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9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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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안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말을 거는 상대를 보고 길리안이 웃으면서 말에서 내렸다.
“그러는 라울 행정관님께서는 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여긴 동부관청 관할이 아닌 것으로 아는데요?”
일전에 라첼의 소개로 집과 땅을 구매할 때 도움을 준 9급 행정관 라울이었다. 처음에는 좀 딱딱하게 대하더니 그 후로도 몇 번 만나면서 조금은 대하는 것이 편해졌다.
“일손이 모자란다고 하도 요청을 해서 지원을 나왔습니다. 이상한 놈들이 큰일을 벌여놓은 걸 수습하느라 저희가 아주 죽을 맛입니다.”
라울의 말에 길리안이 쓰게 웃었다.
일을 벌인 자들을 잡아들이는 것도 일이지만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것 또한 일이었다. 그리고 제일 바쁜 것은 역시나 일선에서 일하는 실무자들.
“고생이 많으시군요.”
“별말씀을요. 뭐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나저나 정말 어쩐 일이십니까?”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도움이 될까하고 필요한 것들을 좀 챙겨왔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라울이 그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줄을 지어 도착하고 있는 수레가 수십 대는 돼보였다.
“허어... 뭘 이렇게까지. 제가 대신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라울의 말에 길리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감사를 받고자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런 것 밖에는 딱히 생각이 안 나더군요.”
“그런 생각을 하신다는 것이 대단한 겁니다. 나중에 보고서를 올릴 때 길리안님 이름을 제일 위에 적어야겠습니다.”
“하하... 그.. 그런 걸 바라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물론 그러시겠죠. 그보다 이베트 자작부인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듣기론 안면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만...”
“네. 그런데 부인께서 이곳에 계십니까?”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언제나 제일 먼저 나서시는 진정한 귀족다운 분이시죠. 저쪽에 계시니 인사라도 나눠보십시오. 이쪽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네. 그럼.”
길리안은 라울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서 사람들에게 뭔가를 직접 나눠주고 있는 자작부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보는 길리안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와의 관계는 처음보다는 좀 나아졌다고 할 수 있었다.
수도에 일이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돌아오는 길에 가장 걱정이 됐던 것은 역시나 저택과 베이커리, 그리고 소작을 준 이들이었다.
혹시라도 그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았을까 조마조마 했었는데 돌아와 보니 다행히 이렇다 할 피해는 없었다. 얘길 들어보니 일이 터지자마자 자작부인의 명을 받은 기사들이 자신과 관련된 곳으로 달려와 지켜줬다는 것이었다.
너무 고마워 바로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라고 걱정해주는 부인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솔직히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웠던 것이지 부인이 싫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뭔가를 바라고 관심을 가지고 잘 대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는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음먹기에 따라 멀리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거기에 이번에는 큰 도움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그 나름대로 보답할 것을 생각해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답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저 지금은 부인을 멀리하지 않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진심으로 대해주는 이에겐 자신 또한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
계속 말을 높여주는 것이 부담스러워 편하게 대해달라고 했더니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왜 그러는지 영문을 몰라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길리안은 자작부인 주변에서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이미 안면이 있는 그들도 눈인사를 하며 길리안의 접근을 막지 않았다.
슬쩍 옆으로 다가가 그녀가 나눠주고 있는 모포를 들어 옆에서 건넸다.
“음?”
뭔가 이상했는지 고개를 돌렸던 이베트 자작부인이 환하게 웃었다.
“어머 길리안. 네가 이곳에는 웬일이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많다고 들어 뭔가 도울 것이 없을까 하고 와봤습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더욱 환하게 미소 지으며 길리안의 두 손을 잡았다.
“좋은 마음가짐이구나. 앞으로도 지금 같은 그 마음을 잃지 마렴.”
“네. 그런데 왜 이곳에 계신 겁니까. 이런 곳은 부인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지금 하시는 일도 밑에 사람을 시키셔도 될 일입니다.”
솔직히 그랬다.
지금 길리안이 온 곳은 북부의 빈민들 중 화재로 피해를 입어 집을 잃고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을 임시로 모아 수용해 놓은 곳이었으니까.
이베트 자작부인 같은 귀부인이 올 곳은 아니었고, 손수 물품을 나눠주는 것은 더더욱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솔직히 지원품만 보내도 그녀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테고 그 정도만 해도 충분해 보였다.
