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21장(2)

길리안이 방에 들어서자 이베트가 손짓을 했고 시중을 들던 하녀와 하인들이 조용히 물러났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있던 그녀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왜 그러고 서 있니? 이리 오렴.”

길리안이 멋쩍게 웃으며 다가가 맞은편에 앉으려 하자 이베트가 웃으며 말했다.

“내 옆에 앉으렴.”

“예.”

옆에 앉아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웃음을 터트렸다.

“꼭 밖에서 큰 사고를 치고 혼나지 않기 위해 핑계를 생각하는 아이 같은 표정이구나.”

“아하하. 제, 제가 그렇습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어디 보자.”

이베트가 길리안의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얼굴을 마주한 채 한동안 길리안의 두 눈을 쳐다보던 그녀가 말했다.

“네 눈에 실망감이 가득하구나. 그래도 다행히 슬퍼 보이지는 않는구나.”

“하하.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슬플 일은 없었습니다.”

“정말 그럴까?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니? 세상 물정 모르는 평민 아이가 검 한 자루 달랑 들고 수도에 와서 넘버즈가 꿈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던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엔 웃었단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은 울고 있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치던 이상한 아이였지.”

“제 눈이 울고 있었습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처음에 네게 왜 이렇게 잘 해주느냐고 물었었지?”

“예.”

“이제는 날 엄마처럼 생각한다니 하는 말이지만 그날 집에 와서 종일 네 생각만 했단다. 처음 본 아이인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곰곰이 생각했었지. 어디서 봤을까? 하는 물음을 계속 되풀이 하다가 거울을 보게 됐단다. 그 거울 안에 네가 있더구나.”

“제가요?”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은 항상 울고 있는 나. 너에게서 내 모습을 봤다는 걸 그때 알게 됐지. 처음엔 내 아들 라미레스처럼 느껴졌단다. 물론 지금은 그런 착각을 하지 않지만, 그때는 그랬지.”

이베트가 말을 멈추고 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야기가 다른 곳으로 샜지만 난 널 내 아들이라 생각하고 있단다. 그리고 네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도 잘 알고 있지. 그 큰 슬픔을 이겨내고 오직 그 꿈 하나를 목표로 지금까지 노력해온 네가 느꼈을 실망감이 얼마나 클지 나는 알고 있단다. 그런데도 너는 내가 걱정할까 봐 괜찮은 척하고 있구나.”

“전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되요.”

“세상 어떤 엄마가 아들이 꿈을 접고 실망에 빠져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겠니?”

길리안이 이베트의 양손을 잡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어머니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그런 길리안을 보며 이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좋아서 웃어야 하는데 꼭 내일 죽을 아이처럼 말하니 그럴 수가 없구나.”

“제가 벌인 일이니 제가 감당하고 책임질 것을 져야겠지요. 목숨을 걸기는 했지만 죽을 거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기사가 전부인 아이가 그 길을 가지 못하면 죽는 것과 다를 게 없겠지. 꼭 이래야만 했니? 검을 부러트려야 할 만큼 참을 수 없었던 거니?”

“참고 못 참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모른 척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제가 정말 그렇게 하길 바라십니까?”

“그렇지는 않다만···.”

“후회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문제였다면 또 단지 몇 명의 문제였다면 제 선에서 처리할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나를 파헤치면 또 하나가 나오고 다른 사람이 나오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데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를 정말 많이 고민했습니다.”

이베트가 길리안의 손을 잡았다.

“알고 있단다. 너의 선택을 나무라려는 것이 아니란다. 하지만 그런 고민이 있고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면서 내게 말해주지 않은 것은 서운하구나.”

“죄송합니다.”

“길리안. 넌 혼자가 아니란다. 지금보다 훨씬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아~ 앞으로는 내게 먼저 말해주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겠니?”

“네. 그러겠습니다.”

“그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 같이 고민해 볼까?”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길리안의 볼을 꼬집었다.

“으이그. 정말 엉덩이라도 때려주고 싶구나.”

“하하···.”

