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6장(9)

마크라는 귀족의 재산은 상당했다.

보유하고 있는 땅에 상점가의 매장들, 상단, 그리고 지방에 있는 사업까지 합치면 십만 골드가 훨씬 넘는 가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걸 현금화 했을 때의 말이지만 아무튼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부자가 맞다.

상황이 어렵다던데 얼마나 어려우면 돈을 빌리러 거래한번 한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인가?

“제가 그렇게 돈이 많아보이나요?”

“간단한 조사정도는 했을 겁니다. 영지 제일가는 부농의 자제가 수도에 집도사고 땅도 샀습니다. 그 정도면 기대를 걸어볼 만 했겠지요.”

집사의 말에 길리안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그 정도야 관청에 가서 행정관에게 돈 좀 쥐어주면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누군가 자신에 대해 조사를 했다면 좋아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리 기분 나쁠 것은 없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라첼이 좋은 집을 소개해주면서 마크라는 귀족의 재산목록은 이미 다 훑어보지 않았던가?

따지고 보면 비긴 셈이랄까?

그리고 미안한 말이지만 부농이신 아버지한테는 어떤 지원도 못 받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쪽에선 그걸 알 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다급하다는 말일 겁니다.”

귀족신분에 그 정도 재산에 인맥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그런데도 자신을 만나 돈 얘기를 할 정도면 그렇기는 할 것이다.

집사는 귀족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

딱히 친분을 유지할 신분은 아니지만, 귀족가의 집사로 일하며 손님을 맞이하고 옆에서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테니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마크라는 귀족 말고도 여러 귀족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이베트 자작부인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듯 했었다.

아무튼 그런 집사의 말이니 거의 맞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아... 항상 이놈에 돈이 문제군요.”

한동안 돈의 달콤한 맛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렸는데 또 이놈에 돈이 문제다.

그저 그런 이라면 딱 잘라 거절하고 넘어가도 되겠지만 상대가 귀족이라 껄끄러웠다.

수도에는 귀족이 많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이 다 작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것도 아니다. 몰락한 평 귀족들 중에는 평민보다도 못한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았다.

고향에 있을 때만 해도 보이는 귀족은 영주님 일가와 가신에 속한 평 귀족, 그리고 가끔 방문하는 인근영지의 영주들 정도다.

그런 영주들에게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위엄 같은 게 느껴졌는데, 수도에서 보이는 귀족들 중에는 정말 귀족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별거 없어 보이는 이들도 많았다.

그리고 어이없는 일도 있었다.

저택을 사고 며칠 안돼서 어떤 귀족이 찾아왔다기에 만나봤더니 대뜸 투자를 하라고 하질 않나, 어떤 귀족은 신분을 앞세워 으름장을 놓고 돈을 요구하질 않나, 가게에 찾아와 시비를 걸질 않나, 참 어이가 없었다.

집사가 그런 이들에게 은화를 좀 쥐어주고 해결했지만 찜찜해서 라첼에게 가서 조언을 구했더니 그런 것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집사가 처리했다면 그냥 넘어가라고 하더라.

몰랐는데 얘길 들어보니 수도에는 그런 이상한 귀족들도 좀 있다고 했다. 가진 것이라곤 귀족이란 신분밖에 없는 쭉정이 같은 존재들이랄까?

어쨌든 마크 폰 그레드는 그런 귀족 같지 않은 귀족들과는 달랐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가 도움을 청하는 거라 무작정 거절하기도 뭐했다.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것이었다.

만나보고 얘길 들어봐야겠지만 무조건 거절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돕기도 뭐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만나보시고 제가 드린 말씀이 맞아 돈을 빌리려하는 것이라면, 도련님의 현 상황을 정확히 말씀하시고 정중히 거절하시면 됩니다. 그쪽에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을 겁니다.”

