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0장(8)
“길리안 괜찮아?”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묻는 미네르바에게 길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영광의 갑옷의 방어력은 대단하다고 할 만했다.
드겔이 전력으로 찌른 검에 작은 흠집만 났을 정도였고 그마저도 스스로 복구되는 놀라운 광경을 봤다.
하지만 슐레만은 마법 왕이라 불리는 에스토의 14대 국왕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영광의 갑옷을 미완성인 반쪽짜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저것 작동하지 않는 기능은 둘째 치고 마지막에 길리안이 갑옷을 벗으려 했을 때 벗겨지지 않아서였다.
입을 때는 입기 편하게 자동으로 들려지고 착용자의 체형에 맞게 변형이 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벗을 때는 그렇지가 못했다.
결국, 넘버즈들이 달려들어서 흉갑부분을 뜯어내고 나서야 길리안이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괜찮다면서 표정이 왜 그래?”
미네르바의 물음에 길리안은 그저 웃어 보였다.
사실은 갑옷에 대한 것보다 드겔이 공격해 올 때가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얼마 전 검을 맞대보았던 그와는 달랐다.
그때는 드겔이 한 수 접고 상대해 줬다는 건 자신도 알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막거나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공격이었고, 그때 배운 것도 많았다.
그때와는 달리 조금 전의 공격은 갑옷을 뚫고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검에 담은 듯했고 전력을 다한 그의 일격을 마주하며 느낀 것은 두려움이었다.
‘저걸 맞으면 죽는다.’
‘피해야 한다.’
라는 생각.
생각 이전에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었다.
지금까지는 정말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나 그랬었고, 라이라프산맥에서도 몬스터와의 싸움에 익숙해지고 나서부터는 별로 느껴보지 못했었다.
단지 갑옷의 방어력을 확인하는 차원이었고, 급소도 아닌 곳을 공격당하면서 그런 느낌이 들 줄은 몰랐었으니까.
물론 그 공격을 피하지 않고 받아냈고 드겔의 검은 갑옷을 뚫지 못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문제인지도 몰랐다.
실전이었다면 분명 피하거나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것이고, 드겔정도 되는 기사에게는 그게 틈이 될 수도 있었다.
아주 작은 틈도 보이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그 정도면 승패는 보나 마나.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은 길리안을 본 드겔이 말했다.
“그래서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오라고.”
그 말에 길리안이 씨익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때 슐레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잉 적당히 할 것이지, 누구를 죽이려고. 귀한 자료가 다 망가질 뻔하지 않았소?”
마법서에 박혀있는 쇳조각을 빼내며 하는 말.
쳐다보며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랜스 공격보다 강력한 공격을 원한 것은 탑주가 아니시오?”
“정말 그만한 위력이 있긴 한 것이오? 일부러 검을 부순 것이 아니고?”
“검이 버티지 못하니 부서진 것이지. 정 못 믿겠으면 탑주가 한번 받아보시겠소?”
티격태격하는 둘을 보던 에런 왕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만, 그만. 젊은 사람들이 보는데 체통을 좀 지키시오. 그보다 탑주. 정말 쓸 수는 있는 것이오?”
“영광의 갑옷이 다시 세상에 나온 것을 알게 되면 은퇴했던 늙은이들이 다시 일선에 복귀할 겁니다. 그들과 힘을 합치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겁니다.”
“다행이군. 내 탑주와 마탑을 믿겠소. 최대한 빨리 완성을 시키시오.”
“예. 맡겨주십시오.”
“똑같은 갑옷은 얼마나 만들 수 있겠소?”
“마법 주문식만 새긴다고 마구 찍어낼 수 있는 갑옷이 아닙니다. 비슷하게라면 넘버즈들이 입을 수 있을 정도는 가능할 것 같지만, 그것도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안에 쓸만한 재료가 더 남아있다면 모르지만···.”
“다른 곳도 둘러볼 것이니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모두 내어줄 테니. 시간이 오래 지체되었군.”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걸음을 옮기자 모두가 뒤를 따랐다.
그렇게 시작된 왕가의 무덤 탐방.
에런 왕은 석실을 옮길 때마다 간단하게 설명을 해줬고 모두가 그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가장 신나고 바쁜 것은 역시나 슐레만이었다.
