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2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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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이베트가 보였다.
“저 왔습니다.”
길리안의 말에도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간 길리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절 안 보실 생각입니까?”
“너란 아이는!”
양손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며 화난 눈으로 쳐다보는 이베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화나셨습니까?”
“너는 도대체! 하아~. 길리안 날 죽일 셈이니?”
“그럴 리가요.”
“한명씩 상대해도 되는 일 아니었니? 그렇게 도발할 필요는 없었지 않니? 몇 명을 상대해야 되는지 알기는 하니?”
“아직 모릅니다.”
“72명이다.”
옆에서 들리는 카스트로에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담담하게 말하는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정말 너란 아이는.”
“아시면서도 준비하고 계셨지 않습니까? 투기장도 빌리시고 사람들도 모으시고, 제가 잘못될 거라 생각하셨다면 그러지 않으셨겠죠.”
“당연히, 당연히 잘못되면 안 되지. 이미 벌어진 일이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만. 하아~.”
“앞으로 기사의 길을 계속 간다면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있을 겁니다.”
이베트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지금처럼 걱정을 할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라고 해도 걱정하시겠지요. 그리 말씀드려도 별 소용이 없을 거고요. 그래서 지금 약속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이베트의 두 손을 잡았다.
“절대 어머니를 슬프게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지켜보시는 앞에서 절대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그런 길리안의 두 눈을 보던 이베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한번만 안아보자꾸나.”
그리고 길리안을 가슴에 안았다.
길리안은 이베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편안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향기가 났다.
“길리안.”
“네.”
“넌 내가 다시 살아가는 이유란다. 네가 잘못되면 나도 잘못된다는 걸 명심하렴. 그리고 앞으로도 날 지켜줄 거지?”
“예.”
“지금은 널 지키는 게 나를 지키는 거란다. 그러니까 다치지 마렴.”
“네.”
“내가 못난 모습을 보였구나.”
“아닙니다.”
대답을 한 길리안이 얼굴을 들고 이베트의 눈물을 손으로 닦아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좋은 갑옷을 맞춰주는 건데.”
“그건···.”
길리안이 말을 하려고 할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하아~ 하아~ 아 힘들어. 하아~. 안 늦었죠?”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이는 라데카였다.
그녀를 본 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 안 늦으셨습니다.”
“다행이다. 말론. 후아~”
“아가씨는 그 짧은 거리를 뛰시고 그렇게 숨을 헐떡이시다니. 운동부족이십니다.”
말론이라는 이가 길리안의 갑옷을 들고 안으로 들어서며 한 말이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몇 명이 더 들어왔다.
“으악. 무거워.”
“길리안 정말 이걸 들고 싸울 거냐?”
“조금 무겁긴 하다.”
라고 말하며 들어오는 이들은 그렉과 케빈 안톤 그리고 카미르였다.
둘씩 한조가 돼서 들고 온 워해머를 바닥에 내려놓자 쿵 소리가 났다.
“흠. 이걸 쓸 생각이냐?”
카스트로의 물음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옛날 물건이었다.
머리 부분이 양쪽 다 평평하고 모양은 사각형으로 어지간한 기사들도 두 손으로 잡고 휘두르면 중심이 무너질 만큼 무거워보였다. 거기에 손잡이도 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져서 요즘엔 한손에 가볍게 들 수 있고, 한쪽이 뾰족하게 돼있어서 정교한 타격이 가능하게 변했다.
이런 건 어디서 찾았냐고 묻자 길리안은 아카데미 무기고에서 찾았다고 했다.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워해머 하나를 집어든 카스트로가 이리저리 흔들어 보고는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걸 본 그렉이 우와 소리를 내며 놀랐다.
“정말 한손으로 쓸 수 있는 거긴 하구나.”
“나도 이런 걸 들고 오래 싸우기는 힘들다. 하지만 길리안이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휘두르겠지. 힘 조절 하지 말라고 하려 했는데 그럴 필요 없겠구나.”
