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4장(6)
“식사 전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씻도록.”
“예.”
길리안은 대답을 하며 짐을 내려놓았다.
“무거워 보이는구나.”
그 말에 내려놓은 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당히 귀찮고 무거운 물건이 들어있기는 하지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꽤나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는지, 맡겨놓으라고 해도 괜찮다면서 계속 들고 다니던 거였다.
“들어봐도 되겠나?”
“그러십시오.”
길리안의 대답에 카스트로가 힘을 줘서 그것을 들어봤다.
별것 아니라는 듯 가볍게 들어 올렸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의외였다.
“이런 걸 들고 다니다니 제정신이냐?”
“아하하... 그게 딱히 두고 다닐 데가 없어서 말입니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던 카스트로가 손을 내밀었다.
“검을 볼 수 있을까?”
길리안은 순순히 검을 건네주었다.
커다란 검을 받아들고 몇 번 휘둘러본 카스트로가 고개를 저었다.
“좋은 검은 아니군.”
“그냥 막 쓰는 검입니다.”
“막 쓰는 검이라... 그렇다 해도 관리가 너무 안 돼있구나.”
카스트로의 말에 길리안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기본적인 수련을 할 땐 무거운 검이 나은 것 같아 몇 년 전에 대장간에서 대충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주 용도는 수련과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이었다.
막 쓰는 검이어서 그의 말처럼 관리를 잘 안하기는 했다. 날도 많이 무뎌졌고, 험하게 써서 이가 빠진 곳도 여러 군데였으니까.
그래도 최소한의 관리는 해서 녹은 슬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기사에게 검은 생명과 같다.”
“전 무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 배웠습니다.”
“음?”
“검은 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도구이고,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도구일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생각은 없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카스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건 그건 개인의 자유다. 내말은 검, 즉 무기는 기사의 생명 줄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구도 최상의 상태일 때 좋은 결과를 낼 수가 있는 거다. 그러니 쓰는 동안에는 관리를 해주도록.”
“예.”
“검을 바꿀 생각은 없나? 지나치게 무겁고 균형도 잡혀있질 않구나.”
“그렇지 않아도 바꿀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대장간을 소개해주마.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검을 만들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건 뭐지?”
카스트로의 물음에 겉옷을 벗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길리안이 웃으면서 말했다.
“제 나름의 방어구입니다.”
“흐음. 그것도 볼 수 있겠나?”
카스트로의 말에 팔에 묶여있던 것을 풀어 건넸다.
가죽으로 돼있는 것인데 뭔가 여러 개를 꽂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이런 것에 여러 개의 단검을 꽂고 다니는 자들도 있다. 하지만 길리안이 하고 다니는 것은 다른 것을 넣게 돼있었다.
넙적한 쇠막대인데 무개를 가늠해보니 대충 1kg정도 나갈 것 같았다. 팔과 다리에 하는 것에는 5개씩, 조끼처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에는 10개가 꽂혀있었으니 대충 30kg정도 되는 것이다.
거기에 검의 무게까지 하면 성인 한 사람을 몸에 달고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할 수 있었다.
무겁고 효율은 떨어지겠지만 어느 정도 방어구의 역할을 할 수도 있어 보이긴 했다.
물론 그보다는 수련을 위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이런 것은 몸에 무리를 줄 수 있다.”
“적당히 조절하고 있습니다.”
카스트로는 말없이 길리안을 쳐다보았다.
표정이나 외형적인 변화는 없었지만.
‘재미있는 녀석이군.’
처음 봤을 때 조금 관심은 갔지만 그도 그냥 넘겼었다.
하지만 다시 만나 데리고 다니면서 관찰한 결과는 꽤나 흥미로웠다.
일정한 보폭과 고른 호흡.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검과 짐을 메고 다니면서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한다는 듯 자연스러운 행동.
거기에 느껴지는 기운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할 정도였다.
기세를 내뿜는 것은 일정수준 수련을 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을 숨기는 것은 힘들다. 그리고 그걸 넘어 보통사람처럼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런데 이 어린 기사 지망생에게서 받은 느낌은 일반인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무척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보통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막 기사서임을 받은 이들을 보면 날이 잘 선 한 자루의 검을 보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경험과 실력이 쌓일수록 밖으로 드러나는 기세가 옅어지는데, 그건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기세가 안으로 갈무리되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훈련장에 데려갈 때만해도 반신반의였지만 검을 잡는 순간 확신했고, 루프란과 겨루는 것을 보며 확인했다.
그의 나이에 이정도 실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니 그런 상대를 보기는 했다.
지금의 넘버즈들이 그랬다.
특히 금발의 사자. 루퍼드 폰 히스클리프.
예전에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정말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그리고 지금의 길리안은 그때의 루퍼드와 크게 차이가 나질 않았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베트 자작부인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만한 녀석이었다. 물론 부인은 그의 실력보다 다른 이유로 관심을 보이는 것이지만 말이다.