그런 길리안의 말에 이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난 귀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을 뿐이란다.”
“의무라니요?”
“귀족에게 주어진 특권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란다. 백성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그들을 보호하고 살기 좋게 만들어 주는 것이 귀족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일이란다. 이곳이 비록 왕도이고 가문의 영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수는 없지 않겠니?”
그녀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모든 귀족이 그렇게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길리안은 귀족에 대해 큰 거부감도 없었고 대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도 않았다.
고향에 있는 영주님은 정말 존경받을만한 분이셨고 그 일가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길리안의 가문역시 오랫동안 영지에 뿌리를 내리고 대를 이어 내려온 부농이었기에 거의 가신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영주님은 물론 그 자녀들과도 가깝게 지냈고 그 때문에 큰 거부감이 들거나 할 게 없었다.
물론 동부를 여행하고 수도에 올라오며 보고 느낀 것 때문에 조금은 반감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런 귀족들과 지금 눈앞에 자작부인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굳이 비교할 대상을 찾자면 영주부인정도? 아마 그분도 이런 일이 생기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영지 민들을 돌보셨을 테니까.
이베트는 길리안을 이끌고 같이 현장에 나와 있던 귀부인들에게 소개를 했다.
수도 전체의 귀족수를 생각하면 극히 소수일 뿐이었지만 그들의 행동 자체가 다른 귀족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것이었다.
“길리안. 너무 무리한 것 아니니?”
길리안이 가져온 물품들을 보고 이베트가 한 말이었다.
“절대 무리한 것은 아닙니다. 가진 만큼 베풀라고 배웠습니다. 아마 아버지께서 이 자리에 계셨다고 해도 저처럼 하셨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길리안을 보며 이베트가 흐뭇하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라도 이일을 알면 널 무척 자랑스러워하시겠구나. 하지만 좋은 일은 한번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란다. 앞으로도 어려운 이들이 보이면 조금씩 도와주도록 하렴.”
“네.”
그렇게 자작부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병사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쳐다보는데 옆에서 이베트의 말이 들렸다.
“왕비님께서 오시는 모양이구나.”
그 말에 이베트를 쳐다보던 길리안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와.. 왕비님께서 여길 오신단 말입니까?”
놀라서 되묻는 길리안을 보며 이베트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이상하니?”
“아니... 뭐 그런 건 아니지만...”
“왕은 백성들의 아버지라 할 수 있고, 왕비는 어머니라 할 수 있단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잘못을 하면 호되게 꾸짖기도 하고 위엄을 세워야 할 때도 많단다. 하지만 자식들이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다 알아주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 어머니는 그런 자식들을 아우르고 달래야 하는 것이지. 지금처럼 자식들이 힘들고 고통스러워 울고 있는데 모른척하는 어미가 세상에 어디 있겠니.”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이베트를 보며 길리안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세상 모든 귀족이 눈앞에 이베트 자작부인과 같다면 세상이 참 팍팍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는 귀족들이 있어 그나마 좀 덜한 것일 테지만 말이다.
길리안은 아직까지 왕가의 인물 중 누군가를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도에 살다보면 그래도 종종 볼 수 있지만 길리안이 도착하고 나서는 그럴만한 일이 없었다.
“내 옆에 붙어있으렴. 언제고 한번 왕비님께 소개하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왔구나.”
“저... 절 말씀이십니까?”
“그럼 여기에 길리안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하하.. 하아... 전... 음...”
당황스러워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시골영지에서 올라 온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귀족들을 대함에 있어 크게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왕비는 다르다.
아니 백작이상만 되도 남작이나 자작에 비할 수 없는 대귀족인지라 솔직히 껄끄럽고, 기사가 되기 전까진 만날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왕비라면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나라의 왕의 부인이며 그 이전의 신분 또한 고귀했다.
원래 지금 국왕의 첫 왕비는 지금의 왕비가 아니었다. 첫 왕비가 두 번째 왕자를 출산하고 사망한 후에 다시 들인 것이 지금의 왕비였다.
현 왕비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었다.
이유는 그녀의 출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에스토 왕국의 북쪽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기안 왕국의 공주였다.
