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8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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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길리안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집사를 포함한 고용인 모두가 모여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는 걸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작전에 나가던 날 아침에 장비를 챙기기 위해 잠시 들른 후 며칠 만에 집에 오는 것이었다.
“넘버즈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집사의 말에 다른 이들이 같은 말을 입을 모아 크게 말했다.
“하하, 이러면 제가 부끄러워서···. 모두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잘 부탁합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길리안을 보며 미소 짓던 집사가 표정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걸 본 사람들이 길리안에게 간단한 축하의 말을 하고 집을 나서거나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우아~ 정말 엄청 간소하구나.”
뒤에 있던 친구 중 케빈의 말에 길리안은 그저 피식 웃을 뿐.
“도련님께선 이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은 축하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하니 아주 간소하게 준비한 겁니다.”
집사의 말에 길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그런 집사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형님이신 윌리엄 경께서 꼼꼼히 확인하셨지만, 그래도 잠시 시간을 내서 확인해 보십시오.”
“네.”
“그리고 우선 보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리로···.”
집사의 안내에 길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혹시 윌리엄 경께서는 또 언제 오실지 아시는지요.”
“글쎄요. 형은 라이라프의 기사니까요. 언제까지 제 옆에서 도움을 줄 수는 없는 입장입니다.”
“음, 그렇다면 아무래도 사람을 좀 더 고용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서 모든 것을 관리하기엔 부족함이 많습니다.”
“제가 신경 써야 할 걸 집사님께 모두 맡겨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집사님이 괜찮은 사람들로 물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뒤를 따르던 케빈이 길리안을 툭 쳤다.
“넌 도대체 사업을 얼마나 벌이고 있는 거냐?”
그 말에 길리안에 집사에게 건네받은 것을 케빈에게 건넸다.
멈춰 서서 그걸 빠르게 훑어본 케빈이 급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길리안. 너 그냥 나랑 사업하자.”
“그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야. 난 그쪽으로는 별로···.”
“별로 관심 없다는 거지? 그런 거치고는 사업 규모가 엄청난데? 나 예전부터 자세히 듣질 못해서 궁금했었는데 도대체 어떡하면 이 정도가 되는 거냐?”
“그건 말이지. 처음에···.”
길리안은 계단을 오르며 처음 수도에 와서 생겼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줬다.
솔직히 갑자기 큰돈이 생겨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시작한 일.
결과적으론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도 제공하게 됐고, 지금은 돈에 구애받지 않게 돼서 좋은 일에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한 번도 안 해 본 거라 처음에는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는데, 어차피 내가 목표로 하는 게 돈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게 지금은 어머니께서 도와주시고 하다 보니 점점 커진 거야.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좋은 사람들이 열심히 해줘서 그렇게 된 거고 특히 집사님이 많이 도와주셨어.”
길리안의 말에 케빈이 피식 웃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가끔 길리안이 돈이 많다는 걸 잊어버리곤 한다. 그만큼 가진 걸 티 내지 않는 녀석.
장부상으로 본 길리안의 자산은 좀 있는 자신이 봐도 대단한 수준.
자본금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대충 알지만, 자본이 많다고 다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밑에 있는 사람들만 잘해서는 이 정도 규모의 사업을 벌일 수도 유지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수완도 있고 사람 관리도 할 줄 안다는 말.
“아, 케빈. 네가 관리 좀 해볼래?”
“응? 내가?”
“어.”
“그건 반대입니다.”
집사의 말에 길리안이 걸음을 멈췄다.
“케빈은 믿을 수 있고 사업적 능력도 저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그럴지는 모르지만, 두 분이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하시려면 공과 사는 구분하시는 게 좋기 때문입니다.”
집사의 말에 케빈이 길리안의 어깨를 툭 쳤다.
“그건 집사님 말이 맞아. 어차피 나도 집에서 나와 독립하고 따로 사업을 벌일 거다. 그럼 너랑 거래할 수도 있지만 그럴수록 확실하게. 알지?”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희 집사님 너무 탐나는데?”
“안 돼.”
“저도 얼마 남지 않은 생에 마지막 주인님은 도련님이십니다.”
길리안과 집사의 말에 케빈이 웃으며 말했다.
“집사님 같은 사람 또 없습니까? 독립하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이번에 일자리를 잃은 이들이 많습니다. 원하신다면 괜찮은 사람이 있나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건 케빈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관료로 있던 귀족 중 상당수가 처벌을 받았고, 죽음은 면했어도 재산을 몰수당한 자들도 많다.
무늬만 귀족이 된 자들이 고용인들을 유지할 수는 없는 일.
자신이 직접 구해도 되겠지만, 길리안의 집에 드나들며 본 집사는 정말 믿음직했다.
