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4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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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힘들어.”
소파에 앉으며 등을 기댄 미네르바가 눈을 감았다.
“언니! 설마 그러고 잠들 생각은 아니죠? 최소한 갑옷은 벗으라고요.”
“벗는 건 문제가 아닌데 여기서 벗어도 되나?”
“딱히 올 사람은 없으니까요. 오더라도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없으니까 좀 벗어요. 비싼 소파 망가진다고요.”
“네. 네. 슈발리에의 총장대리께서 벗으라면 벗지요. 그럼 이것 좀.”
자리에서 일어난 미네르바가 갑옷을 벗는 걸 도와주던 엔젤이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땀을 얼마나 흘린 거예요?”
“그냥 입고 있어도 더운데 도망친 자가 있어서 잡느라 열심히 뛰어다녔거든. 갑옷을 일상복처럼 입는 로렌스나 드레드가 참 대단한 녀석들이지.”
“그런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미네르바는 갑옷을 벗는 왕이 궁 밖에 나와 백성들에게 한 말과 왕의 명을 받아 한 일을 얘기해줬다.
“밖으로 나오셨다고요? 갑옷도 안 입고 마차도 아닌 말을 타고요?”
“응. 모르고 있었어?”
“저도 바빴다고요. 아무래도 알아봐야겠네요. 잠시 만요.”
엔젤이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미네르바는 혼자 갑옷을 마저 벗고 가죽옷과 솜옷까지 벗고 나자 살 것 같은지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땀을 닦아낸 그녀가 장식장을 열고 술을 한 병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작은 잔에 술을 따르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캬아~. 좋다. 후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그런 미네르바를 본 엔젤이 피식 웃었다.
“언니 정말. 남자가 다됐군요.”
“그런가? 딱히 여자로 살 생각은 없긴 했는데···.”
“정말 갑옷으로 감추고 다니기엔 아까운 몸매네요.”
“그래?”
미네르바가 일어나 자신의 몸을 여기저기 살펴봤다.
“봐줄만 해?”
속옷 바람으로 서서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고 엔젤은 고개를 끄덕였다.
“봐줄만한 정도가 아니고 여자인 내가 봐도 아름답네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어디···.”
그렇게 말한 미네르바가 엔젤에게 다가가 양쪽 어깨를 잡았다.
“일단 키는 비슷하고···.”
그러더니 갑자기 엔젤의 가슴을 주물렀다.
“악! 언니! 뭐하시는 거에요?”
“가만 있어봐. 확인할게 좀 있어.”
자기 가슴도 주물러 보고 엔젤의 허리를 만졌다가 자기 허리도 만져보고.
“어, 언니 왜 이래요? 남의 엉덩이는 왜 마음대로 주무르는 거예요. 설마 정말 여자에 눈을 뜨기라도 한 거에요?”
그 말에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생각보다 별로 차이가 안 난다 싶어서.”
“예전에 갑옷도 바꿔 입고 놀았잖아요!”
“그게 몇 년 전인데. 그래도 다행이네.”
“뭐, 뭐가요?”
“음 부탁할게 좀 있어서.”
“그런 게 있으면 말로 하라고요. 사람 놀라게 더듬지 말고요. 갑옷이라도 빌려드려요? 언니갑옷도 어디가 망가진 거 같진 않은데.”
“그게 그러니까 갑옷 말고. 음···.”
잠시 뜸을 드리던 미네르바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 에잇 모르겠다. 그러니까 드, 드레스 좀.”
“드레스요?”
“응. 드레스 좀 빌려줘. 기왕이면 예쁘고 세련된 걸로.”
그러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아 술을 한잔 따라 마셨다.
“크윽~. 으 독하다.”
한동안 엔젤이 대답이 없자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왜 대답이 없어?”
“아, 아니. 너무 놀라서요.”
엔젤이 쪼르르 달려와 맞은편에 앉았다.
“언니가 드레스를 빌려달라니 너무 놀라서 그랬죠.”
확실히 그랬다.
입학파티 때도 드레스 한번 입혀보려고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서 결국 참석만 해주는 걸로 마무리를 했었다.
그런 미네르바가 드레스를 빌려달라니.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일단은 나도 여자니까 입을 일 정도는 있는 게 당연하잖아.”
물론 당연하다.
일반적인 여자라면 말이다.
“그래서 빌려줄 거야 말거야?”
“뭐 일단 빌려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원하신다면 새로 맞춰드릴 수도 있어요. 단! 이유를 말씀해주세요. 궁금하단 말이에요.”
“음.”
“에이 우리 사이에 못 할 말이 뭐가 있어요?”
