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2장(1)
“아~ 어제 있었던 일이 꿈은 아니구나.”
턱을 괴고 창밖을 보며 말하는 케빈의 어깨를 카미르가 툭 쳤다.
“꿈이 아니니까 저러고 있겠지.”
“그렇겠지. 햐~ 소문 참 빠르다. 빨라.”
이른 아침부터 아카데미 정문에 모여 있는 수백의 사람들.
그리고 그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는 길리안.
다들 길리안의 소문을 듣고 그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모여든 보통 사람들이었다.
“저러다 쟤 평민 왕 되겠다.”
“후우~ 그만큼 아버님이 잘못하고 계시다는 증거겠지.”
옆에서 말하는 카미르를 흘깃 본 케빈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아 얘 왕자였지.’
어제일이 새록새록 다시 기억이 났다.
마지막엔 카미르가 왕궁을 구경시켜 줘서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산책을 하던 왕비와 만나게 됐고, 얼떨결에 같이 차도 마시고 얘기도 했다.
솔직히 차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긴장했었다.
그리고 카미르는 왕비에게 길리안의 얘기를 하고 도움을 청했었다. 정리해서 따로 왕에게 전한 자료 말고, 원래 길리안이 가지고 있던 자료도 왕비에게 주었다.
왕비는 큰 도움은 못돼도 자료는 꼭 보겠노라고 약속했다.
크게 한숨을 내쉰 케빈이 기지개를 폈다.
“으랏차차차차. 으아~.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련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뭘 하는데?”
카미르의 물음에 케빈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너처럼 직접 나서지는 못하지만 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 생판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와서 힘내라고 한마디씩 하는데 친구라는 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오후에 결투하다 죽을지, 왕한테 불려가서 죽을지···.”
왕이라고 했다가 카미르를 의식해서 말끝을 흐렸던 케빈이 다시 말했다.
“에잇 몰라. 난 그냥 앞으로도 왕이라고 하련다. 어쨌든 지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놈이 새벽에 와서 우리들 하타 수련하는 거 챙기더라. 내 참. 너 같으면 이 상황에 그게 되겠냐? 난 절대 못 그런다. 암튼 그런 녀석을 어떻게 가만히 두냐? 내가 정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지혜와 지식을 짜내는 날이 올 줄이야. 으아~ 정말 많이 변했다 나.”
케빈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무언가를 적어나갔다.
“그래서 지금 하는 일이 길리안에게 도움이 되는 건가?”
“아니. 당장 도움은 못되지. 내가 돈 좀 있는 거 빼면 무슨 힘이 있냐? 다만 저 녀석이 걱정하는 성 밖에 빈민들. 그 사람들 구제할 방법 몇 가지 적어보는 거다. 이 일이 어떻게 끝나든 저 녀석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줄 놈이니. 물론 이것도 왕이 안하면 못하는 거고 저 녀석 죽으면 소용도 없는 거고.”
케빈의 말에 카미르는 착잡한 표정으로 창밖의 길리안을 바라봤다.
“폐하께서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으나 말씀하신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내무신료들을 모아 놓고 보고를 받고 있는 에런 왕에게 시종장이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왕비가 궁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오? 공주들까지 데리고?”
“예.”
“그래 어디를 간다고 했소?”
“성 밖의 빈민들을 보러 가신듯 합니다.”
“허허 이것 참. 당장 사람을 보내 돌아오라 하시오. 내가 돌아오란다고.”
“예.”
왕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내무신료들은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때 대전밖에 소란스러워졌다.
“로렌스 경. 이러시면 안 됩니다.”
“지금 폐하께선 신료들의 보고를 받고 계십니다. 그러니···.”
말을 하며 막아서는 근위기사들을 밀쳐낸 로렌스가 대전으로 들어섰다.
“넘버즈 No.5 로렌스 폰 지그먼트가 폐하를 뵙길 청합니다.”
로렌스는 막아서는 근위기사들을 밀쳐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를 막지 말라.”
근위기사들이 물러서자 로렌스가 성큼성큼 왕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경은 내가 무얼 하고 있는지 듣지 못했는가?”
“들었습니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경이 날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럴 만큼 중요한 일인가?”
“예.”
“좋다. 경의 말을 들어보지.”
“어제 길리안 경의 검을 전해야 했던 것은 저입니다.”
그 말에 왕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이야기라면 나중에 듣겠다.”
“지금 들으셔야 합니다.”
“그일 때문에 이렇게 신료들의 보고를 받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알아볼 것이고 심각하게 생각해볼 것이다. 그러니 그 일에 대해선 더 이상 논하지 말라.”
