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3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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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위에 정렬한 나팔수들.
그들의 나팔소리에 미네르바가 기사와 병사들을 정렬시켰다.
왕의 행차를 알리는 나팔소리.
광장의 모여 있던 이들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미네르바는 드디어 왕이 모습을 보이는구나 하는 생각에 성벽 위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근위대 병사들과 기사들.
열을 맞춰 나오는 그들의 뒤에 말을 탄 왕의 모습이 보였다.
미네르바는 깜짝 놀라서 말에서 내려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솔직히 성벽에 올라 한마디 할 줄 알았지 이렇게 밖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직접 말을 타고 나올 줄은 더더욱.
거기에 갑옷도 입지 않고 있었다.
바깥출입이 거의 없지만 왕도 밖에 나올 때가 있었고 그때마다 마차를 탔다. 신변의 안전을 많이 챙기는 왕이기에 이런 모습은 이례적이었다.
“미네르바 경.”
“예. 폐하.”
“그 폐하라는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라. 다른 기사들에게도 전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경이 고생이 많네.”
“별말씀을.”
“그리고 이자들은 반역죄로 다스릴 것이니 어떻게 해도 좋네. 죽이지만 말고 잡아오라.”
미네르바는 왕이 건네는 것을 받았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너무 그리 보지 말라.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것이니.”
그렇게 말하며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가는 왕을 보고 미네르바는 웃으며 말위에 올랐다.
“경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검도 없는 맨몸으로 사람들 앞에 늘어서있는 수많은 기사들.
그들은 검을 반납하고 간 기사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왕을 맞았다.
왕의 물음에 한 기사가 답했다.
“폐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왕이 고개를 들고 모두를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 나를 폐하라 칭하지 말라. 또 왕실 기사들은 내일 정오까지 모두 왕성으로 들라.”
큰 소리로 말한 왕이 다시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그대들도 포함이다. 예외는 없다.”
그 말에 기사들이 한목소리로 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왕이 모여 있는 백성들을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내 그동안 너희를 돌보는 것에 소홀했음을 인정한다. 너희의 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려 이리 나왔노라.”
그 말에 사람들이 환호를 했다.
왕이 손을 들자 환성이 잦아지고 조용해졌다.
“그래. 이렇게 많이 모여 나를 원망하는 대는 이유가 있을 터. 내 이렇게 나온 김에 너희의 말을 좀 들어보려 한다. 그러니 어디한번 말해보라.”
“세금이 너무 많습니다.”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자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쳤고 금세 소란스러워졌다.
왕이 손을 들자 다시금 조용해졌다.
“세금이 많다? 세율이 높다는 말이더냐?”
“그보다는 가지 수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세금을 걷어가고 냈는데도 또 걷어갑니다.”
“맞습니다.”
여기저기서 세금에 대한 말이 터져 나오자 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
백성들에게 말을 한 왕이 손짓을 했다.
“내무대신 이 무슨 말이오? 낸 세금을 또 걷는다니? 그리고 내가 모르는 세금도 있소만?”
“그, 그것이 아마 잘 모르고 하는 소리일 겁니다.”
그 말을 들은 몇 명이 아니라고 큰 소리를 쳤다.
“아니라잖소.”
“아마도 일선에서 일하는 자들의 착오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기에는 너무 많지 않소?”
“제가 다시 알아보겠습니다.”
“됐소. 내 직접 알아볼 터이니.”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백성들을 향해 말했다.
“세금에 관한 것은 내 다시 살펴볼 것이다. 너희의 말이 맞으면 중복으로 낸 것은 돌려주거나 앞으로 낼 세금에서 제하여 줄 것이니 그리 알라.”
와아아아아~
왕은 사람들의 환성에 기분이 좋기보다는 씁쓸함을 느꼈다.
그들의 환성이 잦아들자 왕이 다시 말했다.
“그래 세금에 관한 것 말고 또 있는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억울해도 하소연 할 곳이 없습니다.”
“귀족을 고소해도 재판이 열리질 않습니다.”
“귀족 대리인을 세울 돈이 없어 재판을 못 받습니다.”
“재판을 해도 이기질 못합니다.”
“재판에 돈이 너무 많이 듭니다.”
“아아. 그만! 법무대신. 이 무슨 말이오?”
“저기 그것이···.”
“내 귀족 대리인을 세워야 된다는 법이 있는 줄은 몰랐소만?”
“그것이 일종의 관례로···.”
“관례? 내가 모르는 관례란 것이 무엇이오? 그보다 그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니오?”