“음... 그렇군요. 하지만 만약에 제가 그를 돕는다면 재기할 가능성은 있을까요? 그에게 도움을 주고 좋은 관계를 맺어놓으면 나중에 도움이 될 거란 얘기를 들었거든요.”

“그건... 음...”

뭔가 말을 꺼내려다 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에 너무 기분이 상하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마크님 같은 경우는 평 귀족 중에서도 상당한 재력가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선 조금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고 해서 지금과 같은 어려움을 겪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려움을 겪는 다는 건 누군가와 힘 싸움을 벌였고 아마도 그 싸움에서 밀렸다고 보여 집니다. 그리고 그 상대는 역시나 귀족이겠지요. 물론 정확한 것은 조금 알아봐야 하겠지만 제가 다른 이들에게 들은 얘기를 토대로 드리는 말씀이니 아마 맞을 것입니다.”

길리안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라첼이나 거래를 도와줬던 라울에게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었으니까.

“도련님께서 가지고 계신 재산은 보통 평민의 기준에서는 엄청난 것임은 사실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가진 것이 없는 이들과 비교했을 때입니다. 지금하시는 일이 안정되면 현 상태를 유지하시거나 조금씩 재산을 불리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다른 일을 하실 때는 항상 신중하셔야합니다. 재력가라 불리는 귀족들과 비교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십니다.”

길리안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왜 기분상하지 말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마크님은 이미 여기저기 아는 이들에게는 도움을 요청했고, 돈을 끌어다 쓸 만큼 썼을 겁니다. 그런데도 해결하지 못하고 도련님께 손을 벌리려한다는 건 이미 신용은 바닥을 쳤고 회생하긴 힘들다는 말과 같습니다.”

“음...”

“도련님께서 가지고 계신 여유재산이 수천골드정도 되지만 그걸 모두 그에게 투자하신다고 해도 가능성은 적을 거라 생각됩니다. 아마 그가 회생하려면 적어도 수만 골드의 자금이 한꺼번에 투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만 골드라는 말에 어이가 없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그리고 귀족들 간의 힘 싸움에는 함부로 끼어드셔서는 안 됩니다. 도련님께서 얻으실 수 있는 이익과 손해를 모두 계산하시고 신중하게 결정하셔야 합니다. 또 확실하지 않다면 끼어들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그에게 도움을 주면 그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도 있겠지만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께서는 평민이십니다. 아카데미에 가셔서 기사가 되기까지는 아직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사가 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사는 귀족이 아닙니다. 하물며 아직 기사의 신분도 아니십니다. 귀족들과 비교해보면 신분에서도 재력에서도 힘에서도 모든 면에서 도련님께서 약자이십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었다.

“이렇게 된 것 주제넘은 말씀을 조금 더 드리겠습니다. 도련님께서는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거절하는 법도 아셔야합니다. 도련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밑에 두고 계신 몸이십니다. 작은 인연이나 정에 이끌려 잘못된 판단을 하신다면 도련님뿐만 아니라 그 밑에 많은 이들도 피해를 입게 된다는 걸 생각해주십시오.”

길리안은 말없이 그저 고게만 끄덕였다.

“도련님께서는 좋은 분이십니다. 밑에 사람을 대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정의로운 분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항상 기사서약문을 외우시며 기사도를 따르려 하신다는 것도 잘 압니다.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하시는 거겠지요.”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어느 정도 그의 말이 맞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입니다. 많은 기사들이 기사도를 지키는 길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건 반쪽짜리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쪽짜리요?”

“예. 물론 기사도의 많은 부분은 행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의지만 있다면 기사도를 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이 그렇지를 못합니다. 이유는 바로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기 때문이라...”

“많은 기사들이 도움을 청하는 이를 모른 척 하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돕고 싶다고 해도 도울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개인의 무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사도에 따라 행하고 싶다면 그만한 힘이 있어야합니다. 그 힘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오르신다면 도련님께서는 생각하시는 대로 원하는 대로 기사도를 행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음...”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기사도를 행할 수 있는 위치.