“혹시 도굴이라도 당한 겁니까?”
“무슨 말이오?”
“그게, 제가 알기론 왕가의 무덤은 다르게 말하면 왕가의 보고일 텐데 생각보다 쓸만한 것이 보이지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특히 값나가는 보석이나 금붙이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 신기해서···.”
슐레만의 말에 에런 왕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음···. 증조부이신 타노스 3세께서 당시 왕실의 재정이 좋지 못해서 조금 사용하셨다는 기록이 있다오. 거기에 선왕께서 영광의 갑옷을 만드신다고 필요한 것을 가져다 쓰셨을 테니 남은 것이 별로 없을 수밖에.”
잠시 놀란 눈으로 에런 왕을 보던 슐레만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거로 봐서는 웃음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왕의 앞이라 대놓고 웃을 수는 없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에런 왕은 인상만 찌푸릴 뿐 나무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증조부께서 많은 일을 해주신 덕을 내가 보고 있으니 원망스럽지는 않다오. 조금은 아쉽지만, 아직 재정적으로 문제는 없으니···.”
“왕께서 생각하고 계신 것을 모두 하려면 지금 있는 돈은 금방 사라질 겝니다.”
슐레만의 말에 에런 왕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이지. 어찌 왕이라 하여 하고픈 일을 모두 하겠소. 정말 필요한 것부터 차근차근해나가는 수밖에.”
어차피 이곳에 들어온 이유도 보물보다는 넘버즈들에게 쓸만한 무기를 주기 위함이었으니까.
그걸 조금 전에 드겔의 검이 산산 조각나는 것을 보며 다시 느꼈고, 다른 넘버즈들도 어지간한 무기로 제힘을 발휘하기 힘들어 보였다.
“재정문제라면 기사 회의에서 좋은 의견이 나올 겁니다.”
로렌스의 말에 에런 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겠군.”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석실의 문을 열었다.
“이곳은 왕국의 9대 왕께서 잠드신 곳이지. 기록에 보면 검을 모으는 것이 유일한 낙이셨다고 하니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
그리고 왕이 잠든 석실마다 딸려있는 또 다른 밀실을 열었다.
모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십 자루의 검.
“자 다들 마음에 드는 검이 있으면 골라보시게.”
그 말에 넘버즈들이 눈을 빛내며 검을 한 자루씩 집어 들었다.
그들의 틈에 끼어있는 슐레만에게 에런 왕이 말했다.
“탑주는 뭐하시오?”
“아, 저는 재료를 찾고 있습니다. 영광의 갑옷과 비슷하게라도 만들려면 부족한 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마법 검이라도 있다면 알아볼 수 있지요. 혹시 넘버즈들이 고르고 나면 남은 것은 이곳에 남겨두시렵니까?”
“아니요.”
에런 왕의 대답에 미소를 지은 슐레만이 중얼거리듯 주문을 외워가며 검을 살폈다.
그중에는 희미한 빛을 발하며 마법 식이 드러나는 것들도 있었다. 그에 대한 설명을 해주던 슐레만이 평범해 보이는 검을 살펴보다가 드겔을 부르고 그에게 던졌다.
“페리움이라는 금속에 강화 주문이 걸린 나름 마법 검이오. 그거라면 부러지거나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니 경에게 어울릴 것이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잡고 몇 번 휘둘러본 드겔이 말했다.
“괜찮군. 그럼 어디.”
그러면서 검을 검집에 넣고 손잡이와 검 끝부분을 잡고 힘을 줬다.
핏줄이 툭툭 붉어져 나왔지만 조금도 휘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악력에 겁 집만 망가졌을 뿐.
그걸 루퍼드에게 건네니 그가 확인하고 그 검이 다시 로렌스에게 건너가고 드레드와 길리안이 시험할 때는 조금 휘어서 다들 숨을 죽였지만 버텨냈다.
길리안이 검을 미네르바에게 건네자 그녀가 피식 웃으며 드겔에게 검을 던졌다.
“이 둘이 어쩌지 못한 검이라면 절대 부러지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굳이 좋은 검이 필요 없네. 경들은 이 검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라는 드겔의 말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런 넘버즈들을 본 드겔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쓰도록 하지.”
“검의 이름이 잿빛의 검이니, 잿빛 기사 드겔에게 딱 맞는 검이로군.”