그렇게 말하는 카스트로를 보고 길리안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라데카 양은 여기 어쩐 일이죠?”
이베트의 물음에 아직 숨을 헐떡이던 라데카가 갑옷을 가리켰다.
“마법부여를, 하아~ 했습니다.”
이베트가 라데카의 손을 잡았다.
“정말 고마워요.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었는데, 이 보답은 꼭 할게요.”
“아닙니다. 하아~”
“그런데 얼굴이 왜 그래요?”
로브에 붙어있는 후드를 쓰고 있어 다른 사람은 못 봤지만 가까이에 있는 이베트에겐 라데카의 얼굴이 보였다.
퉁퉁 부은 눈에 초췌한 모습.
그 말에 라데카가 길리안을 가리켰다.
길리안과 라데카를 번갈아보던 이베트는 말없이 그저 미소를 지었다.
“자 우린 나가죠. 라데카양 나랑 함께 관전해요.”
“네? 저도요? 전···.”
“여기까지 와서 안 보려고 했어요?”
“그런 건 아니지만, 하아~ 알겠습니다.”
길리안은 투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관중석을 가득 매운 사람들이 등장과 동시에 환호성을 질렀다.
길리안은 손을 흔들지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앞으로 걸었다.
정면에 서있는 수십의 기사들.
그들을 보고 두렵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았다.
라데카가 신경써준 갑옷은 더 가벼워 졌고, 전보다 움직이기도 편해졌다. 몇 시간밖에 지속이 안 된다고 했는데 그 정도면 충분하고 남았다.
몸 상태도 좋았고 무엇보다 마음이 편안했다.
결투 참관인중 한명이 나서 큰소리로 간단한 규칙 등을 말하는 동안 길리안은 관중석을 돌아봤다.
형이 보였다.
형은 특별히 별말 하지 않았다.
예전에 왕 앞에서 실력을 보일 때는 꽤 긴말을 주고받았었는데, 오늘은 아침에 “이따 보러가마.” 라고 한 게 전부였다.
뭐 해줄 말이 없느냐고 물으니
“이미 기사가 된 녀석에게 무슨 말을 더 해주겠냐.”
라는 말에 그냥 웃었다.
처음으로 형에게 기사로 인정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친구들이 보이고 아는 기사들이 보이고, 자신을 걱정해주는 이들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했다.
길리안은 시선을 돌려 상대할 기사들을 훑어봤다.
다들 좋은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든 이들이 많았다.
갑옷을 입고하는 결투니만큼 그에 맞춰 메이스, 철퇴, 워해머등의 둔기를 들고 있었다.
옆구리에 검도 차고 단검도 차고 있었다.
상대도 완전무장한 상태.
‘4명 정도인가?’
72명중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상대는 그 정도로 보였다.
많다면 많은 숫자지만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모두가 왕실기사는 아니었다.
왕에게 기사작위를 받은 귀족 중에 대전사를 내보낸 이가 많아서 비율로 따지면 반반 정도.
카스트로의 말에 의하면 원래 더 많았지만 투기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고 나서지 않은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하긴 이정도의 대결이면 저쪽에서는 이겨도 그리 득이 될 것이 없었으니까.
솔직히 이렇게 빨리 소문이 퍼질지도 몰랐고, 이베트가 나서서 결투를 주관할 줄도 몰랐다.
이렇게 많은 관중이 모이는 것을 바라던 바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보여주고 싶은 것도 있었다.
말하고 싶었다.
힘이 없어서 검을 꺾은 것이 아니라고.
힘으로 해결 되는 일이었다면 그냥 스스로 해결했을 테니까.
길리안은 시선을 돌려 투기장 귀빈석에 앉아 자신을 보는 이베트를 봤다.
‘어머니.’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에 들어오는 맑고 푸른 하늘.