우호를 다지고 있는 칼랜베르크 왕국과는 달리 기안왕국과는 독립할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
에스토 왕국의 독립을 지원한다는 빌미로 점거한 영토를 독립 후에도 반환하지 않아 문제가 됐었고, 그로인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러온 앙숙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영토는 아직 반환받지 못했고, 오히려 기안 왕국에서 공국을 세워 독립시키고 더 이상 자신들의 땅이 아니니 공국과 처리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그것이 10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북쪽에서는 기안 왕국이 세운 페슈미안 공국과 공국을 지원하는 기안왕국을 상대로 계속해서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첫 왕비의 사후 공주를 왕비로 맞이해 우호를 다지자는 기안 왕국의 제의 때문에 한동안 시끄럽기도 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타국의 공주를 왕비로 들일 때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왕위계승권이었다.
전 왕비의 왕자들이 있었지만 새로 맞은 왕비가 왕자를 출산했을 때가 문제였다.
왕가의 번영은 축복할 일이지만 그것이 꼭 축복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혹시라도 왕이 잘못돼 후사를 제대로 정해놓지 못하고 죽으면 왕위 계승을 위한 분쟁은 당연한 것이고, 타국의 공주가 출산한 왕자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도 대륙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우호를 다질 수는 있을지 몰라도 훗날 전쟁의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심하던 현 왕은 기안과의 우호를 선택했다.
반발도 있었지만 국왕이 내세운 이유는 에스토 왕국이 장자승계원칙을 법으로 정해 놓았다는 점이었다. 그 법은 자신의 아들 대에서도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 단언했기 때문에 반발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렇게 기안의 공주를 왕비로 맞았고 혈연으로 인한 한시적인 평화 또한 얻을 수 있었다.
그게 20여 년 전의 일이었다.
물론 요 몇 년 전부터 기안과의 분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큰 전쟁을 벌이지 않는 선에서 해결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길리안도 기안사람이라면 별로였다.
이유는 큰 형을 그렇게 만든 것이 기안의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비에 대한 얘기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고 그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거나 하지는 않았다.
현 왕비는 아주 유명한 일화로 초기부터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다.
타국으로 시집을 오는 공주는 여러 명의 수행원을 달고 오는 것이 당연한 것. 그리 사이가 좋지 못했기에 기안왕국의 사람들이 왕궁에 상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데 현 왕비가 결혼식을 마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 한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나는 이 왕국에서 나고 자라진 않았지만 지금부터는 에스토 왕국의 사람이고 이 나라의 왕비이다. 그렇기 때문에 난 타국의 사람들에게 시중을 받지 않겠다.”
그리곤 기안에서 함께 온 시녀들은 물론 호위 기사들까지 모두 돌려보냈다. 측근 한두 명이라도 남겨 놓을 법도 한데 그런 것도 없이 모두를 돌려보내고, 홀로 타 왕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보통사람이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었다.
타향생활에 훌륭하게 적응한 것은 물론 어머니를 잃은 왕자들을 돌보고 백성들까지 챙기는 그녀를 지금은 아무도 기안왕국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직도 기안왕국이라면 이를 가는 이들이 많았지만 왕비를 들먹이며 욕을 했다간 맞아죽기 딱 좋았다. 그 정도로 백성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가 높다는 것이다.
그런 왕비를 만나본다는 것은 길리안에게 있어 크나큰 영광이었다.
병사들이 정렬하고 그 사이로 왕가의 깃발이 꽂혀 있는 화려한 마차가 들어왔다.
마차가 멈춰서고 문이 열리자 한명의 여인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전편에서 출발하는걸 보시고 도적들 때려잡는 걸 생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이건 아카데미 역사수업시간에 다뤄볼까 하다가 꺼냈습니다. 어차피 왕비의 등장이 있으니 주변정세도 설명 할 겸 뭐 겸사겸사. 자주 나오지는 않겠지만 나름 중요한 왕비님의 등장이십니다. 쿨럭.
그리고 오 언제 이렇게 선작과 조회수가 늘었지요.^^?(모른 척 하지만 사실 무척 신경 쓰며 하루 열두 번도 더 확인함...)
하하하 부족한 글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면야 전 더 바랄게 없지요.(거짓말.)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이건 참말.)
P.S 첫 추천 글을 올려주신 물처럼님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단독 추천을 쿨럭... 참고로 이거... 연참입니다. 하루2편이면 제게는 연참... 일종의 보답이랄까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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