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3장(6)
“경이 직접 말이오?”
“그렇습니다.”
“허허.”
자신도 놀랐지만 다른 기사들은 더 놀란 표정.
드겔은 보통 기사가 아니다.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면 대부분의 일은 루퍼드가 처리하게 한다. 젊은 그들에게 공이 필요한 것도 있지만 무게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나서서 우리라는 말로 기사들에게 너와 나는 같은 기사라고 했다. 그들을 한 대 묶었고 단지 몇 마디 말이었지만 기사들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거기에 길리안을 진정한 기사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어차피 자신의 기사이니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진다 해도 나쁠 것은 없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이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넘버즈 최고의 기사가 아직 넘버도 달지 않은 기사와 겨루겠단다.
목숨을 걸어야 제 실력이 나온다고 하니 정말 죽일 기세로 몰아붙일 것이다.
물론 드겔을 믿기는 하지만 만약 잘못되기라도 하면 득보다 실이 크다.
그때.
“왕국 최고의 기사가 나서는 것은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 제가 나서겠습니다.”
루퍼드였다.
“허허 이것 참.”
No.1 이나 No.2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실력을 보이는 것이라 하나 단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나서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로렌스까지.
“아무래도 넘버즈와 직접 붙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전에 근위기사들이 호되게 당한 것도 있으니 제가 나서보겠습니다.”
에런 왕은 옆에서 말하는 크락시스를 보곤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근위기사단장인 그는 넘버즈가 아니어서 그렇지 번호를 부여한다면 세손가락 안에 들 인물.
그런 이가 나서겠단다.
상황이 이러니 앞으로 나섰던 다른 기사들은 기회를 달라고 말하기도 뭐한지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왕은 어이없는 상황에 그저 헛웃음만 흘릴 뿐.
“허허 내가 왕께 청하지 않았는가. 엘런 경에게 들은 얘기도 확인해야 하니 경들은 물러나시게.”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드겔이 저럴 정도면 정말 손이 근질거린다는 뜻.
거기에 엘런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뭔가 생각이 있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경의 뜻대로 하시오.”
왕의 말에 예를 표한 드겔이 로렌스를 봤다.
그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드겔을 지나쳐가며 말했다.
“언제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든 찾아오게.”
그리고 길리안을 보며 말했다.
“표정을 보니 엘런이 나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나보군.”
“예.”
“훗, 뭐 그런 사람이지. 오래 알고지낸 사이네. 경은 그 나이 때의 엘런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네.”
“칭찬이십니까?”
“반은 칭찬일세.”
그 말에 길리안은 웃었다.
칭찬에 반은 또 뭔지.
“그의 밑에서 배웠으니 기사도에 대해서는 귀가 따갑게 들었을 테고, 당연히 자신을 낮추고 겸손 하라 배웠겠지.”
“예.”
“엘런이 도가 지나치다 할 정도면 알만한 것이지.”
“그러셨습니까?”
“경이 기사가 되던 날 잠깐 만났네. 뭐든 지나치면 좋지 못한 법. 그가 그러더군. 스스로의 실력도 잘 모를 거라고 말일세.”
“제 실력은 가늠하고 있습니다.”
“오~ 정말 그런가? 아마 처음에 넘버즈들을 봤을 때는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 아닌가?”
“그렇습니다.”
“허나 지금은 아닐 테지. 실력을 감추고 겸손 하라 배워 경 스스로가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두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더군. 그러니 한번 알아보면 되겠지.”
“부탁드립니다.”
“착각하지 말게. 이것은 대련이 아니네. 목숨을 걸어야 할게야. 뭐 여러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느끼는 것이 낫겠지.”
말을 마친 드겔의 검이 벌써 코앞.
아까 얘기를 할 때부터 뽑아두고 있었기에 별다른 준비 없이 바로 들어온 공격.
“헛.”
예상하지 못한 그의 공격에 길리안은 헛바람을 삼키며 검을 피했다. 분명 여유 있게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베어오는 검 날이 다시 눈앞.
길리안은 급히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아직도 코앞에 있는 검.
망설이지 않고 뒤로 몸을 굴려 일어나며 검을 뽑으려 했지만 그럴 틈을 주질 않았다.