길리안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넘버즈 밖에는 없었다. 기사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고 명예로운 자리이니까.

스승인 엘런은 기사도를 따르다보면 진정한 기사가 되어 넘버즈에 오를 것이라 했다. 그런데 집사는 넘버즈에 오르면 기사도를 행할 수 있을 거라 한다.

어떤 것이 정답일까?

이건 어떻게 보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가리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주변의 다른 상황보다는 배움으로 스스로를 단련하고 힘을 키우실 때라고 생각합니다.”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요.”

“제가 너무 주제넘은 말씀을 많이 드린 것 같습니다. 내일이 시험첫날이신데 괜한 말로 심기를 어지럽힌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집사님이 아니면 또 누가 제게 지금 같은 말을 해주겠습니까? 앞으로도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세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할 뿐입니다. 마크님에 관한일은 확실한 것은 아니니 제가 따로 알아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전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고개를 숙여 보인 집사가 밖으로 나가고 나서도 길리안은 한참동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후우...”

스티브는 길리안의 방에서 나와 한숨을 내쉬며 목까지 채워져 있던 단추하나를 풀었다.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입안이 바짝 말랐다.

지금까지 집사일하면서 주인에게 이렇게 주제넘은 말을 해본 것은 처음이었다.

길리안이 귀족집안에서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고 또 나이도 어느 정도 돼서 성숙하다면 이런 말을 해줄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지가 못했으니까.

물론 그런 이들에 비해 받은 교육수준은 떨어질지 몰라도 다른 면에서는 귀족가의 자제들이 가지지 못한 좋은 점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사람임에는 분명하나 경험적으로 미숙한 면은 많았다. 특히 세상을 너무 모른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았다는 것은 좋게 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사는데 많은 손해를 보게 된다.

지금이야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도와주고 고용인들도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단계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판단이 섰을 때 만만해 보인다 싶으면 언제든 이용하려 들것이다. 그게 사람이다.

솔직히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이 자의는 아니었다. 이베트 자작부인이 직접 찾아와 권했기에 흥미가 생겨서 온 것이었다. 자신을 고용한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고용이 돼서 일을 시작했을 때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실망을 했었다. 돈이 조금 많은 것을 빼면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청년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어린아이가 큰돈을 가지고 어쩔 줄 몰라 막 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내면서보니 그저 그런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확실히 이베트 자작부인 같은 귀족이 관심을 둘만한 면도 있기는 했다.

자작부인의 권유로 온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이곳의 일을 보고하고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일해보길 권했을 뿐이고 그에 응했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고용주는 길리안이었고 자신은 이 저택의 집사였으니까.

집사는 주인을 속여서는 안 된다. 빠른 시간에 이러한 일도 어린주인이게 말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했고 생각할 것도 많을 테니까.

스티브는 풀었던 단추를 다시 채우고 옷 매무새를 정돈한 후에 걸음을 옮겼다.

밤이 깊었으니 잠자리에 들 시간.

하지만 그전에 저택을 다시 둘러봐야 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으니까.

“긴장되십니까?”

뒤에서 들리는 집사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 기다려온 순간인데 그렇게 긴장되거나 하지는 않네요.”

“준비를 많이 하셨으니 좋은 결과가 있으실 겁니다.”

“네. 그랬으면 좋겠네요.”

“시험이 끝나실 때까지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게 제일입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다녀올게요.”

스티브가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십시오.”

길리안이 아카데미의 정문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넘버즈를 향한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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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금요일 날 제사가 있습니다.

내일은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오늘 연참으로...

이렇게 1권 분량은 끝!

토요일에 뵙지요.

아 그리고 서완님 말씀이 맞아요... 집사는 부인이 소개한 거라는.. 예리하시긴,,, ㅠㅜ

[대원(大遠)]

감사합니다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