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6장(1)
“할일이 많을 터인데 여기서 뭘 하는 겐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드겔을 보고 에런 왕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 자네가 걱정돼서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자네가 죽는 줄 알았네.”
“허허 이것 참. 상처 조금 입은 걸 가지고 호들갑은··· 자네가 지금 내 머리맡이나 지키고 있을 만큼 한가한가? 난 괜찮으니 나가서 왕으로서의 일을 하게나.”
“해가 진지 벌써 오래되었네. 왕도 사람이니 쉬어야 일을 할 것이 아닌가?”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 드겔이 헛기침을 했다.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진 후.
“시간이 언제 이리 되었는지. 나이가 드니 초저녁잠이 많아지는군.”
“아직 우리가 그 정도로 늙지는 않았네만.”
“내가 자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걸 잊은 모양이군. 그 말은 내가 더 늙었다는 거지. 내 나이가 돼보게. 하루하루가 다르니.”
“기절한 것이 그리 부끄러운가?”
“피곤해서 잠시 눈 좀 붙인 걸 가지고 기절이라니.”
“뭐 그렇다고 하세.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건가?”
팔을 움직여보고 대충 몸을 살핀 드겔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 에런 왕은 미소를 지었다.
드겔이 마탑주에게 간다는 보고를 받고 준비하고 있던 기사들을 보내 주었다. 드겔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당연히 걱정도 하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마탑도 손봐야 하는구나.’ 라는 생각과 그 때문에 발생할 이런저런 문제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팠었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이고 우선은 쓸자와 벌할 자를 가려 빨리 정리를 해야 했다. 그나마 귀족과 영주들의 반발은 힘으로 누르려고 마음먹으니 오히려 편하게 행동할 수가 있었다.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드겔을 위시한 기사들 덕이다.
어쨌든 정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제구실을 못했다고는 해도 갑자기 인원이 대폭 줄면, 직영지의 관리기능 자체가 마비될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을 충원하는 일도 시급했다.
거기에 백성들에게 한 약속과 기사들에게 한 약속도 지켜야 했다.
할 일은 많고 생각도 많고 마음은 급했지만, 순서대로 처리하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일을 처리하고 있을 때 지원신호가 올라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위치는 마탑주의 저택.
드겔에 루퍼드에 아이작까지 넘버즈가 3명.
하위번호도 아니고 1,2번이 함께 있다.
거기에 기사가 300이상에 병사들까지 하면, 어지간한 영지를 쓸어버리고도 남을 전력이 갔는데 지원신호가 올라온 것.
불안한 마음에 준비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과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모두 보내라고 지시하고, 상황을 상세히 보고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거의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았다.
수백의 몬스터가 몰려나왔다는 말에 기가차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벌어진 것.
수도 한복판에서 몬스터들이 뛰어다니는 걸 상상하자 끔찍했다. 방화사건보다 더한 수치이고, 더 많은 인명피해가 일어날 것이다.
가장 안전해야 할 수도에서 이런 일이 연달아 발생하면 왕권이 문제가 아니었다.
외부의 위협에서 안전을 보장하는 건 가장 기본 적인 것.
간신히 다독여 놓은 평민들의 마음도 돌아설 것이고, 귀족과 영주들은 더욱 자신을 우습게 볼 것이다.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마탑주의 저택이 폭발했다는 보고를 받을 때까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다.
가끔 마탑에서도 폭발이 일어나 마법사가 죽거나 다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하지만 큰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큰 저택이 흔적만 남았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들려온 드겔의 부상 소식.
그 말을 듣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었다.
그가 온다는 보고에 왕성 앞까지 마중을 나갔다.
말에 탄 드겔은 온 몸에 피 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홀로 말을 몰고 온 그를 보고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드겔의 피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녀왔다는 말과 함께 책 두 권을 건네고 쓰러졌다.
그의 부상은 상당히 심각했다.
동원할 수 있는 신관과 약제사 의사를 모두 불러 그를 치료하게 했고, 치료하는 동안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는 친구이자 더없이 든든한 자신의 검이었다. 그가 쓰러지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고, 그가 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가 죽는 다면 단지 오른팔을 잃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가 정신을 잃고 있었던 몇 시간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다.
드겔만이 아니었다.