멋쩍게 웃는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세상이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가 않단다. 물론 너도 많이 고민했을 테고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이겠지만 결코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란다.”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겠지만. 하아~ 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단다. 폐하께서 바보여서 지금 같은 상황을 모르고 계실까?”

“알고 계시면서도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다면 더 실망스러울 것 같습니다.”

“우선 내 얘기를 들어보렴. 먼저 폐하에 대해 얘기해주마.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암살시도가 몇 번 있었단다. 물론 그 위험에서 벗어났기에 지금 왕이 되었지만, 암살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사람을 잘 못 믿게 되었지. 냉정하게 보면 소극적인 면도 있고 그리 용감한 왕은 아니란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왕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란다.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고 말해도 피가 붉은 사람인 것은 마찬가지니까. 왕이기 이전에 사람이란 말이지. 그래도 왕관의 무게를 알기에 그만한 위엄을 보일 수 있는 것이고 그 점은 높이 살 만하단다. 아주 무능한 왕은 아니다만 그렇다고 훌륭한 왕이라고도 할 수는 없지.”

“음···.”

“알현하기도 까다롭고 정말 중요한 행사가 아니라면 왕성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없고, 탄생일 축제 때도 잠시 얼굴을 보여주는 것이 다지. 어찌 보면 그런 폐하의 행동과 성향이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단다. 그리고 영주들과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귀족들의 힘은 왕이라 해도 무시할 수 없는 거란다. 폐하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을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그리고 왕실 기사들의 문제이니 넌 내부의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만은 않단다. 넘버즈의 반 이상이 백작 이상의 대 귀족 가의 일원이고, 폐하의 기사 중 반 이상이 귀족가문 출신이지. 간단하게 생각하면 기사니까 당연히 폐하를 섬기는 것이 맞겠지만, 현실이 그렇지가 못하지. 가문과 개인을 떨어트려 놓고 생각하기는 힘든 일 아니겠니? 거기에 이런 사건까지 터졌으니 누굴 믿고 누굴 믿지 말아야 할지 더 혼란스럽겠지.”

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가고 기사로서 자신의 의무에 충실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그럴까? 만약 폐하께서 날 배척한다면 아니, 내게 칼을 겨눈다면 넌 어떻게 하겠니?”

“그건···. 음.”

“쉽게 답하지 못하겠지? 너는 특히 정에 약하니까.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란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것이 사람이지.”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투쟁의 연속이란다. 자연과 싸우고 몬스터와 싸우고 같은 인간끼리 서로 싸우지. 서로 힘을 합쳐 외부의 위협에 대항하면서도 내부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끝없이 싸우는 것이 사람이란다. 이곳은 보이지 않는 칼을 휘두르는 전장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지. 화려함으로 포장하고 명예와 정의를 입에 담지만, 뒤에서는 추악한 일을 벌이는 이들이 너무도 많은 곳이란다.”

“음···.”

“네겐 항상 좋은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지만, 내게도 그런 모습은 있단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듯이 내가 누리고 있는 부도 모두 정당하게 얻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란다. 물론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지만, 지금까지 본 내 모습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지.”

“어떤 모습이라도 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지금의 너처럼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란다.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너. 폐하의 입장에서 비교한다면 누굴 선택하겠니?”

“전 아닐 것 같군요.”

“분명 명분을 따지면 너에게 있지만 정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정의를 바란다는 것은 힘든 일이겠지. 아무리 큰 명분이 있다고 해도 그걸 받쳐주는 힘이 없다면 세상을 향한 부질없는 외침에 지나지 않는단다. 길리안. 넌 이제 겨우 열여덟 살이란다. 앞으로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가야 하고 그만큼 너의 이상과 정의를 세울 시간도 기회도 많다는 것이지. 너의 용기를 높게 사지만 고작 세상에 작은 변화를 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건 너무 아깝구나. 그런 건 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해도 충분하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네게 가장 부족한 게 뭔지 아니?”

“저야 뭐··· 부족한 것이 워낙 많아서요.”

“넌 충분한 실력이 있고 배우는 것을 익히는 속도를 보면 머리도 좋은 편이고, 기사로서의 마음가짐과 이상도 높고 꿈도 있지. 그런데 이상하게 야망이 없구나.”