찔러오는 검에 다시 이리저리 구를 뿐.
“목숨을 걸라하였네.”
그때부터 느껴지는 끔직한 살기.
숨이 턱 막히고 온몸에 털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
그의 검은 여전히 자신을 따라다녔다.
연신 바닥을 구르다 허리춤에 꽂혀있던 단검을 뽑아 검을 쳐내고 다시 한 번 구르며 단검을 던졌다.
그리고 몸을 일으키며 등 뒤에 매고 있던 검을 잡았다.
검을 손에 들자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나와 겨루고 나면 스스로의 능력과 위치를 알 수 있을 걸세. 물론 살아있다면.”
말과 동시에 검을 찔러오는 드겔.
길리안은 피하지 않고 검을 막으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앞에서 검이 두 개가 되고 막으려 하면 다시 세 개가 되고. 순식간에 십여 개로 늘어난 검을 막기 위해 검을 움직였다.
검을 휘두르기는커녕 막기 바빴고 반격은 생각도 못했다.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큰 공격도 아닌데 검끼리 부딪칠 때마다 손이 저렸다.
서로 갑옷을 입은 것도 아니라 까딱하면 치명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몸을 뒤로 뺄 수도 검을 휘둘러 거리를 벌릴 수도 없는 상황.
수십 번의 공격을 막던 길리안이 뒤로 한걸음 밀려났다.
드겔과 눈이 마주치자 이를 악물었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하고 깊은 눈. 그러면서도 번들거리는 눈빛.
본적이 있었다.
바로 사람을 죽일 때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해서 거울을 봤을 때 저런 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처음 한 말은 장난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이쪽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말 자신을 죽일 생각이라면.
‘그렇다면, 죽인다.’
기사들은 둘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가만히 서서 검을 움직이는 드겔.
이곳에 있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드겔이 누군가와 싸우는 모습을 처음 봤다.
이제는 수십 개로 늘어난 검의 잔상. 저렇게 빠른 검 놀림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방패가 없으면 막는 건 꿈도 못 꿀 공격.
그래서 길리안이 더 대단해 보였다.
전부 막는 것은 아니고 타이밍이 조금 늦어 옷이 베이고 살이 베여 조금씩 피가 배어나왔지만 꿋꿋하게 버티고 있었다.
“간신히 막을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인가?”
루퍼드의 물음에 로렌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둘에게 고정돼있었다.
루퍼드도 다시 둘에게 시선을 돌렸다.
드겔은 넘버즈들 사이에서 속칭 괴물로 통한다.
따지고 보면 한 번도 붙어본 적도 없는데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자연스레 그가 제일 강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건 직접 붙어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기 때문.
지금 보니 확실히 괴물은 괴물이었다.
길리안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을 것이다. 막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상황.
그래도 처음과 달리 조금씩 그 빠른 속도에 적응해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라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봤다.
만약 저것이 드겔이 최선을 다한 공격이라면 틈을 만들 수도 반격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반격을 못하는군.”
“아니.”
바로 들려오는 로렌스의 말에 그를 보니 그가 다시 말했다.
“변할 거다.”
길리안은 어깨를 찔러오는 공격을 막지 않고 바로 검을 내리 그었다.
서로 근거리에서 붙어서 공방을 하던 상황.
방어를 포기한 베기에 드겔이 뒤로 물러났다.
“제법.”
“목숨을 걸라 하시니.”
길리안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다시 검을 휘둘렀다.
“걸겠습니다.”
드겔은 그의 검을 가볍게 쳐내고 빠르게 찔렀다.
하지만 길리안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몸을 회전해 검을 휘둘렀다.
“허허.”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난 것은 드겔이었다.
길리안의 살기가 느껴졌다.
부상정도는 감수하겠다는 각오.
저쪽은 부상이지만 이쪽은 저 검을 맞으면 아무리 최고의 기사라고 해도 죽는다.
그래서 죽음을 각오하고 공격해오는 자는 무서운 법.
그런 이가 실력까지 겸비하고 있다면 더욱.
길리안이 바로 그런 상대였다.
