기사도 필요한 법이고, 네가 한 일과 앞으로 할 일은 충분히 공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아~ 정말 사람 볼 줄 아시네. 좋습니다. 내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제가 생각한 것들을 말씀드리죠. 그래도 우선은 쉬고 싶습니다. 정말 자고 싶거든요.”
케빈의 말에 로렌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며칠 쉬지 않고 말을 달렸더니 다들 죽을 맛이거든. 너와 레이디 클라라 덕에 우리가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 레이디 클라라. 보답은 반드시 할 겁니다. 안 그런가? 루퍼드.”
그 말에 루퍼드는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곧 왕의 영지입니다.”
“알고 있네.”
“정말 가시렵니까?”
“못갈 이유가 무엇인가?”
“좋지 못한 소문이 돕니다. 공작님께서도 들으셨지 않습니까?”
기사의 말에 마누엘이 껄껄 웃었다.
“아모스 경.”
“예.”
“경은 그 소문을 정말 믿으시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지. 그런데 말이오. 누굴 죽이려는데 소문을 흘리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소? 비밀을 유지해도 될까 말까 한 일인데, 왕이 영주회의를 소집한 목적이 영주들을 모두 죽이기 위함이다? 하하하하.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장난스러운 소문에 휘둘려서야 되겠소?”
“다만 걱정이 돼 말씀드린 것입니다. 일전에 수동에 방화사건이 일었을 때 공작 가에 대해 좋지 못한 소문도 돌았습니다.”
“그 또한 알고 있소.”
마누엘도 그건 알고 있었다.
크시펠 공작가가 왕위를 노려 벌인 일이라는 소문을.
“그 건에 대해서는 이미 서신을 주고받았고 끝난 이야기요. 그리고 얼마 전 수도에서 안 좋은 일이 또 생긴 것도 아오. 누군가 왕가와 이 왕국을 흔들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지. 왕이 영주들을 소집한 것은 당연한 일. 왕국의 공작으로서 그 소집에 응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오.”
“음.”
“경이 걱정하는 이유는 아오. 하지만 모든 영주의 선두에 서는 내가 걸음을 돌린다면 이 왕국은 무너지오. 내 선조가 피를 흘리며 세운 이 나라를 내 손으로 무너트릴 수는 없지 않소?”
“옳은 말씀입니다. 하지만 모든 영주가 공작님처럼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소문의 진위도 파악하지 못하고 휘둘리는 자들에게 영주의 자격은 없소. 지금까지 왕이 잘해 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주 못한 것도 없지. 이만큼 긴 평화도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니까. 왕이 왕으로서 의무를 다하는 한 영주도 그 의무를 다해야 하오. 그것이 이 왕국의 체계이고 근간이오. 그것을 무너트리는 영주가 어찌 기사의 충성을 받고 어찌 영지를 다스리겠단 말이오.”
마누엘의 말에 아모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이오. 나는 두려운 것이 없소. 왕에게 넘버즈가 있다면 내게는 드래곤 나이트가 있소. 왕이 드겔에게 의지하듯 나도 경에게 의지하오. 어떤 상황에서도 경은 나의 검이자 방패가 되어줄 것이니. 아니 그렇소?”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모스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마누엘이 고삐를 당겨 말을 돌려세웠다.
돌아선 공작을 보고 긴 행렬이 멈춰 섰다.
“내가 누구인가?”
“마누엘 발터 폰 크시펠 공작이십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공작님의 기사입니다.”
“왕이 나를 죽이려 한다면 그대들은 어찌하겠는가?”
“왕을 죽이겠습니다.”
“모두 당당함을 잃지 말고 절도를 지켜라. 그대들이 나의 기사임을, 이 왕국 최고 가문의 기사임을 잊지 말라.”
“공작께 충성을!”
수백의 기사가 한입으로 외치는 소리에 마누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전령을 보내 왕에게 전하시오. 내가 왔다고.”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루퍼드와 클라라가 맺어질까요?
글쎄요~
어쨌든, 이름 한번 나왔던 애들은 모두 써먹는 넘버즈는 계속됩니다.
길리안은?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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