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2장(5)

그녀가 나가자 라첼이 길리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오히려 잘된 거야. 부인께 자넬 각인시킬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저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기회라네.”

“그렇게 대단한 분입니까?”

“대단하지.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분이시니.”

“저분이 여왕이십니까?”

놀란 듯이 말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라첼이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여왕님께서 이런 데를 왜 오시겠나? 후우··· 사교계의 여왕이라고. 진짜 여왕님이 아니고. 그리고 이 나라엔 여왕이 나온 적이 없어.”

“아, 네.”

“아무튼, 이제 대충 정리가 된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라첼이 아직도 불안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길리안의 어깨를 두드렸다.

“허허 걱정하지 말래도. 자작부인은 평이 좋아. 우리네 같은 평민들에게도 예의를 다하시고 좋은 일도 많이 하시는 분이지. 수도에서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네. 부인께서 준다면 주는 거고 기억한다면 기억하는 거라네. 아마 이삼일 후면 그 손수건 그대로 돌아올 게야.”

“예.”

“이걸 좋은 기회로 삼게. 자작부인의 눈에 들어서 자네에게 손해날 것이 없어. 좋은 인연을 만들면 큰 도움이 될 거야.”

“네.”

“그나저나 자네를 만나 나까지 운이 트였군.”

“그랬다면 다행입니다.”

“허허 고작 그게 다인가? 자네나 나나 오늘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행운을 얻은 거라니까.”

길리안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아직 잘 와 닿지 않아서.”

“허허···. 아직 순수한 걸 보니 어리긴 어리군. 뭐 앞으로 차차 나아지겠지. 다만···. 아닐세.”

라첼은 무슨 말인가 하려다 그냥 얼버무렸다.

확실히 길리안은 어린 나이만큼 순수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변할 것이다. 왠지 그게 마음이 아팠다.

라첼은 생각을 털어버리고 입을 열었다.

“자네 오늘 학비 다 벌었어. 학비가 뭐야? 이 정도면 부자지 부자.”

“저건 다 나라로 들어가는 것 아닙니까? 전 현상금을 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말에 라첼을 고개를 저었다.

“아주 고마운 말이네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내가 그럴 수는 없지. 내가 괜히 신경 써서 귀족 가에 소식을 전했겠나? 그리고 저들이 괜히 돈주머니를 던져줬겠어?”

그러면서 모아놓은 자루와 주머니들을 발로 툭툭 찼다.

“물론 이 돈이 전부 자네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야. 자네 말대로 나라로 들어가야 하는 돈도 있지만 그걸 빼고 남은 건 알버트가 10, 내가 30, 자네가 60일세. 어떤가?”

“전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허허 이렇게 욕심이 없어서야. 아 그리고 일단 이거는 넣어두게.”

길리안은 라첼이 건네주는 작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안에는 귀금속과 보석이 들어있었다.

“이건 제가 증거물로 가져온 것이 아닙니까?”

“맞네. 하지만 쓸데없이 증거물이 너무 많아. 목록에 없는 것은 다 자네가 챙겨도 되는 거라네.”

“하지만 이건 그들이 훔치거나 뺏은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겠지만 신고 되지 않은 거니 문제 될 것도 없는 물건이지. 현상금 사냥꾼들이 현상금만 타 먹고 사는 줄 아나? 이런 부수입이 현상금보다 더 큰 법이지.”

그러면서 망설이고 있는 길리안의 어깨를 툭툭 쳤다.

“탈은 없을 테니까 넣어둬.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다 챙길 걸 그랬군.”

“뭐 그러셔도···.”

“허허 착하고 순수한 것도 좋지만 그게 심하면 멍청해 보이고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기 쉽네. 꿈이 크면 조금은 욕심이란 것도 가져야 해. 내가 자네를 속이려 마음먹으면 오늘 자네가 볼 손해가 얼마인지나 아는가?”

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고 얼마가 들어왔는지도 모르니 알 수도 없었다.