왕의 말에 로렌스는 내무신료들을 쳐다봤다.
한 명 한명 눈을 마주친 그가 피식 웃었다.
“무엇을 알아보고 무엇을 생각해보신단 말씀이십니까? 폐하께서 보고 계신 것은 보고를 위한 보고서일 뿐입니다. 저들은 아는 것도 없고 그저 감추고 싶은 것만 많은 이들입니다.”
“이보시오 로렌스 경 아무리 넘버즈 기사라고 하나 말씀이 지나치시오!”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는 그를 보고 로렌스가 말했다.
“어제 북부관청 장에게 받은 뇌물은 어디다 쓰실 생각이오?”
“뭐, 뭐라? 누가 뇌물을 받았다는 것이오?”
“어제 밤늦게 그가 가져온 보석을 보고 흐뭇해하지 않았소? 평소 정기적으로 받던 상납금의 10배는 돼 보이던데 아니요? 그의 부탁대로 그가 가져온 보고서를 그대로 읊고 있지 않소?”
“어디서 그런 모함을!”
“맞습니다. 폐하. 여기 있는 베르토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이는 근거 없는 모함일 뿐입니다.”
다른 신료의 말에 로렌스가 그를 보고 이전처럼 그의 뒷면을 얘기했다.
그렇게 한동안 신료들과 로렌스의 언쟁은 계속됐다.
“증거를 대시오. 증거를! 어디서 근거 없는 모함으로 폐하와 신료사이의 신뢰를···.”
“훗, 증거라 하였소?”
“그만! 그만들 하시오!”
왕의 말에 로렌스도 신료들도 입을 다물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왕이 로렌스를 보며 말했다.
“경은 지금 경이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예.”
“모두 사실이란 말인가?”
“예.”
“이들의 말처럼 증거를 댈 수 있는가?”
“증거를 가져다 드리면 어찌 확인하시겠습니까? 이들의 윗사람을 불러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밑에 사람을 불러 확인하시겠습니까? 길리안 경이 한 보고를 확인하시는 방법부터 잘못 되었는데 뭘 확인하시렵니까?”
“뭐라?”
“조금만 시간을 내어 성내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기만 하셔도 들고 계신 보고서와 실상이 다름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믿을 만한 이를 시켜 관청의 자료와 실제만 비교하셔도 몇 시간이면 사실이 아님을 아실 수 있으실 겁니다.”
“나를 가르치려는가?”
“잘못하고 계신 것을 잘못하고 계시다 말씀드리는 겁니다.”
“허허 경은 어찌 그런 것들을 알면서도, 지금껏 내게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가?”
“말씀을 드려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 같아 그냥 지나쳐왔습니다. 그것이 너무 후회되고 부끄러워 지금 이 자리에서 이제야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북부지구에 가신 적이 없습니다. 수도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 아시면서도 그 현장조차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시는 겁니까?”
“뭐라?”
“암살당하시는 것이 두려우십니까? 높은 성벽과 수많은 기사들이 옆에 있지 않으면 안심이 되질 않으시는 겁니까?”
“말이 지나치다.”
“지나쳐도 들으십시오. 수도에 있는 왕실 기사만 천이 넘습니다. 그들은 폐하께 날아오는 화살이나 찔러오는 검은 막아드릴 수 있으나, 폐하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거짓된 이들까지 막아드리지는 못합니다.”
“그만 하라.”
왕의 호통에 신료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가 거짓된···.”
하지만 그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목에 닿아있는 로렌스의 검.
그리고 그 검을 막아선 드겔의 검.
드겔이 로렌스를 보며 말했다.
“화가 난 것은 알겠으나 지금 경의 행동은 지나치네.”
“지나친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 이 무슨···.”
뭔가 말하려는 신료의 볼에 드겔의 검 면이 닿았다.
“그대는 가만히 있으라. 예뻐서 막아준 것이 아니니.”
그리고 로렌스에게 다시 말했다.
“경도 검을 거두게. 죽이려거든 밖에서 죽이게. 쫓아다니며 막지는 않을 테니.”
그 말에 로렌스가 검을 거꾸로 쥐고 대전 바닥에 꽂으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단단한 대전바닥에 거의 반이나 박힌 검의 손잡이를 쥐고 왕을 보며 말했다.
“지나친 김에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사자처럼 용맹한 기사도 그 주군이 토끼처럼 겁이 많으면 결국 토끼가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내가 겁 많은 토끼라 말하는 것인가?”
“예.”
“뭐라? 허허 그럼 경은 사자인가?”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저도 어느 샌가 토끼가 돼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사자가 되려 합니다.”