“음···.”

“넘버즈가 되겠다는 꿈? 그건 야망이 아니지. 넘버즈인 로렌스 경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하더구나.”

“그랬습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니? 어떻게 바꿔보고 싶니?”

“그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지금처럼은 절대 안 된단다. 네가 정의롭고 또 바르게 행동하고 아무리 강해진다고 해도 혼자서는 절대 바꿀 수 없는 것이 세상이란다. 일국의 왕도 바꾸지 못하는 세상을 어떻게 일개 기사가 바꾸겠니?”

심각한 표정을 한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노예와 농노, 평민, 기사, 귀족. 이 신분이 정말 다일까? 같은 평민이어도 부자가 가난한 자를 부리지. 돈이 많은 평민은 이름뿐인 귀족을 무시할 수도 있는 세상이란다. 귀족은 다 같은 귀족일까? 전혀. 법으로 정해 놓은 신분 안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가 또 존재한다는 것이지. 기사도 다 같은 기사는 아니지 않니?”

“그렇지요.”

“모든 신분을 하나로 묶고 가진 것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줘도 시간이 지나면 가진 자와 못 가진자, 권력을 가진 자와 소외된 자로 나뉘게 된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이 생긴다는 것이란다. 아무리 이상적인 사상이나 엄격한 법을 적용해도 막을 수없는 자연의 섭리 같은 것이지. 사람이 그런 것을 어쩌겠니? 그리고 그게 현실이란 것이지.”

“예.”

“네가 원하는 것이 큰 것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지만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있다는 말이란다. 아무튼, 네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든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지. 그 힘은 어디서 나올까?”

“그건. 음···. 사람입니까?”

“그래. 사람이란다. 어차피 사람이 사는 사회고 사람이 만든 법이고 돈, 권력, 명예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니까.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하지 말고 너의 사람들을 만들어 가렴.”

“흐음.”

“이 왕국의 백성들 하나하나가 모두 다 폐하를 섬기고 있을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을 거란다. 하지만 모두가 폐하를 섬기는 것처럼 말하지. 왜일까?”

“각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들이 폐하께 충성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렇지. 그럼 너의 세력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떻겠니?”

“예?”

놀란 표정을 하는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웃으며 말했다.

“반역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다. 간단하게 생각해보자꾸나. 너를 따르는 이들을 모아 너의 세력을 만들고 네가 권력을 잡고 난 후에도 폐하께 충성을 바친다면 같은 것 아니니?”

“그건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제가 어떻게···.”

“이래서 네게 야망이 부족하다고 하는 거란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좀 더 큰 꿈을 품어보렴. 그렇다고 썩어빠진 자들과 동류가 되라는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 무조건 쳐내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란다. 그런 자들을 포용할 줄도 알아야 하고 이용할 줄도 알아야겠지.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부를 모아 널 따르는 이들에게 나눠주기도 해야겠지. 가끔은 눈을 감아야 하고 귀를 막아야 할 때도 있겠지. 지금의 너는 그런 것이 힘들겠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면 검을 부러트린 김에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는 것도 괜찮아 보이는구나. 그럼 적어도 네가 부러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아~.”

“진정한 강자가 되어 세상을 바꿔보겠니? 아니면 힘들 때마다 검을 부러트리고 도망치는 약한 기사가 되겠니?”

“전 도망치기 위해 검을 부러트린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단다. 하지만 기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 도망치는 것과 다를 것이 있니? 앞으로 해야 할 많은 일을 포기한 것이니까.”

“저는···.”

길리안이 뭔가 말하기 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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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길리안 혼나는 중입니다.^^;;;

[딸기맛캔디]

어느새 1년이ㅋㅋ

[Lasmenin..]

도대체 언제 돌아오시나요?

[암거]

이런글 찾기힘든대 작가님 실종이 참안타깝다...

[Lasmenin..]

작가님 살아계신가여? 언제오시나요? 옛날 연재하실때 덧글달으신내용보면 절대 연중하실의향이 없으셧는데 어디 감금당하신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