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3)
“아름다웠지. 백합처럼 순결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이랄까? 아니면 천상에 핀다는 그린로즈 같은 고귀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할까? 첫눈에 반해도 이상하지 않을···.”
로렌스의 말이 계속되는 동안 모두가 멍한 눈으로 그를 봤다.
말이 다 끝난 후에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음?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지?”
“네가 여자를 그렇게 말하는 걸 처음 들어서.”
라는 미네르바의 말에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그런 로렌스를 보며 루퍼드가 말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정말 놀랍군. 그런데 그런 여자··· 아니 레이디가 있나?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군. 혹시 길리안과 무슨 관계인지는 아나?”
“그게 왜 궁금하지?”
“결혼할 사이만 아니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는 이상할까?”
“이상하지는 않다만···.”
“혹시 로렌스 네가 반한 건가?”
“내게도 이상적인 레이디이긴 하지. 그런데 정말 관심이 많군.”
“네 말을 듣는 것만으로 가슴이 설레었다면 설명이 될까? 지금까지 그런 레이디를 찾고 있었다.”
루퍼드의 말에 이번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이상한가?”
그 말에 케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이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많은 일을 두고 여자라니요! 일 안 하십니까? 일하십시오. 일!”
그 말에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길리안보다는 그쪽하고 관계가 더 깊은가 보군. 친구 사이에 여자가 끼어들면 사이가 틀어지기 쉽다던데···.”
“우리 사이에는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친구 중에 여자로 보는 것도 저 하나뿐이고 길리안에게는 동생입니다. 동생!”
“어? 길리안에게 여동생이 있었어? 남자 형제 밖에 없다고 들었는데 친척인가?”
라는 미네르바의 물음.
“흐음, 길리안의 여동생이라···.”
라는 루퍼드의 말에 케빈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왜들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궁금해하는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오해가 생길 수 있어서 간단하게 설명 드리면···.”
케빈은 안톤과 플로리아에 대한 이야기 등을 간단하게 말했다.
“그래서 길리안의 집에 머물게 된 거고 녀석은 물론 그 집의 고용인들까지 그녀를 길리안의 친동생처럼 대하고 있습니다.”
“후훗, 하하하하.”
케빈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네르바가 크게 웃었다.
“하아~ 미안. 너무 길리안답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웃음이 나왔네. 누구는 친분 있는 자들이 시험에 통과하도록 압력을 넣은 것도 모자라서 휘하 기사단에 두고 있는데 말이지.”
그 말에 다들 씁쓸한 표정으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케빈 군. 그 아가씨가 앞이 안 보인다고? 안타깝네.”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지요. 하지만 제가 다시 앞을 보게 해줄 겁니다. 그 맑고 아름다운 눈으로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줄 겁니다. 꼭 그렇게 될 겁니다.”
“케빈 군은 멋진 남자네. 꼭 그렇게 되길 바랄게. 음, 그러고 보니 마탑 관련 자료를 볼 때 그런 연구를 하던 마법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미네르바가 그렇게 말하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서류를 뒤적거리다 쓰게 웃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당장은 못 찾겠네.”
그 말에 케빈이 미네르바가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이 서류 중에 있습니까?”
“어, 내 기억이 맞는다면.”
“좀 봐도 되겠습니까?”
“어.”
라는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왼손으로 서류를 잡고 오른손으로 책장을 넘기듯 휙휙 넘기기 시작했다.
“그렇게는 못 찾을걸. 일일이 내용을 확인해야···.”
“내용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게 읽는 거라고?”
“네.”
거의 책의 페이지를 찾으려고 휙휙 넘기는 수준인데 읽고 있단다.
그렇게 한 뭉치의 서류를 확인하고 확인하지 않은 서류를 집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빈이 서류 한 장을 빼 들고 말했다.
“이거군요. 어디 보자 음···.”
쓱쓱 읽고 잠시 생각하던 케빈이 다시 말했다.
“이론적으론 충분히 가능성이 있을 것 같군요. 그런데 그 죽일 놈의 마탑주와 부탑주가 필요 없는 연구라고 못 박고 연구예산을 주질 않았군요.”
“오~ 마법에 대해서도 아는 게 많나 보네?”