루퍼드도 꽤 심한 부상을 당했고 그 역시 치료를 받아야했다. 몬스터를 처리하며 목숨을 잃은 기사가 30이 넘고 폭발 때 부상을 당한 기사는 더 많았다.
그나마 아이작이 기사들을 물려서 부상으로 그쳤지, 저택 가까이에 있었다면 수백의 기사를 한꺼번에 잃을 뻔 했다.
아이작에게는 마탑을 조사하도록 지시했다.
모든 연구와 활동을 중단하게하고 의심이 가면 일단 무조건 잡아들이라했다. 만약 반항하거나 공격을 당해서 제압하기 힘들 것 같으면 그냥 죽이라고 했다.
그만큼 분노했었다.
“루퍼드는 괜찮은가? 그도 부상이 꽤 심했지.”
드겔의 물음에 에런 왕은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것인지.
“치료를 받더니 다른 넘버즈들을 지원한다고 무장하고 나갔네. 믿음직스럽더군.”
“그도 오늘 느낀 것이 많을 것이네. 나도 그렇지만··· 그래서 적을 쫓던 넘버즈들은 어찌 되었는가? 돌아왔는가?”
“아직 이네.”
“음···.”
“왜 그러는가?”
“마탑주가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준비하고 있었네. 성 안에서 이정도면 성 밖에선 더 할 수도 있다는 것이지.”
드겔의 말에 에런 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마 마탑을 조사해도 별로 나올 것은 없을 것이네. 마탑주가 포섭한 마법사들도 이미 움직였을 테니. 별일 없었으면 좋겠군.”
“음.”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그리 쉽게 당할 이들은 아니니. 루퍼드가 갔다니 곧 소식이 있겠지. 그나저나 전력이 늘어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제살 깎아 먹기나 하고 있으니 원.”
“후우~.”
한숨을 쉬는 에런 왕을 보며 드겔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 낙담하지는 말게나. 어차피 없는 것만 못한 자들은 빨리 정리하는 편이 나을 테니. 중요한 순간에 뒤통수를 맞는 거 보다야 낫지 않은가?”
“그야 그렇지만···.”
“다른 생각 말고 지금 마음먹은 대로 밀고나가게. 더 이상 내버려두면 정말 위험하네.”
“알고 있네. 허나 할 일이 너무 많군. 반발도 심할 테고, 힘으로 누르는 것도 한계가 있겠지.”
“그건 해결 할 수 있지. 자네가 잘 하는 것이 있지 않은가?”
드겔의 말에 에런 왕이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대 귀족들만 달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네.”
그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쉽지 않다는 것이 문제.
“어차피 자기들에게 직접 피해만 없으면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을 테니, 내어 줄건 내어주고 필요한 것을 얻으면 되지. 자네가 제일 잘하는 것이지 않나?”
“어차피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은 하고 있네. 아무래도 영주회의를 소집해야겠어. 그들도 떠봐야 하니···. 그보다 앞으론 쓸데없이 목숨 걸지 말게나. 이렇게 놀라는 것은 한번이면 족하네.”
“그래도 주는 것은 받아와야 하지 않겠나?”
“루퍼드의 말을 들으니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네가 그리돼서 많이 놀랐다더군. 도대체 왜 그 모양이 된 것인가?”
“그자가 마법에 실패하고 지팡이와 책을 한권 떨어트렸지. 그 책이 텔레포트마법서 같았거든. 그가 준 정보는 일단 신뢰에 문제가 있지만, 적에게 직접 받은 것이라면 뭔가 알아낼 수도 있을 테니까.”
에런 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게 자네가 생각하던 그 마법서가 맞던가?”
“나야 모르지.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그건 내가 자네에게 묻고 싶었네. 내가 가져온 게 그게 맞던가?”
“나도 모르지.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허, 목숨 걸고 가져왔는데 알아보지도 않았는가?”
“그건 마르콘이 알아보고 있을 거네. 결국 마법사를 통해서 알아봐야겠지만.”
“하긴.”
“그자도 실패할 거라는 생각은 못했나보군. 그가 혹할 만큼 완벽해 보였던가. 그러니 반역을 꾀하고 마도시대를 운운했겠지.”
에런 왕의 말에 드겔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했다.
“그런데 꼭 실패라고는 할 수 없지.”
“음?”
“목적지가 저승이었다면 성공한 것이니.”
드겔의 말에 에런 왕은 피식 웃었다.
