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2장(5)
“이런, 정말 집무실에 있었구나.”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하는 로렌스를 보고 루퍼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일하고 있는 게 이상한 건가?”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의외이기는 하지.”
“왜?”
“내일 중요한 결투가 있는데 집무실에서 서류나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그게 내일이었나?”
그런 루퍼드를 보며 피식 웃은 로렌스가 말했다.
“볼란트가 이를 갈고 있다던데 조금은 신경 써야 하는 거 아닐까?”
“따로 준비해야 할 만큼 수련을 게을리 한 적은 없어.”
“자신 있다는 말이로군.”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너도 별 준비를 안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닌가? 누가 들으면 나만 결투를 하는 줄 알겠어.”
“하하, 뭐 나도 너와 같은 이유에서랄까?”
말을 하며 소파에 앉는 로렌스를 보며 루퍼드가 말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집으로 가는 거냐?”
“어?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였나?”
로렌스의 물음에 루퍼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널 찾으면 항상 집에 갔다는 말을 들어서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니, 그런 건 아냐.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나 할 이야기가 많아서일 뿐.”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그런데 오늘은 웬일로 날 찾아왔지? 집에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왠지 비꼬는 거로 들리는데···.”
“그런 의도는 없어. 부모님을 뵌 게 오랜만일 테니까 하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 좀 예민한 거 같구나.”
루퍼드의 말에 피식 웃은 로렌스가 말했다.
“그런가? 뭐 그럴지도 모르겠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니면 내일 결투 때문인가?”
“그건 아니야. 그냥 기분이 조금, 음··· 나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돌아가서 쉬어라.”
“아니, 괜찮아. 몇 번이나 날 찾은 이유나 들어보지. 그래서 온 거니까.”
“이유가 그거였다면 엄청 빨리도 왔구나.”
루퍼드의 말에 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이런, 혹시 토라진 거냐?”
“지금까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만, 혹시 모르지. 네가 내일 결투에서 지면 그럴지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너무 여유 부리지마. 티란테도 널 꺾고 자신을 증명하려 할 테니까.”
“걱정만 고맙게 받도록 하지. 그보다 날 찾은 이유부터 말해봐.”
로렌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퍼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주회의가 끝나기 전에 쥐들을 사냥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 도움이 필요한가 보군.”
“아니, 네 힘을 빌리려는 게 아니야. 단지 의논이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저 의논이 필요한 거면 다른 녀석들도 있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미네르바나 드레드는 결투 준비로 바쁘고 길리안은 마탑에 들어가서 나오질 않아. 그래도 넌 여유가 있으니 집에 들락거린 걸 테니까.”
“뭐, 네 말대로 여유는 있지. 쥐를 잡기 위한 덫을 놓기에 좋은 상황이기는 하지만, 쉽게 움직일까?”
“덫을 놔서 잡겠다는 게 아니야. 소굴을 찾아서 완벽하게 소탕하는 게 목적이지.”
“오?”
“아직 확실히 파악된 건 아니지만 며칠 내로 대략적인 위치는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거 잘됐군.”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문제는 내 나름대로는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계획을 짜는 중인데 확신이 서질 않아. 어차피 나중에 다 모아놓고 의견을 들어볼 생각이긴 하지만, 그 전에 네 생각을 좀 들어보고 싶다.”
“녀석들의 위치는 어떻게 파악한 거지?”
“영주들과 그 기사들에게 공격받은 위치와 숫자를 물어보고 있어. 그걸 종합해보면 대략적인 활동 반경과 수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음.”
“지도에 일일이 표시를 해보니 중첩되는 부분이 많아. 그 근방을 조사하면 뭔가 나오겠지. 아무래도 흔적을 다 지우지는 못했을 테니까.”
“그렇겠지. 그런데 그보다 좋은 방법이 있다.”
“응? 어떤 방법?”
“직접 물어보는 건 어때? 쉽게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뭐? 직접? 설마···.”
놀란 표정으로 로렌스를 보던 루퍼드가 다시 말했다.
“찾은 거냐? 놈들을?”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어떻게? 아니 누구냐?”