슐레만의 말에 드겔이 인상을 찌푸리다 피식 웃었다.
아주 오랜만엔 들어보는 자신의 별명.
젊은 넘버즈들도 들어보지 못했는지 궁금한 눈으로 슐레만을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넘버즈들에게 드겔이 말했다.
“조금 젊었을 때 날 그리 불렀지. 넘버즈는 됐는데 딱히 붙여줄 별명이 없었는지 그리 부르더군. 별 뜻은 없지만 난 그 별명을 싫어한다네.”
드겔의 말에 넘버즈들은 그냥 고개만 끄덕하고 말았다.
그가 싫다는데 굳이 그렇게 부를 이유도 없었고 이미 넘버즈들 사이에서는 다르게 불리고 있었으니까.
“아, 나는 경들이 날 괴물이라고 부르는 것도 별로라네. 보통 기사들에게 괴물이라 불리는 경들이 날 그렇게 부를 정도로 나는 강하지 않네. 경들 모두가 마음만 먹으면 날 넘어서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네. 그보다 욕심을 조금 부리게. 이런 기회를 얻은 넘버즈들은 경들이 처음일 테니.”
그 말에 넘버즈들이 웃으며 검을 집어 들었다.
“이곳이 마지막이군.”
왕들이 잠든 석실들을 하나하나 거쳐 다다른 곳.
“이곳에 에스토의 왕 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는 것은 경들이 처음이라네.”
다들 영광이라고 말하자 에런 왕이 미소를 지으며 석실 문을 열었다.
모두가 예를 표하고 난 후에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건국 왕이 잠든 석관을 호위하듯 서 있는 10명의 기사였다.
“저들이 바로 최초의 넘버즈들이네. 건국 왕께서 서거하시고 남아있던 넘버즈들이 같이 묻힐 수는 없지만, 마지막까지 왕의 곁을 지키겠다고 그 무구를 바쳤지. 살아있을 때 조각을 하고 그 위에 갑옷을 입힌 것이니 실제와 똑같을 것이네.”
에런 왕의 말에 넘버즈들이 신기한 눈으로 넘버즈의 조각을 봤다.
석실 안에는 다른 갑옷과 무기도 많았다.
“다른 이들은 전장에서 죽어 그 무구만을 옮겨 놓은 것이지. 이들이 바로 왕국을 세운 일등공신들이네. 바로 넘버즈의 시작이지.”
건국 왕과 초대 넘버즈의 동상과 조각은 수도 곳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안에서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
“선대의 왕들께서도 이곳은 건드리지 않았네. 그만큼 특별한 곳이기도 하지. 하지만.”
말을 멈춘 에런 왕이 석실을 다시 둘러보고 말했다.
“난 이곳에 있는 무구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려 한다네. 죽어서도 왕국을 지키겠다고 하신 건국 왕께서도 이해해 주시겠지. 그리고 왕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운 기사들이라면 그 무구가 이곳에 잠들어 있기만을 바라지는 않을 테지.”
“음···.”
넘버즈들은 말없이 에런 왕을 쳐다보기만 했다.
“내가 고집스럽게 지켜온 평화가 왕국을 약하게 하고 또 병들게 한 것 같아서 안타깝네. 지금의 상황은 나에겐 왕국과 왕가가 나의 대를 넘어서 이어지느냐 아니면 나의 대에서 끝나느냐의 문제네. 난 그만큼 지금의 상황을 위기로 보고 있다네.”
“결코, 왕국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루퍼드의 말에 에런 왕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러길 바란다네. 이곳에 있는 갑옷은 쓰지 못하겠지. 하지만 무기는 다르네. 비록 지금의 무기와 달리 투박하지만, 과거에 전설을 만들어낸 것들이네. 특히 미네르바 경과 길리안 경에게는 딱 어울리는 무기도 있고.”
에런 왕이 놀라 눈을 크게 뜬 둘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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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각자 얻은 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따로 나올 겁니다.
며칠 푹 쉬었습니다.
그래봐야 일하고 조금 일찍 잔거지만요.
제 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플롯하고 스토리 한번 점검한 거 빼면 정말 한글자도 안 쓰고 쉬었네요.
나름 충전했으니 다시 달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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