엔젤은 계속해서 미네르바를 독촉했다.
솔직히 그녀가 드레스를 빌려달라는 이유정도는 짐작이 됐다.
여자라면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당연한 것이고 그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건 일반적인 여자들 얘기고 미네르바처럼 반쯤은 여자이길 포기한 경우는 좀 다르다.
여자로서 특별히 예뻐 보고 싶은 순간이 생겼다는 말.
그건 좋아하는 남자 앞에 섰을 때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더 놀랍고 더 궁금한 것이었다.
“아냐. 못들은 걸로 해줘. 급한 것도 아니고.”
“언니!”
“그냥 적당한 걸로 하나 맞춰 입지 뭐. 그런데 무슨 드레스 한 벌이 그렇게 비싼 거니?”
그 말에 엔젤은 피식 웃었다.
그냥 그런 드레스라면 몰라도 외국에서 들려온 비싼 옷감과 보석 치장에 이것저것 하면 드레스 한 벌 값은 어마어마하다.
기사에게 좋은 갑옷이 자신감을 높여주는 만큼 여자에겐 드레스가 그렇다.
당연히 더 예쁜 것 더 좋은 것 화려한 것들을 택하게 된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던 미네르바가 저러는 걸 보면 상당히 신경 쓴다는 뜻.
“그래도 못살 정도는 아닐 텐데요?”
“네 생각보다 난 부유하지 않다고. 사람들은 백작가의 딸이고 넘버즈니까 돈에 구애받지 않는 줄 알겠지만 알고 보면 가난한 기사라니까.”
“설마 아직도 집에 돈을 보내요?”
“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언니도 참. 그 고집은 정말 못 말리겠네요.”
“내가 백작가의 영애가 아니라 한사람의 기사로 그리고 나로서 완전히 자유롭기 위해 하는 일이니까.”
기사가 된 후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가문이랑 거의 인연을 끊고 지낸 것이 벌써 몇 년.
그때부터 키워준데 들어간 돈을 지불하겠다고 집에 돈을 보내기 시작한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러고 있는 모양.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입던 드레스 한 벌 정도는 가지고 나오는 거였는데.”
“하아~ 정말 언니도. 알았어요. 빌려 드릴게요. 대신에 힌트라도 좀 줘요. 정말 궁금하단 말이에요.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죠?”
엔젤은 한참을 졸라댔다.
“아아 정말. 알았어. 대신 몇 가지 약속해줘.”
“네~.”
“첫째,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 것. 둘째, 절대 오해하지 말 것. 셋째, 웃지 말 것.”
손가락까지 펴 보이며 강조하는 미네르바를 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정도라면 충분히 약속해드릴 수 있어요. 자 그러니 어서 말해주세요.”
“하아~ 정말. 드레스 한 벌 없는 내가 한심하네. 절대 오해하지 마.”“네네.”
“사실 약속을 했어. 오늘 결투에서 이기면 드레스 입은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약속이요? 누구랑요? 오늘 결투라면··· 설마 길리안 경이요?”
엔젤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묻자 얼굴을 돌리는 미네르바.
대답은 없었지만 부정도 하지 않는 모습.
“세, 세상에.”
“뭘 그렇게 놀라? 그냥 결투에서 승리하라고 동기부여차원에서 그런 것뿐이야.”
“언니가 먼저 말했어요?”
“설마 내가 먼저 드레스를 입겠다고 했겠어?”
“그럼요?”
“하아~.”
잠시 망설이던 미네르바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간략하게 설명했다.
“와~ 정말 놀랍네요.”
그럴 만도 한 것이 도대체 언제? 라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잠깐 생각해보니 현장조사 때 도움을 받고 어쩌면 그 이후에 뭔가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엔젤이 미네르바를 훑어보고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지금 모습을 보여 주세요. 훨씬 좋아할지도 모르니까.”
“뭐? 이런 모습을?”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고 얼굴이 붉어진 미네르바가 소리쳤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니까!”
“네. 오해 안했어요. 푸흣.”
그러더니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웃지 말라니까!”
미네르바가 화난 듯 소리쳐도 그녀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하아~ 아아. 아 정말. 미안해요 언니. 절대 웃겨서 웃은 건 아니에요.”
한참을 웃던 엔젤이 조금 진정이 됐는지 미네르바에게 사과했다.
“아 미안해요 언니. 너무 의외라서.”
확실히 그랬다.
미네르바가 남자를 좋아하게 되다니.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신분을 떠나 남자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던 미네르바.
그녀 말고도 라데카도 그랬고 자신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을 정도.
그런 여자들의 눈길을 끄는 남자가 길리안 이었으니까.