그때 갑자기 문에 벌컥 열리며 한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멀쩡한 모양이군.”
시종장 마르콘 백작이었다.
“이 사람아 놀라지 않았는가?”
에런 왕의 말에 마르콘이 웃으며 말했다.
“급해서 그랬네. 젊은 넘버즈들이 돌아오고 있네. 거의 다 왔다는 군.”
“그래 그들은 무사하다던가?”
“부상을 좀 당했다는데 다들 살아있다네.”
그 말에 에런 왕이 인상을 찡그렸다.
전쟁이 난 것도 아닌데 오늘 하루 넘버즈들의 부상소식을 너무 많이 들어서였다.
“허허.”
기사들이 치료를 받는 곳에 들어서며 에런 왕은 돌아온 넘버즈들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그들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자는 듯 누워있는 미네르바는 별다른 부상은 없고 탈진해서 정신을 잃은 것이라 했다.
로렌스는 누워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다리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나마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는 건 길리안과 드레드 뿐.
그들도 어디 부러진 곳이 없을 뿐이지 자잘한 부상은 더 많았다.
다들 치료를 받고 며칠 쉬며 회복하면 될 거라는 신관과 의사들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레드가 보고를 하려고 했지만 에런 왕이 손을 들어 만류했다.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된 그들을 보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대략적인 보고는 이미 들었다.
“보고는 천천히 듣겠네. 경들이 무사히 돌아와 다행이다. 치료를 받고 푹 쉬며 몸을 회복하라. 경은 첫 임무부터 고생이 많았나보군.”
마지막 말은 길리안을 보며 한 것.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정도면 훌륭하게 잘해준 것이니 자책하지 말라.”
수백의 몬스터를 단 네 명이서 상대하고 중심부까지 다다랐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무장을 갖춘 수백의 기사가 한 일을 단 네 명이서 했다는 말.
그 던전에서도 마탑주의 저택에서처럼 큰 폭발이 있다고 했다.
던전은 무너졌고 살아 돌아온 것이 다행.
그 와중에 부상당한 마법사까지 몇 명 잡아왔으니 할 일은 다한 셈이었다.
“경에게 미안하군. 정식으로 임명식을 해주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부려먹으니.”
번호가 올라갈 때는 몰라도 처음 넘버즈에 오르면 성대하게 임명식을 해준다.
왕실과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이니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포고관들은 새로운 넘버즈의 탄생을 알리고 다닌다.
평민출신의 기사가 넘버즈가 된 것이 언제인지 왕인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
실력도 실력이지만 평민들에겐 상징적 의미도 커서 되도록 빨리 정식임명식을 해주려고 했다.
괜히 예외넘버까지 수여하며 넘버즈에 임명한 것이 아니니까.
임명식은 몰라도 우선은 오늘 기사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No.11의 탄생을 공식적으로 알리려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돼버렸다.
자칫 오늘 일로 그가 죽기라도 했으면 무척 난감해질 뻔 했다.
“그보다 급히 하셔야 할 일도 신경 쓰셔야 할 일도 많으실 겁니다. 임명식은 안 해주셔도 되니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흐음.”
솔직히 자신에게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개인에게는 엄청난 영광. 특히 평민 출신인 그에게는 더없는 영광일 텐데 스스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지.”
움직여도 괜찮다며 굳이 따라온 드겔이 뒤에서 한 말에 에런 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에는 파티를 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적과 전쟁 중이고, 급히 하셔야 할 일이 많으실 겁니다. 제 임명식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일입니다.”
“음.”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적과 전쟁 중이라는 길리안의 말이 맞았다. 그 전쟁터가 어이없게도 수도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보다 허락해 주신다면 다른 넘버즈 기사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허허 벌써?”
“말씀하신대로 제 자리를 스스로 찾아가겠습니다.”
“음.”
“전쟁 중에도 후방에선 무투회를 열기도 하니 괜찮지 않습니까?”
드겔의 말에 에런 왕은 피식 웃었다.
전쟁이 나도 후방을 완전히 비울 수 없기 때문에 전장에 나가지 못하는 기사들은 있기 마련.
그들을 달래기 위해 작은 규모의 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래. 누구에게 도전하고 싶은가?”
“No.9 크리스 경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에런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메리 추석!
고향에 다녀오시는 분들은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즐거운 추석 되시고 연휴도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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