“마법은 못 쓰지만 조금 압니다. 마나 어도 다 읽을 줄 알고요. 혹시 이 연구가 진행될 수 있을까요?”
“글쎄.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마탑에서 결정할 일이야. 새로운 마탑주가 누군지 케빈 군도 알잖아? 예전보다야 훨씬 나아지겠지만 어떻게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거나 예산이 부족하면 어쩔 수 없으니까.”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케빈이 로렌스의 자리에 가서 앉아 서류를 집어 들었다.
“결론은 돈이군요. 좋습니다. 어차피 남의 일도 아니고 친구 집안일이니 좀 돕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문제점을 확실히 찾아보고 해결 방안도 생각해 보고 재정을 늘릴 궁리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두서없이 섞여 있는 겁니까? 누가 이따위로 정리를 한 겁니까?”
“그따위로 정리해서 미안하군.”
뒤에서 들리는 로렌스의 말에 피식 웃은 케빈이 말했다.
“일할 때는 예의 같은 거 못 차립니다. 그래도 괜찮다면 계속하지요.”
“괜찮다.”
“밖에 있는 기사들에게 서류는 대충 정리만 해서 안으로 주라고 해주십시오. 막 부릴 수 있는 사람도 몇 명 필요합니다.”
말을 하는 동안에도 케빈의 눈과 손은 쉬지 않았다.
“제가 말하는 걸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적을 사람도 필요합니다. 읽으면서 생각하고 정리하고 말하고 다른 걸 쓰는 건 하는데 양손으로 다른 글을 쓰지는 못하니까요.”
지금 보여 주는 것만 해도 저게 가능한지 의문이 들 정도.
“그러지. 아, 왕실에는 뛰어난 의사와 약제사가 있고 교단의 주교들도 자주 드나들지. 네가 사랑에 빠진 아가씨가 다시 앞을 볼 방법은 따로 찾아봐 주마.”
“감사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세상을 원래대로 바로 잡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나중에 그 아가씨가 세상을 볼 수 있게 됐을 때, 내가 이렇게 바꿔났다고 말할 수 있다면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이겠지.”
로렌스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거 아주 마음에 드는군요. 없던 의욕이 막 생깁니다. 사람 부릴 줄 아시네. 아, 다른 분들도 신기한 동물 보듯이 그렇게 쳐다보고만 계실 거면 그냥 가서 쉬십시오. 아무래도 시선은 신경 쓰이거든요.”
케빈의 말에 로렌스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럼 부탁하지. 밖에 있는 기사들에게는 말해 놓겠다. 그런데 길리안은 뭘 하지?”
“녀석이 뭘 하겠습니까?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듣지요. 아 물론 기사 학부 실전 수업은 교관들이 넘버즈를 가르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해서 교관들과 같이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렇게라도 수련 비슷하게 하고 싶은가 보더군요. 지금은 아마 총장 대리님을 만나고 있을 겁니다.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도 항상 밤늦게 기숙사로 돌아오더군요.”
“기숙사에서 잔다고?”
“뭘 물으십니까? 원래 그런 녀석인 걸 아실 때도 된 거 같은데요.”
그 말에 피식 웃은 로렌스가 미네르바를 보고 씨익 웃은 후에 케빈의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섰다.
“그럼 부탁한다. 우린 조금 쉬었다가 다른 일을 하러 가도록 하지.”
“로렌스.”
미네르바와 드레드가 먼저 가자 루퍼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왜?”
“그의 능력도 알아본 건가?”
“조금은. 왜 내 행동이 너무 의외였나?”
“그런 면도 있지.”
“지금까지 난 잘못한 걸 밝혀내는데 내 능력을 써왔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달라진 것도 해결된 것도 별로 없어. 계속 뒤를 파 봐도 음모의 실체를 밝혀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 휘둘릴 수 있겠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능력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거기엔 나도 동의해.”
“다행이군. 물론 케빈의 경우 절차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데려온 것이고 그게 잘못된 거라는 건 알고 있다.”
그 말에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지금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바로 우리다.”
“음?”