“뭐가 의외야? 오해하지 말라고.”
“오해 안했다니까요.”
“지금 오해하고 있잖아.”
“두 사람이 너무 풋풋해 보여서요. 서로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정도 아닌가요?”
“아니야!”
“정말요? 난 그렇게 생각되는데. 정말 아니에요?”
“아니라니까.”
“음, 뭐 그렇다면 제가 오해한 게 맞네요. 사실 언니한테 미안한 생각도 들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겠어요.”
미네르바의 말을 듣고 딱 감이 와서 어제 라데카 등에게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괜한 짓을 한 것 같았으니까.
“미안하다니?”
“아니에요.”
“그런데 언니도 참 솔직하지 못하네요.”
“뭐가?”
“음 그렇게 부끄러워요? 남자랑 여자가 서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만나는 게.”
“그러니까···.”
“아 네. 알겠어요. 그럼 그렇다고 치고 제가 가져도 되죠?”
“뭐?”
“그냥 아끼는 동료기사 정도라면 상관없잖아요? 제가 좋아하고 제남자로 만들어도.”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엔젤을 보고 미네르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날 놀리는 거니?”
“글쎄요. 어떨까요? 그런데 그런 표정 지으면 얼굴에 주름 생겨요 언니. 내일모레면 30대인데 신경 쓰셔야죠.”
“하아~.”
“언니가 길리안 경처럼 자기마음을 모를 나이도 아니고. 언니답지 않네요.”
미네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넘어야 할 산도 많을 텐데 그런 마음이면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역시 첫사랑은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말은 길리안 경에게도 해당되나 봐요.”
“무슨, 아직 사랑이나 그런 거는 아니니까···.”
“네네. 언니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글쎄요. 길리안 경은 어떨까요?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는 몰라도 언니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건, 여자로 보고 싶고 여자로 대하고 싶다는 마음일 텐데.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언니도 그런 제안을 쉽게 할 사람도 아니고요.”
“음.”
“뭐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제가 너무 앞서나간 것 같기도 하니까요. 일단 약속은 지킬게요.”
그러고서 일어난 엔젤이 옷장에서 드레스 한 벌을 꺼냈다.
“일단 스타일을 좀 봐야 하니까 입어 봐요 언니.”
“나 씻지도 않았어.”
“괜찮아요. 자 어서요.”
의외로 순순히 드레스를 받아 입는 미네르바를 보면서 엔젤은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라 그런지 엄청 어색하네.”
그러면서도 엔젤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입었다.
“자 다됐어요.”
드레스를 입은 미네르바를 전신 거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역시 언니는 뭘 입어도 잘 어울려요. 이런 모습을 몇 년 만에 보는 건지. 후흣 역시 아름답네요.”
“가슴이 너무 많이 파인 거 아닌가? 허리는 두꺼워 보이고.”
“아무래도 코르셋을 입어야겠어요.”
“음 그래야겠지?”
“그리고 가슴이 너무 파인 건 좀 그렇겠어요. 언니 피부 톤이 좀 어둡긴 해도 얼굴이나 목주변이랑 속살이랑 차이가 심하네요. 화장으론 커버 안 되겠어요.”
“그, 그런가?”
“아니면 망사로 직접 노출을 가린, 음~ 그런 스타일도 괜찮겠네요. 제겐 그런 스타일은 없으니까 이번에 같이 맞춰요.”
“그럴 필요까진 없어. 파티나 무도회에 갈 것도 아니고 잠시 보여주는 것뿐이니까.”
“그럴 것 같으면 날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면서. 파티나 무도회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예뻐 보이고 싶은 거 아니에요?”
“음.”
“이참에 편하게 입을 수 있는 것도 몇 벌 맞춰요.”
“아니야. 어차피 입을 일도 없어.”
“그렇게 해요. 지금까지 많이 포기하고 살았잖아요. 이제는 그러지 말아요.”
“음. 난···.”
“부담가질 필요는 없어요. 언니를 응원하는 차원에서 드리는 선물이니까. 그 사람도 참 어지간하네요. 목숨 걸고 보고 싶은 게 고작 드레스 입은 모습이라니. 참 귀엽죠?”
“후우~.”
말없이 낮은 한숨을 쉬는 미네르바를 보며 엔젤은 계속 말했다.
“그리고 너무 안심하지 말아요. 남녀 사이의 일은 모르는 거니까. 너무 안심하다간 빼앗길 수도 있다고요. 좀 더 솔직해 지는 게 좋을 거예요.”
“난···.”
미네르바가 뭔가 말하려 할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사람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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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여자들 대화 너무 쓰기 힘네요.
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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