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31장(1)

“합!”

프란트가 기합과 함께 검을 내리치자 안톤이 검을 들어 막아내고 파고들어 그를 밀어냈다.

이어지는 안톤의 공격을 몸을 굴려 피한 프란트가 일어서며 자세를 잡았다.

안톤이 다시 프란트에게 달려들 때.

“그만.”

카스트로의 목소리에 안톤이 공격을 멈추고 검을 내렸다.

“안톤.”

“예.”

“방어 후 반격하는 타이밍이 너무 느리다. 그리고 너무 방어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의 실력이 너보다 월등하다면 섣불리 공격하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다. 하지만 기사 시험에서 붙는 자들의 실력이 너보다 월등하지는 않을 거다. 실력이 비슷하면 기세 싸움이다.”

“예.”

안톤이 대답하자 카스트로가 프란트를 봤다.

“카미르.”

“예.”

“동작이 너무 크다. 방패 없이 싸우는 것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방패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너무 크다. 양손 검을 쓸 때는 공격이 너무 단조로워. 상대를 쓰러트리는 게 아닌 점수를 많이 얻는 싸움이라는 걸 둘 다 명심해라.”

안톤과 프란트가 대답을 하고 다시 무기를 고쳐 잡자 카스트로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훈련하는 것만큼 쉬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라. 가서 마사지를 받고 푹 쉬도록. 부족한 것은 내일 보강하도록 한다.”

아쉬운 표정으로 대답을 한 프란트와 안톤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돌아섰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멀어져 가는 둘을 보며 카스트로가 미소를 지었다.

길리안의 부탁으로 시작한 일이지만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녀석들이었다.

카미르가 프란트 왕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넘버즈 아이작 경에게 배웠다고 들었는데, 확실히 좋은 스승 밑에서 기초부터 잘 배워서 그런지 흠잡을 곳이 별로 없었다.

안톤은 지적해 주는 것은 바로바로 고치고 가르쳐 주는 것은 어떻게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며칠 사이 실력이 놀랄 정도로 성장했다.

좋은 스승만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길리안과 비교하면 많이 부족하지만 그건 저들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길리안이 너무 뛰어나서다.

다른 비슷한 또래가 비교 대상이라면 저들은 확실히 뛰어났고 앞으로도 충분히 발전할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이시군요.”

다가오며 말하는 이베트를 보고 카스트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둘은 어떤가요?”

“둘 다 뛰어납니다.”

“그럼 좋은 결과가 있겠군요.”

“둘 다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왕자는 어쩔 수 없지만, 안톤은 왕께 보내기 아깝습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길리안이 가장 아깝지요.”

“그건 그렇지요.”

“그보다···.”

멀어져 가는 프란트를 보던 이베트가 다시 말했다.

“프란트 왕자는 정말 잘 큰 것 같군요. 윈스톤은···. 하아.”

언니의 아들인 일 왕자와 이 왕자를 제대로 보살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솔직히 그 둘을 제대로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그 세월 동안 자신의 상처도 추스르기 바빴으니까.

“부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고맙다고 말하며 웃었지만, 카스트로의 눈에는 웃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윈스톤 왕자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

“지금 그대로 왕이 된다면 어떻게 보시나요?”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길리안과는 별로 맞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른 넘버즈의 충성을 받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겠지요.”

윈스톤은 다음 대의 왕이 될 것이니 그에 맞는 교육을 받았고 똑똑한 편이기도 했다.

다만 문제는 성격.

원하는 것은 모든 다 가지며 자랐고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다른 것보다 누군가 자신보다 떠받들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는 편협함이 가장 큰 문제였다.

아랫사람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이 부족했다.

많은 이들을 품어야 하는 왕에게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경은 왕자들을 어찌 보시나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일 왕자보다는 이 왕자가, 이 왕자보다는 삼 왕자가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지금은 프란트 왕자가 저대로 크면 왕에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카스트로의 말에 이베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왕궁에서 왕자들도 많이 만나본 카스트로의 평가라서 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자신도 인정하고 있었다.

길리안이 넘버즈가 된 뒤로 왕궁에서 벌어지는 일은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어도 일 왕자 윈스톤이 복귀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그뿐.

지금까지는 국경을 돌아보고 온 왕자를 치하하고 호위한 기사들에게도 포상이 내려졌고 성대한 파티도 연다.

다음 대 왕위를 이어받을 후계자임을 더 공고히 하는 거라고 보면 됐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생략됐다.

아무리 왕실의 상황이 좋지 못하고 여러 일로 바쁘다고 해도 지금까지는 없었던 일.

