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4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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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란은 길리안의 몸이 순간적으로 옆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피하면서 충분히 관찰했다고 생각했다.
회전을 하면서 공격을 해야 하니 당연히 이동을 하기는 한다. 루프란이 물러나는 만큼 길리안도 거리를 좁혀왔으니까.
그래서 그의 발을 자세히 관찰했었다.
길리안의 공격법의 핵심은 중심을 잡는 것이라고 봐도 과언은 아니었다.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중심이 흐트러지면 회전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스스로 자멸하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스텝도 상당히 중요했다.
회전하며 발이 꼬이지 않아야 하고, 이동하며 회전력까지 감당해야 했으니까.
방금처럼 이동하려면 회전축이 갑자기 이동해야 한다.
그러면 회전력을 감당할 수가 없어야 정상일 텐데, 그런 상식을 무시하고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길리안의 검이 덮쳐오고 있었다.
루프란은 막기보다 피하는 것을 택했다.
앞으로 굴러 검을 피하고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뒤통수에 느껴지는 섬뜩함에 다시 몸을 굴렸다.
그렇게 네 번을 더 굴려서야 길리안의 공격권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이런 괴물 같은 녀석.’
또다시 베어오는 검에 살짝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갑자기 검이 쭉 길어지는 느낌에 급히 방패를 들었다.
쾅!
“크윽!”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힘에 밀려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방패로 막았던 검이 다시 한 바퀴 돌아 베어오고 있었으니까.
이번에는 몸을 뒤로 굴렸다.
기사 지망생을 상대로 자신이 이렇게 바닥을 굴러다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재차 베어오는 길리안의 검을 피하며 그의 손을 보고 쓰게 웃었다.
검신의 길이는 대략2미터쯤. 그리고 팔의 길이를 더한 만큼이 길리안의 공격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바로 손잡이의 길이었다.
50Cm는 되어 보이는 검 손잡이.
갑자기 검이 늘어나는 것 같았던 느낌을 받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길리안이 공격하는 순간 그 검의 손잡이 끝부분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도 그 사정권과 공격패턴에 익숙해져 하마타면 당할 뻔 했다.
아마도 좀 전에 굴러다니며 공격을 피할 때도 이런 식으로 공격했었을 것이다. 어쩐지 충분히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는데도 계속 검이 따라다닌다 했었다.
‘그런데 이 녀석 얼마나 더 돌 수 있는 거지?’
공격을 감행했다가 굴러다닐 때부터 급박해서 정확히 샐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서른 번은 훌쩍 넘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한계라고 할 수 있었다.
정상적인 움직임은커녕 세상이 빙빙 도는 어지러움을 느껴야 정상이다.
하지만 한계란 없다는 듯 회전은 더 빨라졌고, 위력은 점점 더 세지고 있었다.
‘괴물 같은 녀석.’
아무리 봐도 이 녀석이 비정상이었다.
언젠간 멈추고, 분명한계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기다리다보면 승기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피하기만 하는 것은 기사로서의 자존심이 용납하질 않았다.
길리안을 보는 루프란의 표정은 굳어져있었고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있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기선을 제압당해 제대로 된 공격한번을 못하고 있었으니까.
아까 카스트로의 말을 잘못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어도 좋다는 말이 정말 베겠다는 생각으로 대결에 임하란 말이었던 것 같았다.
진심으로 상대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상대했어야 하는 것이었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더 이상 기사 지망생으로 보이질 않았다. 이정도면 당장 기사임관시험을 봐도 충분하고 남을 정도의 실력이니까.
다시 베어오는 길리안의 검을 피하며 그가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는 검이 스쳐지나갈 때마다 노출돼있는 피부가 따끔거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소름끼치는 위력.
분명 장점도 있지만 단점과 약점도 많은 공격이다.
목숨을 건 대결이었다면 아마 이런 식의 공격을 해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자신과의 대결에서 어느 정도 통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게 기분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오늘 녀석을 상대하면서 느끼는 게 많았다. 받은 것이 있으니 이쪽에서도 그 보답을 해줘야 하는 것이니까.
루프란은 침착하게 타이밍을 노렸다.
회전을 통한 공격이기 때문에 공격해오는 방향이 한쪽으로 치우쳐져있다. 그가 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공격해 왔다면 더 곤란했을 수도 있었다. 방패를 왼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격은 왼쪽에서 시작된다.
위에서 아래로 베는 공격 한번 피하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벨 때 길리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이 베어오는 각과 방패를 비슷하게 맞추고 검이 막 방패에 닿으려는 순간 방패를 들어올렸다.
방패로 검 면을 때리자 길리안의 검이 크게 위로 솟구쳤다.
몸이 완전히 드러나 무방비상태.
루프란이 길리안의 옆구리를 베었다.
아니 검 면으로 길리안의 옆구리를 쳤다.
턱!
‘턱?’
이상한 소리만큼 옆구리를 가격한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다치지 않게 하려고 어느 정도 힘 조절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맞으면 며칠은 고생할 만큼 아플만한 공격이었다.