하지만 그게 언제나 좋은 선택은 아니고 모두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길리안은 그런 식의 공방이 몇 번 반복되자 이상함을 느꼈다.
드겔은 바보가 아니다.
카스트로보다도 윗줄의 기사가 이런 공격에 대처 할 수 없다면 말이 안 되는 것.
그런데도 계속 같은 패턴을 반복 중이었다.
“이정도면 충분히 보여준 것 같으니.”
중얼거리듯 말한 드겔이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그 공격을 쳐내며 길리안은 역시나라고 생각했다.
드겔이 노리는 부위는 머리, 목, 가슴 등 베이고 찔리면 죽을 수 있는 곳이니 정말 같이 죽을 생각이 아니면 아까 같은 공격은 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공격부위가 급소 쪽이라 방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것과 반격도 하고 있다는 것.
하지만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고 길리안도 그에 맞춰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살기도 여전했고 절대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힘에 있어서 자신 있었던 길리안이지만 드겔도 만만치 않았다.
드겔의 검이 점점 빨라질수록 길리안의 방어도 빨라졌다.
아까는 막기도 버거웠던 그의 검이 조금 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갑작스럽게 빨라진 것이 아니라 조금씩 속도를 높여가기에 적응이 돼서 그런 것 같았다.
조금 적응이 되자 그가 어떻게 찌르고 어떻게 베고 어떤 식으로 검의 방향을 트는지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가르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내 착각인가?”
“아니. 아마 맞을 거다.”
로렌스의 대답에 루퍼드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느낀 이들은 이 자리에 몇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둘이 내뿜는 살기에 몸이 움찔 움찔 하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만큼 치열한 공방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도 느끼고 있는 것 같군.”
길리안을 말하는 것이다.
드겔과 길리안을 번갈아 보던 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괴물이 괴물을 키워내려는 건가?’
“좋은 검은 기사에겐 필수라네.”
알고 있다.
자신의 검은 군데군데 이빨이 나가있는 상황.
지금 쓰는 검도 절대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은 쪽에 속한다.
다만 드겔의 검이 더 좋고 그가 보통 기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 더 부딪치면 검이 부러질 수도 있다고 생각 한 그때, 자신의 검을 가르고 드겔의 검이 목에 닿았다.
검의 절반이 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고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에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졌습니다.”
“혹시 나에게 져서 실망하였는가?”
“아닙니다.”
“경은 강하네. 허나 아무리 목숨을 건 실전을 겪었다고 해도 강자와의 대결은 또 다르네.”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 중에 제일 강한 상대는 오우거였다.
하지만 인간의 강자는 그것과는 또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엘런이나 카스트로 외에는 그만한 강자와 붙어본 적도 별로 없었다.
“카스트로 경과 비슷하거나 조금 윗줄의 기사는 왕국에 수십이네. 경은 그들과 좋은 승부를 할 수 있을 테고 죽일 수도 있을 것이네. 하지만 나와 비슷한 기사를 만나면 다르네.”
맞는 말이었다.
“나와 비슷한 이는 왕국에 서너 명 정도 될 것이다. 주변 왕국을 합치면 그 수는 수십이 넘네. 나와 비슷한 급의 기사와 싸워서 어쩌면 죽일 수도 있을 것이네. 허나 경도 죽을 것이네.”
부정 할 수가 없었다.
“경은 확실히 더 빨라질 수 있고 더 강해질 수 있네. 스스로가 만든 한계에서 벗어나게.”
“감사합니다. 노력 하겠습니다.”
“내일부터 시간이 나면 나를 찾아오게 귀찮게 해도 좋네.”
그러면서 루퍼드와 로렌스를 보며 말했다.
“경들도 마찬가지네.”
둘이 고개를 숙여 보이자 드겔이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을 보며 말했다.
“경들이 오늘의 대결을 보고 뭔가를 느꼈으면 하네. 얼마 후면 정말로 전장에 설 날이 올 것이네. 그때까지 마음을 다지고 검을 닦아놓게. 경들이 기사임을 증명하는 순간이 올 때를 대비하란 말이네.”
그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드겔이 왕을 보며 말했다.
“어찌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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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어찌 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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