호위한 기사들은 포상은커녕 모두 구금됐고 거기에는 넘버즈 볼란트와 티란테도 포함돼 있었다.

이유를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왕자도 공식 활동도 없고 거의 연금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공표된 넘버즈들의 승급 결투.

모르는 이들은 그냥 큰 이벤트라고 생각할 것이고 그나마 조금 생각하는 이들은 왕이 영주들에게 무력시위를 하는 정도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베트는 그걸 모두 포함한 공개처형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물론 로렌스나 루퍼드가 승리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승부를 떠나 그 둘은 넘버즈에서 배제됐다고 봐야 했다.

넘버즈 No.2 볼란트는 윈스톤의 무력을 지도하는 스승이었고 티란테도 항상 윈스톤의 곁에 있었다.

윈스톤이 왕위를 물려받으면 왕의 오른팔과 왼팔이 될 이들.

그 양팔을 에런 왕이 잘라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세상이 변하려 하고 있고 그 변화를 왕이 넘버즈들을 앞세워서 진행하는 상황.

이대로라면 윈스톤의 왕위도 장담할 수만은 없었다.

지금 왕이 내리는 결단이나 진행하는 일들을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

“윈스톤 왕자가 걱정되십니까?”

카스트로의 물음에 이베트는 생각을 접고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지만, 왕과 후계자의 사이이기도 하니까요. 미덥지 못한 왕자를 쳐내고 다른 왕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경우는 역사에도 있어요. 그래도 경의 말대로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요. 앞일은 모르지만, 세상이 변해가는 데 언니의 아들이라고 무조건 편을 들어줄 수는 없겠네요. 어차피 내 생각이 왕위 계승에 영향을 주진 못하겠지만요.”

한숨을 내쉰 이베트가 다시 말했다.

“조금 답답하네요. 저와 산책하시겠어요?”

“바로 옷을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안톤과 프란트를 지도하느라 갑옷 차림인 카스트로에게 이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러시다면.”

이베트가 걸음을 옮기자 카스트로가 투구를 벗어 옆구리에 끼고 뒤를 따랐다.

예전처럼 밝은 모습을 보이던 이베트가 오늘따라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하는 그녀의 뒤를 따르던 카스트로가 입을 열었다.

“이번 넘버즈 대결에 길리안과 드레드 경의 대결이 추가됐다고 하더군요.”

이베트도 당연히 알고 있을 이야기.

그런데도 말을 꺼낸 것은 언제 어떤 때라도 길리안에 관한 이야기라면 반응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알아요.”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걱정돼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넘버즈 No.1이라는 새로운 꿈을 꾸는 아들을 말릴 수는 없으니까요. 베어드 가의 아들과 겨룰 때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드레드 경이라면 좋은 승부가 될 겁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카스트로는 의외로 담담한 이베트의 반응에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조금 놀라고 있었다.

“너무 빨라요. 조금 더, 조금만 더 품에 두고 싶은데, 내 역할이 너무 빨리 끝난 것 같아서 아쉬울 뿐이에요. 난 욕심이 많은 여자인가 봐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어머니들이 같은 생각을 할 테니까요. 그리고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겠죠. 길리안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꿈을 좇고 그걸 이루는 것도 좋지만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아, 내일 오라버니가 도착한다고 소식을 전해왔어요. 마중을 가야 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길리안을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제가 아는 백작님이라면 분명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는 이베트에게 카스트로가 말했다.

“오늘따라 한숨이 많으십니다.”

“그러네요. 그날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요?”

요즘 활기차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잠시 잊고 있었다.

그의 남편을 떠나보낸 것도 아들을 잃은 것도 이맘때라는 것을.

“전 여름을 좋아해요. 그 일이 없었다면 더 좋아했을 테지만.”

그 말에 카스트로가 씁쓸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에겐 슬프고 또 아픈 계절.

“계절이 잘못 한 것이 아닌데 항상 여름이 되면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어요. 그런데 올해 여름은 조금 다르네요. 불안함 때문인지 설렘 때문이지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려요. 오랜만에 느끼는 행복이 낯설어서 일수도 있겠네요.”

한걸음 뒤에서 따르던 카스트로가 그녀를 봤다.

그래도 예전에 애써 밝게 웃을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좋아 보였다.

이베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늘은 별이 유난히 많은 것 같네요.”

멈춰 서서 한동안 밤하늘을 보던 이베트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별 하나만 따다 주시겠어요?”

그 말에 카스트로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원하신다면.”

그의 말에 이베트가 돌아섰다.

“경은 내가 원하는 걸 모두 해줄 것 같아요. 별을 따준다고 해도 정말 그럴 거란 생각이 드네요.”