정도에 어긋나지 않은 조언과 깔끔한 일 처리. 거기에 사람을 다루는 능력 등 뭐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이번에도 밖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길리안의 저택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불안해 보이는 고용인들도 없었고, 집사도 여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다.
그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집사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고, 탐난다는 말도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케빈의 말에 짧게 대답한 집사가 길리안보다 조금 빨리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었다.
“다른 곳에 둘 수가 없어 이곳에 모아 놓았습니다.”
집사의 말을 들으며 파티 홀로 들어서던 길리안이 멈칫했다.
홀에 있는 수십 벌의 갑옷.
“와~ 엄청 많다.”
홀 안으로 달려 들어가며 그렉이 한 말에 케빈 등이 피식 웃으며 뒤를 따랐다.
“어? 길리안 거기 서서 뭐하냐? 놀란 거냐?”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어. 며칠 전에 움직이는 갑옷들을 만나서···.”
“응? 갑옷이 움직여?”
“그런 게 있더라. 그런데 이건···.”
“결투에서 승리하셨지 않습니까? 이건 전리품입니다. 자작부인께서 수리까지 해서 보내셨습니다.”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갑옷 하나에 손을 댔다.
기사 72명과의 결투가 생각났다.
그날 죽거나 항복한 기사들의 갑옷.
갑옷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쓰던 무기도 한쪽에 잘 정돈돼있었다.
바빠서 자신은 신경도 쓰지 못했었다.
“옮기느라 고생하셨겠네요. 전리품을 어떻게 하던 그건 제 마음이겠죠?”
“물론입니다.”
“그럼 팔죠. 장식으로 쓰기엔 너무 비싸니.”
“워워, 길리안 이걸 다 팔 거냐?”
케빈의 물음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면 뭐해. 먼지나 앉고 청소하는데 손만 가잖아.”
“하하, 정말. 하여간 너란 녀석은 가끔 보면 다른 나라 사람 같다.”
“내가 이상한가?”
“아니다. 확실히 장식으로 쓰기엔 많기도 하고 비싸기도 하지. 급하게 처분할 거 아니면 며칠 후에 나한테 팔아라.”
“이걸 다?”
“그래 내가 다 사마.”
“음···.”
“손 좀 보면 내가 입을 만한 것도 있고, 나 상단도 차릴 거거든. 상인기사들 고용하면 무장도 시켜야 하니까. 남는 건 내가 직접 팔면 되고.”
“상인 기사?”
“아~ 꼭 기사가 너 같은 기사만 있는 건 아닌 거 알잖아. 영주나 귀족들 말고도 먹고 살기 위해 상인에게 고용되는 기사들도 있다. 그런 기사들을 상인 기사라고 하지. 용병들보단 믿을 만하고 무장만 제대로 하면 실력은 좀 떨어져도 기사의 몫은 하고. 내가 머지않아 상단을 이끌고 거친 사막의 모래바람을 뚫고 사라센 제국까지 다녀올 거다. 하하하.”
크게 웃은 케빈이 길리안을 보며 다시 말했다.
“헐값에 달라고는 안 한다. 제값 다 주고 가져갈게. 물론 조금 싸게 주면 좋고.”
그 말에 미소를 지은 길리안이 집사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그때 그렉이 갑옷 하나를 들고 와서 길리안 앞에 놓고 작은 주머니를 손에 쥐여줬다.
“이게 뭐야?”
“이거 판다며.”
“어.”
“이건 내가 살게. 나한테 딱 맞을 거 같아.”
약간 흥분한 듯 얼굴까지 붉히며 말하는 그렉을 보고 길리안이 웃었다.
길리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케빈이 다가와 손에 든 주머니를 뺏듯이 들고 안을 열어봤다.
“오, 우리 그렉이 골드를? 어디 보자. 한 30골드 되겠네?”
“어. 딱 30골드.”
“이야~ 길리안 덕에 네 생에 다시 못 만져 볼 돈을 가지게 됐구나.”
그 말에 그렉이 씨익 웃자 그의 손에 돈주머니를 다시 쥐여준 케빈이 말했다.
“자, 이거 가지고 대장간 가서 풀 플레이트메일 만들어 주세요. 라고 해봐라.”
“그러면?”
“몰라서 물어보냐? 욕먹고 쫓겨나거나 망치로 맞겠지. 기사도 아닌 놈이 벌써 갑옷 욕심은.”
“에잇. 나도 기사 될 거거든? 요즘 기사수업 때 보면 애들 다 갑옷 입는단 말이야. 너도 알잖아.”
“암 알지. 아는데 그건 너희 부모님께 말해라. 길리안이 네 아빠냐? 아무리 친구라도 그렇지 아니 친구한테 그러면 안 되지. 30골드에 이걸 꿀꺽하려고? 에이 도둑놈아. 야, 길리안 이런 거 받아주지 마라. 버릇 나빠진다.”