“그, 그것이···.”
“됐소. 내 나중에 자세히 들어보리다.”
그리고 백성들을 보며 말했다.
“내 법에 대한 것도 다시 살펴볼 것이다. 또···.”
왕의 물음은 계속 됐고 그만큼 모인 백성들의 말도 많았다.
일하고 싶어도 일이 없다, 치료받을 곳이 없다, 기사의 횡포가 심하다, 귀족들의 기사나 병사들에게 당한 일 등등.
끝없이 나오는 말에 에런 왕은 고개를 저었다.
“자자 그만. 그만!”
백성들이 입을 다물자 왕이 다시 말했다.
“내 오늘 모든 얘기를 듣고 모든 것을 들어주기는 힘들 것 같구나. 허나 그만큼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 지금부터라도 모든 것을 돌아보고 다시 정비할 것이다.”
다시 터져 나오는 환호.
“그리고 앞으로 종종 너희의 말을 듣고 살펴볼 것이니 오늘은 이만 하도록 하자.”
“언제입니까?”
“언제 또 나오십니까?”
라는 물음에 왕이 웃으며 말했다.
“내 언제라고 말은 못하겠으나 너희의 말을 들을 창구를 마련하고 더 좋은 방법을 모색해 보겠다. 내가 너희의 왕이다. 내가 그리 할 것이고 그리 될 것이다. 그러니 이제 다들 돌아가 생계를 돌보라. 나도 잠을 자야 일을 할 것이 아닌가?”
와하하하하.
사람들이 웃자 왕도 웃으며 손을 들었다.
“내가 다시 이곳을 지날 때는 평소처럼 한산했으면 좋겠구나.”
“어디를 가십니까?”
큰 목소리로 묻는 말에 왕이 웃으며 말했다.
“자식을 돌보지 않는 다고 어미가 집을 나가 찾으러 가는 길이다. 너희는 좋은 어미, 훌륭한 왕비를 두었다.”
“훌륭한 기사도 두셨습니다.”
들려오는 말에 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리고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경들도 그만 일어나 나를 따르라.”
그리고 말머리를 돌리는 왕을 향해 수많은 이들이 환호를 했다.
왕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음?”
미네르바는 저택에 들어서며 이상함에 주변을 둘러봤다.
입구를 지키고 있을 병사나 기사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있었다.
부상에 신음하거나 기절한 자들.
그래도 죽은 자들은 없어보였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수가 많아졌다.
그리고 저택의 문을 열자 한사람이 보였다.
“늦었구나. 미네르바.”
“로렌스? 네가 이런 건가?”
“아마도.”
“음. 폐, 아니 왕께서 따로 명이라도 내린 건가?”
“그럴 리가.”
“그러면?”
“그냥두면 어차피 다른 일을 꾸밀 자들이다. 그러니 손을 쓸 수밖에. 그보다 네가 왔다는 건···.”
“그래. 왕께서 움직이셨다. 왕은 왕이란 생각이 들더군.”
“오~ 그랬나?”
“그보다 어떻게 안거야? 너나 루퍼드나 나만 쏙 빼놓고 말이지.”
“믿을만한 정보원이 생겼거든. 그나저나 다행이군. 복잡하게 처리할 필요가 없어졌으니.”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부터는 조금 바빠지려나?”
“아마도.”
그렇게 대답하는 미네르바를 보며 웃은 로렌스가 걸음을 옮겼다.
“뒤를 부탁하지.”
“어딜 가는데?”
“왕께. 좀 보고 싶거든. 얼마나 어떻게 변하셨는지.”
“그런데 정작 잡아야 할 자는 어디 있지?”
“방에 묶어뒀다. 식구들도 함께. 그 정도 센스는 있거든.”
미네르바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는 로렌스를 보며 피식 웃고는 기사와 병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로렌스처럼 자신도 가보고 싶지만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야 우린 왜 숨어있는 거냐?”
그렉의 물음에 케빈이 길리안을 가리켰다.
“길리안이 왜?”
“야이. 후우~ 여기 쟤 얼굴 모른 사람이 있냐? 나가봐라 난리나지.”
“아~.”
수긍한 것 같던 그렉이 다시 말했다.
“야 그럼 변장하면 되잖아. 좀 가리면 사람도 많은데 알겠냐?”
그 말에 케빈이 다시 길리안을 가리켰다.
“쟤가 왜?”
“야이. 저게 변장으로 될 거냐? 검은 무식하게 뭘 저렇게 큰 걸 들고 와서. 에이.”