문제는 검이 닿았을 때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치는 느낌 때문이었다. 헐렁해 보이는 옷 속에 방어구가 될 만한 것을 입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타격을 입기는 했는지 길리안이 휘청하면서 쓰러질 듯 했다.
중심이 무너진 것이다.
마무리를 짓기 위해 방패로 가격하려는 순간.
‘이크.’
루프란은 화들짝 놀라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발밑을 스쳐지나가는 길리안의 대검.
어느새 자세를 낮춘 길리안이 쪼그리고 앉은 채로 베어온 것이다. 길리안은 한쪽다리를 쭉 펴고 있었다. 자세를 낮추고 다리를 뻗어 무너지려던 중심을 다시 잡은 것 같았다.
좋은 대처라고 박수라도 쳐주고 싶었지만 그리 한가한 상황이 못 됐다.
낮은 자세로 횡으로 베어오는 공격에 연신 뒤로 펄쩍펄쩍 뛰었다. 거리를 벌리려는 루프란과 그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는 길리안의 공격.
“헛!”
또다시 베어오는 검에 펄쩍 뛰어올랐던 루프란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몇 번을 횡으로 베어오더니 몸을 일으키며 위로 올려 베었기 때문이었다.
루프란은 방패로 급히 몸을 보호했다. 이미 허공에 떠올라있는 상태였기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쾅!
검과 방패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허공에 떠있던 상태에서 힘에 밀려 한쪽으로 날아갔다. 루프란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땅에 내려섰다.
뒷걸음질을 쳐 중심을 잡은 그가 방패를 힐끔 내려다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허허..’
방패가 덜렁거렸다.
겉에 둘러놓은 철판 때문에 반으로 쪼개 지진 않았지만 나무로 된 안쪽은 부서져나가 있었다.
하지만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거리를 좁히며 베어오는 길리안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비슷한 타이밍에 같은 패턴의 공격이라 길리안도 피하며 반격을 해왔지만 아까처럼 흉할 꼴은 보이지 않았다.
루프란은 타이밍을 노린 빠른 공격을 감행하고, 공격이 실패했을 때는 사정권에서 벗어나 다시 기회를 노렸다.
그렇게 한동안 비슷한 공방이 계속됐다.
분명 치열한 대결인데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간혹 길리안의 검이 루프란의 방패를 강타하는 굉음만 들릴 뿐.
“그만.”
무심한 눈으로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카스트로의 입에서 나온 말.
그의 낮은 음성에 루프란은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길리안의 회전도 거짓말처럼 멈췄다.
모두가 길리안이 비틀거릴 줄 알았는데 웬걸.
멀쩡한 모습으로 카스트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저 녀석 정말 괴물이군.’
루프란의 생각이었다.
그 회전력을 멈추려면 속도를 늦추며 서서히 멈춰야 정상인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멈춰버렸다.
엄청난 회전력에 과부하가 걸릴 텐데도 전혀 이상이 없다는 듯 말이다.
“그쯤하면 되었다. 실력은 충분히 봤으니까.”
카스트로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면서 루프란을 향해 예를 취했다.
“많이 배웠습니다.”
“하하하. 아니야. 배운 건 날세. 아주 대단했어.”
엄지를 치켜드는 루프란에게 길리안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카스트로가 한쪽에서 구경하던 기사들을 보고 말했다.
“좋은 경험과 자극이 되었길 바란다.”
그리고 길리안을 행해 손짓을 했다.
“따라오도록.”
그리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길리안은 뚱한 표정으로 그를 보다 기사들에게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고 짐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뭐야. 경험과 자극이 우릴 보고 한 말이었어?”
한기사의 말에 루프란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 한심하다는 말도 너희에게 한말이다.”
그 말에 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거기엔 나도 포함돼있고.”
그러면서 들고 있던 방패를 땅에 던졌다.
반 정도 부서져나가고 심하게 일그러져 이미 방패로써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한두 번만 더 부딪쳤으면 완전히 부서졌을 것이다.
왼팔을 조금 움직여본 루프란이 쓰게 웃었다.
“쳇, 한동안 못쓰겠군. 어이 뭣들하나? 아직 훈련시간이다.”
그의 말에 기사들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예. 예. 갑니다. 가요.”
“이거 기사작위 반납하지 않으려면 훈련 좀 해야겠는걸?”
“요즘 애들 무섭다더니 장난 아니 구만.”
“그러게 말이다. 저런 녀석이 아카데미는 왜 간다는 거지?”
기사들이 저마다 한마디씩하며 훈련으로 복귀했다.
그들이 떠나간 뒤에도 루프란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다. 방패를 내려다보던 그가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훗. 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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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처음이라 설명이 좀 길기는 했지만...
전투신은 이런 식으로 갈 것 같습니다. 아티펙트나 마법의 힘을 빌려 강화된 무기는 나오겠지만 강기나 오러를 쓰는 소드맛스타는 안 나오는 걸로....
아무튼 즐거운 토요일!
편한 주말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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