그런 둘을 보며 웃던 길리안이 턱을 매만졌다.
“음, 확실히 30골드에 팔 수는 없지. 그럼 집사님께 혼나거든.”
그 말에 뒤쪽에 있던 집사가 헛기침을 했다.
“파는 건 그렇고 빌려줄게.”
길리안의 말에 그렉이 환하게 웃었다.
“어? 정말?”
“응. 더 클 수도 있잖아. 아니 더 클 테니까 그때까지만 입어.”
그 말에 그렉이 길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사랑한다. 친구야.”
그런 그렉을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보던 케빈이 말했다.
“하긴 저 갑옷은 어디 가서 팔기도 힘들긴 하겠다. 유아용도 아니고. 그래도 저놈한테 제대로 된 갑옷이 말이 되냐? 차라리 가능성 있는 애를 밀어줘라. 안톤 같은 애.”
그 말에 프란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도 가능성이 있지 않나? 실력은 나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 충분하지. 그런데 넌 왕자잖아. 여기서 너희 집이 제일 부자거든? 너 솔직히 갑옷 있지? 왕자가 없으면 말이 안 되지.”
프란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케빈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없는 척할 때가 따로 있지. 저걸 확! 그보다 너도 이제 신분을 확실히 밝히는 게 어떠냐? 길리안 넘버즈 되던 날 본 사람도 많으니까 아카데미에 소문나는 것도 금방이고.”
“음.”
“나도 케빈의 말에 동의한다. 그게 아카데미나 널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해. 널 호위하는 기사들을 위해서도.”
길리안이 거들자 프란트가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밖에선 우리도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보는 눈이 많을 때는.”
길리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케빈이 아직 길리안을 끌어안고 있는 그렉을 잡아당겼다.
“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냐?”
“어? 아 생각보다 길리안 품이 너무 좋아서. 아빠 같아.”
“에라 이. 에휴 됐다. 그보다 길리안 너 혹시 이상한 얘기 듣고 그러는 거냐? 뭐 신분체계를 무너트린다느니 그런 얘기.”
“응. 그런 것도 있지만 조심해야 할 건 맞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래도 그런 거 별로 신경 쓰지 마라. 어차피 내세울 건 신분밖에 없는 놈들이 괜히 불안해서 하는 말이니까. 그런데 너 정말 신분제에 불만 같은 건 없지?”
“길리안이 불만이 있었다면 기사가 됐을까? 기사는 지금의 지배체제를 확고히 하는 역할도 해왔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안톤의 말에 케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물어보고도 좀 웃기긴 했다. 길리안이 하도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편에 서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다.”
“난.”
길리안이 모두를 한 번씩 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신분마다 주어진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누릴 수 있는 권리도 다른 것 아닌가? 그런데 책임과 의무는 가장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강요하고 권리와 힘을 앞세워 불합리한 이득을 취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야.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길리안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지. 뭐 그래도 이번 일로 많이 나아질 거라고 본다.”
살짝 무거워진 분위기에 케빈이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무슨 얘기 하다가 이렇게 됐지? 아 맞다. 길리안 안톤도 갑옷 하나 빌려주지 그러냐?”
길리안이 안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안톤은 곧 기사가 될 거니까.”
“난···.”
“일단 시험을 봐. 그 후에 결정하면 되잖아?”
길리안의 말에 뭐라 말하려던 안톤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 갑옷 정말 빌려주는 거지?”
갑옷을 끌어안고 말하는 그렉을 보고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대신 너희 집에 다녀온 후에.”
“응? 우리 집에? 왜?”
“아무래도 앞으론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고, 항상 우리 집에 모였잖아. 너희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오늘은 너희들 집에 가보고 싶어.”
길리안의 말에 그렉은 대답하지 않았다.
케빈이 그런 그렉을 보다가 말했다.
“길리안, 난 곧 독립할 건데 그 후에···.”
“시간이 없을 것 같다니까.”
“음, 하긴 이제 넘버즈니까 바쁘긴 하겠지. 난 좋다. 우리 집에 넘버즈의 기사를 모시는 것도 영광이지.”
“나도 좋다. 쭉 궁금하기도 했고.”
프란트도 동조하자 남은 둘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케빈이 어깨동무를 했다.
“그럼 그렉네 집부터. 출발! 자자 가자!”
인상을 찌푸린 그렉도 난감한 표정의 안톤도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던 집사가 이내 표정을 고치고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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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이번 장을 다 쓰고 올리려고 했는데 그럼 내일까지 써야 할 것 같아서...
우선 쓴 만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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