“이 친구 이거 세상을 많이 배워야겠구먼.”

라첼의 말에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확실히 고향에선 겪어보지 못한 많은 일을 여행 중에 겪었다. 그리고 오늘 겪은 일도 전혀 몰랐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의 말대도 배울 것도 많기는 했다.

“그리고 돈은 어떻게 버는지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거지. 어차피 주인은 자네니까 그걸 좋게 쓰면 되는 거라네.”

“예.”

“그리고··· 요 반지 하나는 내가 가져도 되겠나? 마누라 주려고. 하하하.”

그렇게 말하며 웃는 라첼을 보면서 길리안도 웃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많이 알고 많이 얻고 또 많이 배웠습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다행이고.”

“그런데 저 사람은 아무도 안 찾아온 겁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라첼이 철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상범들로 가득했던 철창은 어느새 비었고 지금은 한 명만 남아있었다.

“아 신경 쓰지 말게나. 뭐 모두 귀족하고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혼자 남은 자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철창에 붙어 뭐라 말을 하고 있었다. 다만 입에 물려놓은 제갈 때문에 그 말이 밖으로 나오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잡힐 때부터 자신은 결백하다고 현상범이 아니라고 말하던 자였다.

그 이야기를 라첼에게 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저런 놈들은 다 그래.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도 저 이마에 노예 낙인이 보이지? 아마 주인 몰래 도망친 것이겠지.”

“그래도 제가 실수해서 그가···”

“아아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래도. 내가 알아보고 잘 처리할 테니까. 그보다 돈은 서류 정리하고 나눠서 챙겨주지. 여기 일은 내가 마무리할 테니까 자네는 숙소를 잡아야지?”

“아. 네.”

“그런데 자네가 입학하려는 아카데미가 어디지?”

“슈발리에 아카데미입니다.”

“오, 그래? 그럼 마침 잘됐군. 어이 알버트.”

라첼의 부름에 밖에 있던 알버트가 들어왔다.

“다 끝난 건가?”

“뭐 그럭저럭. 그보다 자네 큰손님 한 명 생겼어.”

“응?”

“이 친구 슈발리에 아카데미에 간다는군.”

“오 그런가? 우리 여관이 바로 옆이지. 옆. 와하하하하. 시원한 맥주에 내 마누라 요리 솜씨가 끝내줘. 물론 침대도 푹신하지.”

“아하하하···. 그, 그렇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내가 잘 부탁해야지. 곧 기사님이 될 몸이신데. 자 가지. 내가 안내함세.”

“쯧쯧. 이보게. 자네 지금 근무시간이네만.”

라첼의 말에 알버트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지.”

“그럼 내가 데려다주지.”

“어이 라첼. 자네도 할 일이 많잖아.”

“아···. 그렇군. 방금도 말해 놓고. 정신이 없어.”

“어이 게릭 이 친구 우리 집에 좀 데려다줘.”

그 말에 게릭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 대장 또 접니까?”

“왜 싫어?”

“아닙니다. 어이 사랑스러운 친구 어서 가지. 자네 덕에 오늘 근무 끝났어.”

“예? 아, 예.”

길리안은 혼자 남겨진 죄수를 한번 쳐다보고 게릭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섰다.

“으···윽 머리야.”

길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상을 찡그렸다.

성문경비대장인 알버트의 여관.

그는 경비대장 일을 하고 부인은 여관을 운영한다고 했다. 거기서 알버트를 비롯한 경비병들과 함께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영지에 있을 때는 나이도 좀 어린 편이고 다들 어릴 때부터 봐오던 이들이고, 큰형이나 아버지를 봐서 이렇게 술을 권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17살이면 다 큰 어른이라고 술도 배워야 한다면서 먹이는데, 빼도 박도 못하고 주는 대로 받아먹은 결과가 지금이었다.

“그렇게 마셨는데도 때가 되면 눈이 떠지는구나.”

아직 동이 트려면 이른 시간.