궁금한 듯 묻는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재차 독촉하고 나서야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냥은 말해 줄 수 없고, 술을 준다면 말해주지.”
“술? 아무리 자신이 있다고 해도 결투 전날 술은 좀···.”
“어차피 네게는 말을 하려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막상 말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말이지. 그보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가 보구나.”
“공짜로는 안 된다는 거군.”
잠시 로렌스를 보던 루퍼드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 서랍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혹시 내가 좋은 술을 입수했다고 말했던가?”
“아니.”
“그럼 내 생각도 읽히고 있나 보군.”
“그럴 리가.”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 녀석을 손에 넣은 걸 모르면서 술을 달라는 거였나?”
손에 술병 하나를 들고 웃어 보이는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딱히 그런 고급술을 원한 건 아니었다만.”
“뭐 그렇다면···.”
다시 서랍에 넣으려는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가 말했다.
“꺼냈으면 가져와야지. 드레곤의 숨결이라···. 오늘 내가 운이 좋구나.”
“아~ 아깝지만 어쩔 수 없군.”
술병과 잔을 두 개 들고 온 루퍼드가 로렌스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나중에 장난이라고 하면 가만 안 둔다.”
“이런 일로 장난을 치진 않아.”
“그럼 다행이고. 이걸 다 마시면 어쩌면 내일 둘 다 못 일어날지도 몰라.”
“그것도 나쁘지 않군.”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는 로렌스를 보며 루퍼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너희 집안이 관계된 건가? 아니면 가까운 사람이라도···.”
“글쎄.”
빈 잔을 들고 어서 술을 따르라는 듯 쳐다보는 로렌스에게 루퍼드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기 힘들면 하지 마라.”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다. 알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 하지만 네가 술기운을 빌어 말해야 할 정도라면 나도 듣기가 겁이 나니까.”
“지금이 아니면 말 못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어.”
“날 생각해주는 건가?”
“그렇다고 해두지.”
그런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가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주는 건 고마워. 하지만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겠지.”
로렌스가 말하는 동안 루퍼드가 빈 잔을 채웠다.
그가 술병을 내려놓기도 전에 로렌스가 잔을 들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 와우.”
그런 로렌스를 보고 피식 웃은 루퍼드가 역시나 술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크윽. 후~ 정말 입에서 브레스가 나올 것 같군.”
이번엔 로렌스가 술병을 들고 잔을 채웠다.
그렇게 한동안 찬을 채우고 술을 마시기만 했다.
다시 술병을 들고 로렌스가 잔을 채우려고 하자 루퍼드가 술병을 잡고 말했다.
“정말 다 마실 생각이냐?”
“술은 마시라고 있는 거니까.”
“술이 목적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루퍼드의 말에 쓰게 웃은 로렌스가 말했다.
“딱 한 잔만 더.”
그 말에 루퍼드가 술병을 놓아주자 로렌스가 잔을 채웠다.
그리고 술잔을 들고 한동안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힘들면 굳이 말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
“하아~ 예전에 내가 말한 적이 있을 거다. 저쪽에서 내 능력을 알고 이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랬지. 그래서 날 의심하기도 했었고.”
루퍼드의 대답에 로렌스가 고개를 한번 끄덕하고 말했다.
“나에게 이런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살아있는 사람은 부모님을 제외하면 네가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어릴 때 그걸 알던 사람들은 아버지가 모두 죽였고 커서 날 이상하게 생각하며 의심하는 자들은 내가 죽였다.”
“음.”
“난 처음부터 정의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기사의 자격도 없다고 봐야겠지.”
“로렌스 취한 거냐?”
“아니.”
라고 대답한 로렌스가 들고 있던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후우~ 이거 정말 죽이는군.”
그러면서 또 술을 따르려는 로렌스의 팔을 루퍼드가 잡았다.
“그만 마셔라.”
“이제부터가 중요한 이야기야.”
그 말에 루퍼드가 로렌스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독한 술을 연거푸 마시긴 했어도 이 정도로 취할 정도로 약한 녀석이 아닌데, 평소와는 다르게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딱 한 잔만이다.”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퍼드가 한숨을 내쉬며 팔을 놓아줬다.