손에 힘을 줘 검을 옆으로 꺾었다.
툭 소리가 나며 반 토막 난 검을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 말했다.
“이는 어제 길리안 경의 검을 전하며 같이 전하지 못했던 물건입니다.”
그리고 넘버즈를 증명하는 패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허나 용서를 구하지는 않겠습니다. 죽이시려거든 죽이십시오. 폐하께 드리기 아까운 목숨이나 아직은 그냥 드릴 수 있습니다.”
왕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왕을 보고 로렌스는 살짝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섰다.
“오 로렌스 이곳에 있었나?”
대전을 벗어나 걸음을 옮기던 로렌스는 자신에게 말을 거는 크리스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난 네 친구가 아니다. 예는 갖추도록. 그리고 친한 척 하지마라. 역겨우니까.”
“뭐?”
“아~ 뭐 이제는 상관없나? 너 따위와 같은 넘버즈가 아니니까. 기분도 별로인데 나랑 한판 하겠나?”
로렌스의 말에 크리스는 인상을 쓰며 검을 잡았다.
“그 검 뽑을 수는 있겠나?”
“내게 시비를 거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금만 기다려라. 네 번호는 내가 받아갈 테니.”
“그거라면 가서 왕께 졸라봐라. 혹시 아나? 바로 손에 쥐어줄지. 그리고 너보다 상한 상대에게 뽑지 못할 검이라면, 그냥 쥐지도 마라.”
그리고 크리스를 지나쳐 걷기시작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과 함께 바쁜 걸음으로 오고 있는 미네르바와 마주쳤다.
“오~ 미네르바.”
자신을 보며 두 팔까지 벌리고 활짝 웃는 로렌스를 보며 미네르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로렌스? 뭘 잘못 먹었나?”
솔직히 저렇게 웃는 로렌스를 본적이 없었다.
“잘못 먹은 것은 없지만, 나도 솔직히 지금의 나에게 놀라는 중이다. 그보다 그는 만나보았나?”
길리안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안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나쁘지 않을 걸 보니 괜찮은가보군.”
“그래. 옆에서 보는 이가 놀랄 정도로 너무나도 담담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말에 로렌스가 미소를 지었다.
“정말 멋진 남자이지 않나? 멋진 기사고.”
“그래. 그를 보고 있으니 내가 작게 느껴지더군. 그보다 넌 어디서 오는···.”
말을 하다가 로렌스의 어깨 뒤에 항상 삐져나와있는 두 자루의 검 손잡이중 하나가 보이지 않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너 설마?”
고개를 돌려 뒤쪽을 힐끗 본 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누군가는 나서야 하지 않겠나? 아무리 뜻있는 기사들이 움직이려 해도 결코 쉽지는 않을 테니까. 누군가 물꼬는 터줘야 그들이 맘 편히 뜻대로 하겠지.”
“너···.”
“아아 내 걱정은 마라.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이고 그 책임도 내가 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한 기분이다. 그런데 왕께 가는 길인가?”
“그래.”
“휘하 기사들과 함께 검이라도 반납할 생각인가?”
“아니. 솔직히 그러고 싶지만 부탁받은 것이 있어서 그러지도 못할 것 같다. 그···.”
-우우우우우우우~
왕성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미네르바는 말을 멈추고 돌아섰다.
“하룻밤 사이에 무섭도록 빨리 소문이 퍼졌나보군.”
“그래. 왕성 앞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그 수는 계속 늘고 있고.”
“그 때문에 왕께 가는 길이었나?”
“어.”
대답을 하는 미네르바의 어깨에 로렌스가 손을 올렸다.
“그렇다면 서둘러라. 크리스가 왕께 갔으니까.”
“설마?”
“아마 그 설마가 맞을 거다.”
“그 개자식!”
욕을 내뱉은 미네르바가 로렌스를 향해 돌아섰다.
“네가 나섰다면 내가 나서는 것 보다 더 나을···.”
“아니.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다. 미네르바 믿는다.”
“쳇. 그 믿음에 보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군.”
“설사 왕께서 크리스의 손을 들어준다고 해도 그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약자의 편에 서서 검을 들 용기는 아직 내게 있으니까.”
그리고 미네르바의 어깨를 툭툭 치고 걸음을 옮겼다.
“멋있어 보인다면 반해도 좋다. 뭐 늦은 것 같지만.”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로렌스를 보고 피식 웃은 미네르바가 돌아섰다.
“네가 검을 들일은 없을 거다. 약속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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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어? 결투한다면서?
죄송합니다.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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