지끈거리던 머리가 조금 나아지자 길리안은 옆에 있던 주전자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갈증을 해소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오래된 습관이었다.

잠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5시간 이상 자질 않았다.

숙면을 한다는 기준으로 평균 4시간 정도를 자고 일어나면 항상 몸을 풀고 검을 휘둘렀다.

한참 동안 몸을 푼 길리안은 검을 집어 들고 방을 나섰다.

여관 뒤편에 딸린 공터에서 검을 휘둘렀다.

그 커다란 검을 들어 올려 크게 베는 동작을 반복했다.

‘신경 쓰여.’

어제의 일도 그리 개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불법적인 일도 아니라고 했고, 어차피 그런 자들에게 동정심을 품지도 않는다.

가능하다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 남의 것을 강탈하고 나쁜 짓을 일삼는 것들은 싹 청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으니까.

다만 마지막에 본 죄수의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의 말대로 정말 죄가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자신이 실수한 것이라면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현상 수배범이 잡혔다고 이미 배포된 전단을 일일이 수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그게 문제가 되기도 한다고 들었다.

한번 잡혔었고, 사형을 면하고 죗값을 치른 이가 또 잡혀 온 경우다. 그런 일이 종종 있다고 했다.

현상범과 비슷하게 생겨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그자를 잡았을 때도 확인해보고 죄가 없으면 풀려날 테니 걱정할 게 없지 않으냐고 말했었다.

영지에서는 법의 집행도 공정하고 확실하게 처리돼서 다른 곳도 다 그런 줄 알았는데 막상 세상에 나와 보니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다.

‘라첼님이 잘 처리해 주셨을까?’

영지에 있는 티롤 아저씨는 고지식할 정도로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공정한 분이다. 그런 분이 수도에 가면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준 것이 라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라첼은 티롤 아저씨와 같은 부류는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믿을만한 분이니까.’

확실히 티롤 아저씨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처음 만난 사이인데도 살갑게 대해줬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배운 것도 많았다.

역시나 수도는 고향과는 달랐고 무척이나 복잡하고 단 하루였지만 인간미가 부족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고향을 떠나올 때 한 기사는 적응하기 힘들지도 모른다고 말했었다. 낯설고 많은 것이 달라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수도에 있는 동안 라첼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길리안은 머리를 흔들어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도착하고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이니 낯선 것은 당연한 거고, 신경이 쓰이는 것은 확인해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을 할 때는 잡생각은 금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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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일연으로 서식지를 옮겼습니다. 

오랜만이라 변한 게 많아서 적응이 힘들군요.

[스랄]

재밌습니다.

[조카]

잡생각은 주화입마의 지름길이지요....

[바람왕]

잘 보고 갑니다..

[musado01..]

잘 보고 갑니다.

건 필하세요^^*

[jk******]

마지막 남은 현상범은 꼭 복선으로 남을것 같은 예감이...

[무가지보]

잘 보고 갑니다

[sfartar]

건필하세요

[천지]

즐감,.!

[라콘투어]

클래식 판타지군요 좋습니다

[아스트리스]

라첼이 참 현실적이면서도 중도를 지키고... 괜찮은 사람이네요.

[바람바람1]

참...멍청한색기네.....세상물정을 몰라도...참...머리 회전이 안되는 설정?????

[아이시루스]

주인공 성격이 마이 답답해보이네요.
흠................ 일단 좀더 보겠습니다.

[자요]

잘 보고 갑니다.

[요혈락사]

감사합니다...^^

[마녀의솥]

잘 읽었습니다.

[MidD]

오늘 근무는 노 나는구나 -> 이해가 안되는 표현이라서요~~ 근무 빠져서 좋다는 말 같긴 한데.. ㅎㅎ

[대원(大遠)]

그러시군요 ㅎㅎ 음 그래서 변경~

[척결자]

주인공이 너무 미지근하다!
자기 주관의식이 없고 끌러다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