“이러고 있으니까 우리가 뭔가 되게 나쁜 짓 하러 온 것 같아.”
“우리라고 하지 마. 네 생각이 나빠서 그런 거다 자식아. 좀 조용히 있어라.”
지금 네 명이 사이좋게 몸을 숨기고 있는 상황.
어떤 결과가 날지 보러 온 거지만 막상 와서 생각해보니 대놓고 얼굴비추기가 뭐해서 이러고 있는 것.
그렉의 입을 다물게 한 케빈이 카미르를 봤다.
길리안 핑계를 댔지만 카미르 때문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녀석의 얼굴을 알아볼 만한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아직 모두에게 말도 안했는데 왕자인 게 탄로 나면 그건 그거대로 곤란한 상황.
‘그나저나.’
상황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은 자기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있고 몇몇은 막사 앞에서 왕비에게 뭔가 말하고 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는 상황. 처음에 왕비의 말을 따르지 않은 저들은 이도저도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인데 안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왕비의 행동을 보니 수가 너무 뻔히 보인 달까?
자신이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편이지만 어느 정도 머리만 되고 지금 상황만 알고 있다면 왕비의 의도도 보일 것이다.
거기에 구경꾼도 많다.
정말 왕이 움직이지 않으면 왕비는 망신만 당하고 이 나라를 떠야 할지도 몰랐다.
케빈은 옆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카미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녀석은 이 상황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터였다. 왕비에게 자료를 넘기고 길리안의 이야기를 한 것이 카미르니까.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길리안을 살펴보니.
‘얼레?’
길리안은 앞이 아니고 뒤를 보고 있었다.
“야 길리안. 왜 그러냐?”
“뒤에 뭔가 있어.”
“뭐가?”
“모르지. 동물은 아닐 거 같고···.”
그 말에 모두 뒤를 돌아봤지만 보이는 것은 무성하게 자란 풀이요, 듬성듬성 보이는 나무들 뿐.
보이는 것도 없고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그러다 카미르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들인 것 같았으니까.
혼자 있을 때는 몰라도 친구들과 있을 때는 멀리 떨어져 있어 달라 말해서 그나마 좀 자유로웠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몰라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몸을 숨기고 있을 수밖에.
혹시라도 길리안이 그들과 부딪치면?
그때 풀이 움직이며 뭔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길리안이 검에 손을 댔고 다른 이들도 그랬다.
“이거 경의 감각은 속일 수가 없군.”
풀숲에서 얼굴을 삐죽 내민 의 첫마디였다.
“누구십니까?”
길리안의 말에 그가 웃으며 다가왔다.
“난 아이작이라 하네. 혹시 들어보셨는가?”
아이작이라는 이름에 길리안은 한명을 떠올렸다.
“넘버즈 이십니까?”
“아마도 그럴 것이네.”
넘버즈 No.8 아이작 폰 보르시아.
몇 년 동안 칼랜베르크에서 프란트 왕자를 호위하다 같이 복귀한 넘버즈의 일인.
아이작이 다른 이들도 한번씩 보고는 자연스럽게 길리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경과 같은 이유일까? 한심한 것들 같으니. 몇 년 떠나있는 동안 나라가 개판이 됐어. 그래도 다행일세. 경 같은 기사가 있어서.”
“전 한 것이 없습니다.”
“뭐든 시작이 어려운걸세. 그보다 언제 올라올 생각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넘버즈에 말일세.”
“전 아직 자격도 부여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경 같은 기사에게 자격부여라니 웃기는 말이로군. 기사단 하나를 혼자 상대하는 기사가 어디 흔하던가? 나도 자신이 없네만.”
“그건···.”
“설마 운이 좋았다고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데 친구들인가?”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작이 웃으며 말했다.
“아카데미 친구가 평생 간다는 말이 있지. 좋은 친구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하시게.”
“네. 제겐 소중한 친구들입니다.”
“그렇군.”
그러면서 카미르를 보고 윙크를 했다.
“야 케빈.”
“왜?”
“방금 넘버즈 기사님이 나한테 윙크를 했어.”
그렉의 말에 케빈이 그의 뒤통수를 날렸다.
“시끄러.”
“정말이라니까? 내가 마음에 드나봐.”
“그래 잘해봐라.”
그때 멀리서 나팔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카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폐하다. 폐하가 오신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이번 사건이 길어지는 이유는 나름 큰 전환점이라.
진행은 느려도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본격 거북이 진행 판타지 넘버즈!
다음 편은?
써야죠. 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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