술잔을 든 로렌스가 잔에 담긴 술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부모님과 너 말고도 내 존재를 아는 자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게 누구냐?”
대답 대신 술을 입안에 털어 넣은 로렌스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이 저주받은 눈을 물려준 자.”
말을 마치고 술병을 집어 빈 잔을 채우는 로렌스를 루퍼드는 말리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는 루퍼드를 힐끔 본 로렌스가 말했다.
“쉽게 말하면 지그먼트 백작 가의 피가 내 몸엔 흐르지 않는다는 거다.”
루퍼드는 아무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자신의 빈 술잔을 다시 채운 루퍼드가 로렌스의 잔도 채워줬다.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술을 마시기만 했다.
“음, 언제 알게 된 거냐.”
루퍼드의 물음에 로렌스가 술을 삼키고 답했다.
“크으, 어릴 때. 아마 10살이 되기 전이었을 거다. 그자가 누군지 확실히 알게 된 건 며칠 전이고.”
“음.”
“지금까지는 그자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았다. 아마 이런 일들이 없었다면 평생 그렇게 살았을지도 몰라.”
“왕국에 일어나는 일과 관계가 있다고 확신하나 보군.”
“어. 내가 마음만 먹으면 누군가의 약점을 잡아서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거나 욕망을 끌어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귀족기사단 같은 조직을 만들거나 마탑주를 이용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그러니 나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
“그건 음, 그렇겠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누군지는 물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할 건지 물어보는군.”
“그게 더 중요하니까.”
“음?”
“내 입장을 솔직히 말하마.”
루퍼드의 말에 로렌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 지금 네 심정이 어떤지 솔직히 나는 모두 이해하기 힘들어. 그래서 어쭙잖은 위로를 할 생각은 없어.”
“그런 건 나도 바라지 않아.”
“네가 이런 힘든 얘기를 꺼냈다는 건 날 믿고 또 날 친구로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그러니 나도 지금은 네 친구일 뿐이야. 지금 내게는 그자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그보다는 네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궁금할 뿐.”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 그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해도 너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네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야. 네 위치에서 네가 해야 할 일들을 충분히 잘 해왔고 앞으로도 그러겠지. 그러면 된 거다.”
말을 멈춘 루퍼드가 아무 말도 없는 로렌스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네가 모든 걸 밝혀내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다는 거다. 지금 왕국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은 왕을 비롯한 왕국에 속한 모두가 함께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거다. 그러니 자책 같은 건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음.”
“자 한잔 하지.”
술잔을 내미는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가 피식 웃고는 잔을 들어 부딪쳤다.
“마시지 말라더니 이제는 권하는구나.”
“술은 마시라고 있는 거니까.”
그 말에 웃으며 술잔을 비웠다.
“으으. 단 내일 결투가 잘못돼도 술 핑계는 대지 마라.”
“그럴 리가. 더 취하기 전에 결론만 얘기하지.”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칼랜베르크다.”
로렌스의 말에 술을 따르려다 멈칫한 루퍼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잔을 채웠다.
“별로 놀라지 않는구나.”
“어차피 의심하던 상대였으니까. 그 정도면 됐다. 술이나 마시지.”
“정말 그 정도면 되는 거냐? 증거라고는 내 말밖에 없는데···.”
“넘버즈 로렌스의 말이라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와 술을 마저 마시는 거고 내일은 결투에서 이기는 거다. 그리고 그 후에 다른 넘버즈들과 적을 쳐내는 거지. 혼자서 다 떠안을 생각은 하지도 마라. 그렇게 두진 않을 테니까.”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로렌스를 보며 루퍼드가 다시 말했다.
“그보다 네 숙소에 있는 꼬마 아가씨는 누구지? 난 그게 더 궁금하더라.”
“소중한 손님이라고 해야 할까?”
“음?”
“내가 모르고 있던, 아니 잊고 있던 것을 가르쳐준 소중한 존재지.”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군.”
“얘기하자면 길다.”
그 말에 루퍼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얘기해 봐라. 어차피 밤은 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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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너무 바빠서...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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