“지금 우리가 가진 권력을 견제할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다는 거지. 신료들 쪽은 사람이 없다시피 하고 마탑도 큰 목소리를 내기는 힘들어. 지금 왕의 신뢰를 가장 크게 받는 건 기사들이고 그 정점에 있는 우리는 큰 권력을 쥐고 있다는 거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못할 일이 없다는 거지.”
“알아.”
“네 행동을 나무라는 게 아니다. 좋은 의도인 것도 알고 네가 네 능력을 사사로이 쓰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널 믿지만 네가 한 말에 대한 조사도 확실히 해왔고. 그건 널 믿는 것과는 달리 꼭 필요한 절차였으니까.”
루퍼드의 말에 로렌스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도 고맙게 생각한다. 네가 무조건 나를 믿고 행동했다면 나도 부담스러웠을 거다. 어쨌든 케빈의 일은 며칠만 지켜보고 판단해라.”
“그의 능력을 높이 사는군.”
“보통사람보다 훨씬 뛰어나고 좋은 생각도 많이 가지고 있다. 우리가 내는 좋은 생각이라는 건 고작 칼랜베르크의 것을 가져다 바꾸는 정도지. 그렇다고 내가 그의 생각을 가져와 내 것처럼 쓸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그를 직접 데려온 거지 아마도 그가 우리보다 나을 거다.”
그 말에 루퍼드가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네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군. 뭐 어쨌든 그 덕에 나도 내일 출동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다녀와 보면 알겠지.”
“라데카? 거기서 뭐 하니?”
“앗 깜짝이야.”
놀란 표정으로 돌아선 라데카가 살짝 인상을 쓰고 말했다.
“언니가 여긴 웬일이세요?”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니? 너야말로 안 들어가고 그 앞에서 뭘 하는 거니?”
“들어가려고 했다고요. 노크를 해도 대답이 없어서 서 있던 거라고요.”
“그렇구나.”
라고 말한 미네르바가 엔젤이 있는 총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음, 아무도 없네?”
“그러네요?”
라데카도 미네르바의 뒤를 따라 들어서며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이상하네.”
“그러게. 나도 방에 있을 거란 말을 듣고 왔는데···.”
“그를 만나려고요?”
“뭐 겸사겸사.”
“쳇, 하필이면···.”
“잠깐.”
손을 들어 라데카의 말을 막은 미네르바가 한쪽 벽으로 다가가 귀를 댔다.
그리고 잠시 후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그걸 본 라데카도 다가와 벽에 귀를 댔다.
아주 작지만, 소리가 들렸다.
“저 안에 있는 건가요?”
라고 라데카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했다.
“그런 거 같아.”
“벽 너머에 밀실이라니. 수상하네요.”
“그냥 밀실이 아니라 수련실이야. 나도 말로만 들었지만. 잠깐만 쉿.”
미네르바의 말에 라데카도 입을 다물고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악, 길리안 그만, 이제 제발 그만해. 아악! 죽을 것 같아.
-조금만 참으시면 곧 끝납니다.
-아까부터 그랬잖아. 아악! 아파! 이 자세는 너무, 너무 힘들다고. 이미 오래 했잖아. 제발 놔줘.
-조금만 지나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어제도 그랬잖아. 악! 아프다고. 그만, 제발 응? 이러다 나 죽는다고.
-처음이 힘들지, 하다 보면 고통도 사라질 겁니다. 나중에는 기분도 좋고 상쾌해지죠.
-며칠을 했는데도 아프다고. 정말 이제 못 견디겠어. 제발 그만해.
-안됩니다. 바빠지면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조금만 견디세요.
-나중에, 나중에 또 하자 응?
-안됩니다. 시작한 건 끝을 내야지요.
-아악! 아파! 그만!
거기까지 들은 라데카가 벽에서 떨어져 손가락으로 벽을 가리켰다.
하얗게 질린 얼굴, 파리해진 입술. 온몸을 덜덜 떨던 그녀가 말했다.
“저, 저, 저 나쁜 놈! 도, 도대체 엔젤 언니에게 무슨 짓을. 죽여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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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길리안은 살 수 있을까요?
다음 편에~
엎드려 쓰기 스킬을 익혔습니다.
한 편 쓰고 나니 스킬레벨이 조금 오른 것 같습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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