“저도 사람이니 직접 별을 따다 드릴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카스트로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이베트가 고개를 돌리자 유성 몇 개가 떨어지는 게 보였다.

“땅에 떨어진 별 정도는 가져다드릴 수 있습니다.”

이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별은 탐이 나지만, 경이 멀리 가는 것은 싫어요.”

“저는 어디에도 가지 않습니다.”

“고마워요. 항상 곁에 있어 줘서.”

말없이 미소를 짓는 카스트로에게 이베트가 다시 말했다.

“경에게 궁금한 것이 있어요.”

“말씀하시지요.”

“경은 왜 결혼을 하지 않으시나요?”

혼기는 한참 지났지만, 아직도 기사로서도 남자로서도 인기가 많은 그였다.

원하는 곳도 많고 그가 마음만 먹으면 더 높은 곳에 있을 기사.

솔직히 그의 마음은 알고 있었다.

부유하다고는 하나 영지도 없는 자작 가의 미망인 곁에 있을 만한 기사가 아니었다.

그가 적극적으로 구애를 했다면 큰 부담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항상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주며 힘이 돼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거란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많은 것을 정리하면서 결단을 내렸지만, 그에 대한 것은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다.

자신이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지금처럼 지낸다고 해도 언제까지고 지금 모습 그대로 곁에 있어 줄 그였지만, 그래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확실히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답을 주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을 꺼낸 거였다.

대답이 없는 카스트로에게 이베트가 다시 말했다.

“질문이 잘못됐군요. 경이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나 때문인가요? 아니, 나 때문이지요.”

“그건, 음···.”

“이미 내 추한 모습도 많이 봐왔으니 아시겠지만, 나는 경이 순정을 바쳐 사랑할 만큼 가치 있는 여자가 못된답니다.”

그 말에 카스트로가 이베트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가치는 제가 정합니다.”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그럼 난, 경이 순정을 바쳐 사랑할 가치가 있는 여자라는 건가요?”

“으음. 그건···.”

망설이는 카스트로에게 이베트가 말했다.

“대답해주세요. 꼭 듣고 싶어요.”

“그렇습니다.”

“난.”

이베트가 카스트로에게 등을 돌리고 다시 말했다.

“욕심이 많은 여자인 것 같아요. 다시 찾은 행복을 또 빼앗길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더, 더 많이 행복해지고 싶어지는 걸 보면요. 그래도 되는 될까요?”

“부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돌아선 이베트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있었지만, 얼굴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잠시 말을 멈췄던 이베트가 다시 말했다.

“부인이라는 말은 이제 듣기 싫어요. 다시 처녀 때 성을 쓰는 이상 누구의 부인도 아니에요. 비록 처녀는 아니지만요.”

멍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카스트로에게 다시 말했다.

“아직 마음이 다 정리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내년쯤이면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결혼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말한 이베트가 카스트로를 지나쳐 뛰듯이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사라지고 난 뒤에도 카스트로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작가의말

이베트와 카스트로도 이어주고...

사랑이 꽃피는 넘버즈는 계속됩니다.

[NEOshin]

크... 이런 감정선들도 좋네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대원(大遠)]

헤헤 감사합니다^^

[MidD]

어머 이제 이름 부르나요 > < 이베트 부인... 아가씨....? 도 이젠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군요~~ ^^

[대원(大遠)]

음... 뭐라고 부를지는 아직... 저도 꽃길 좀 ㅠㅜ

[MidD]

우리 작가님 위해서라면 그까짓! 꽃 좀 파바박! 깔아 보겠습니... (??!)

[대원(大遠)]

감사합니다. 그럼 전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 응? ㅎㅎ

[srythx]

하........... 부럽네요

[대원(大遠)]

부러우시다면 등장인물로?
물론 빨리 죽을 수 있습니다. 소설에서요 ㅋ

[srythx]

복상사라면 좋습니다^^

[대원(大遠)]

음 복상사라... 그리 어려운 주문은 아니네요 ㅋㅋㅋ
당연히 대상이 누구일지는... 책임질 수 없습니다 ㅋ
텨~

[srythx]

크흠.......

[오빠나야나]

꽤나 몰입한 감정... 댓글에서ㅋㅋㅋㅋㅋㅋ

[대원(大遠)]

헤헤 ㅋㅋ

[은색의왕]

왕자를 치아하고→치하하고

[대원(大遠)]

왕자 이빨이... 는 아니고 수정 완료~

[대원(大遠)]

왕자 이빨이... 는 아니고 수정 완료~

[은색의왕]

중년에 피어나는 사랑...!

[대원(大遠)]

중년의 로멘스!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