“왜 답을 달라고 하지 않는 것이냐.”
그 말에 길리안은 웃으며 말했다.
“이기면 이라고 하셨지 않습니까?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까요.”
승부를 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부단장인 루프란을 상대로 실력을 다 꺼내 보이지 않은 것을 카스트로는 알고 있었다. 그 상태로 조금 더 뒀으면 둘 다 진짜 실력을 꺼내보였겠지만 그럴 필요까진 없어 보여 중단 시켰던 것이다.
그걸 생각해보면 참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는 녀석이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말씀해 주시면 감사히 듣기는 하겠습니다.”
능청스럽게 말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우선 씻어라. 얘기는 그다음에 하도록 하지.”
“옙.”
길리안은 대답하고 웃옷을 벗으며 씻으러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으악!”
하는 소리를 지르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무슨 일이냐?”
웃옷을 벗고 막 바지를 벗으려 했던 듯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잡은 길리안이 당황한 듯 말했다.
“안에.. 안에...”
“안에?”
“안에 여자가 있습니다.”
대낮에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허겁지겁 달려 나와 한다는 말이 안에 여자가 있단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안에 여자가 있단 말입니다. 여자가 있는데 어떻게 옷을 벗고 씻습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카스트로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네?”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군.”
그렇게 말하고 길리안의 팔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하녀 복을 입은 여자가 두 명 있었다.
“벗어라.”
카스트로의 말에 서로를 마주본 여자들이 옷을 벗으려 했다.
“아. 너희 말고. 너 말이다. 너.”
카스트로가 길리안을 쳐다봤다.
“아니 그러니까 제가 왜 벗어야 합니까?”
“씻겨줄 것이다. 넌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아하하하.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저 혼자서도 잘 씻습니다.”
“부인의 명으로 와 있었을 테니 네가 거절하면 저들이 곤욕을 치를 것이다.”
“그러니까 카스트로 경께서 잘 말씀해주시면...”
“그냥 네가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고 쉽지.”
그러면서 길리안을 여자들 쪽으로 밀었다.
“벗겨라.”
“헉!”
카스트로의 말에 길리안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달라붙은 여자들이 벌써 바지를 벗기려 들었다.
길리안이 바지춤을 잡고 저항하며 카스트로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니까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끄럽군. 미리 경험한다고 생각해라. 앞으로도 종종 겪을 수 있을 테니.”
“헉. 전 별로 경험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 아이들은 노예다. 보통 고용된 하녀들과는 달리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지. 네가 거부하면 이 아이들은 큰 벌을 받을 거다. 그래도 좋다면 내보내도록하지.”
“무슨 그런 법이...”
“아무래도 너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구나. 나가보도록.”
그 말에 두 명의 노예하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잠깐이지만 길리안은 그녀들의 눈에서 원망의 빛이 스쳐가는 걸 보았다.
“후우... 잠시만... 요.”
“왜 마음이 변했나?”
“그냥 씻겨만 주는 거죠? 하아... 그게 뭐 어렵다고... 후우... 벗을게요. 벗죠 뭐.”
그리고 주섬주섬 바지를 벗었다.
나가려던 하녀들이 잽싸게 달려와 거들었다.
“오늘하루 너에게 배정된 아이들이니 즐기고 싶다면 마음껏 즐기도록. 단 저녁식사에 늦지는 말아라.”
“끄응. 사양하겠습니다.”
말을 하면서 옷을 벗는 길리안을 보던 카스트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방금 전까지 난리를 쳐서 몰랐었는데 지금 보니 길리안의 몸에 무수히 많은 상처가 나있었다.
기사인 그에게도 상처는 있었다. 기사들치고 몸에 상처한 두게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길리안은 그 정도가 무척이나 심했다.
“그 상처들은 다 뭐지?”
카스트로의 물음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길리안이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 이건 다 제가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것들입니다.”
“용케 얼굴은 멀쩡하구나.”
“얼굴은 다치면 숨길수가 없어서 아버지께서 걱정하시거든요.”
그 말에 카스트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길리안의 몸 중에서 옷 밖으로 노출되는 곳을 빼면 상처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강한 실력이 그냥 얻은 것이 아니란 것이라고 몸으로 말하고 있는 듯 했다.
“아까 꺼내들었던 가면이 얼굴을 보호하는 용도였나 보구나.”
“네...”
“훗 재미있는 녀석이군. 다치기 싫다면 제대로 된 방어구를 입어라. 그게 훨씬 나을 테니.”
한동안 길리안의 몸을 훑어보던 카스트로가 돌아섰다.
“어쨌든 물건은 꽤 쓸 만해 보이는구나. 그럼 좋은 시간 보내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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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일요일인데 푹 쉬고 계신지요.
쓰다 보니 이쪽 이야기가 길어지는 군요.
도대체 언제 이집에서 나갈 거냐!
아마도 내일쯤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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