‘그리고 어머니가 보고 계신 앞에서 전 절대 지지 않을 겁니다.’
결투를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에 길리안은 안면가리개를 내렸다.
그리고 모여 있는 기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야 케빈 나 저거 좀 사줘라.”
그렉의 말에 케빈이 인상을 썼다.
“넌 지금 이 상황에 고양이 고기나 처먹겠다는 거냐?”
“왜?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먹어?”
“넌 길리안 걱정도 안 되냐?”
“되긴 하는데 길리안이 괜찮다고 하잖아.”
“뭐?”
“쟤가 언제 못하는 거 할 줄 안다고 하는 거 봤냐? 되면 된다, 안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긴다고 했으니 이기겠지.”
그 말에 케빈은 뭔가 더 말하려다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렉의 말이 맞으니까.
“하긴 길리안한테 그리 불리한 것도 없긴 하지.”
그 말에 안톤과 카미르가 무슨 뜻이냐는 듯 쳐다봤다.
“저기사들 숫자는 기사단 하나 정도는 되지만. 지휘관이 없잖아.”
그 말에 둘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의 무서운 점은 기사 개개인의 힘도 있지만 뭉쳐진 조직력.
하나의 기사단이 아닌 저들은 그게 없었으니까.
“뭉치지 못한다면 길리안에겐 좋은 일이니까. 뭐 하나씩 나서주면 쟤 절대 안 질 애고.”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들리고 수십 명의 기사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쩝. 아닌가? 지휘관이 있는 건가?”
“난 다미오스 폰 디베트라 하네. 폐하의 기사 중 한사람으로···.”
기사들 앞에 나서 말하는 그에게 길리안은 아무 말 없이 다가갔다.
말을 섞을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신경 쓰이던 4명중 하나였고 기사들 중 앞에 나섰다면 그가 대표 격이라는 말.
그럼 빨리 처리하는 게 이로웠으니까.
길리안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다가오자 다미오스도 말을 멈추고 방패로 몸을 가리며 메이스를 꽉 쥐었다.
딱 보기에도 무식하게 무거워 보이는 커다란 워해머 두 개를 들고 다가오는 길리안을 보고 투구 속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가 왕 앞에서 10명의 근위기사를 제압한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대결을 피하고 도망 다니다 빈틈을 노렸다고 했다.
보기에 체격은 좋으나 기사들 중에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마나니 뭐니 해도 기사의 힘은 기본적으로 근력에 기인한 것.
어느 정도 힘은 있겠지만 저런 무기를 양손도 아니고 한손으로 쓰기엔 버겁다.
몇 번 막고 피하다보면 중심을 잃고 쓰러지거나 제풀에 꺾일 것이니까.
빠르게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성큼성큼 걸어와 오른손에 든 해머를 휘두르는 길리안을 보고 비웃었다.
빠른 공격도 아니어서 뒤로 훌쩍 물러나 피했는데 갑자기 해머가 늘어나기나 한 것처럼 아직 자신의 왼쪽을 노렸다.
다시 피하긴 늦었고 빗겨 막을 생각으로 방패를 들었다.
콰직 소리가나며 방패가 부서지고 옆으로 비칠비칠 밀려났다.
빗겨 막기는커녕 방패가 부서졌고 왼팔에 충격이 너무 컸다. 중심을 잡으려는데 눈앞에 커다란 해머가 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본 마지막이었다.
다미오스의 찌그러진 투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것을 무심한 눈으로 본 길리안이 시선을 옮겨 기사들을 쳐다봤다.
뒤늦게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지만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때 커다란 양손도끼를 든 거구의 기사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덩치에 안 맞게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힌 거구가 무식하게 큰 도끼를 내리 찍었다.
길리안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도끼가 퍽 소리를 내며 땅을 찍었고 단단한 흙바닥에 커다란 도끼자국을 새겼다.
거구의 공격은 계속됐고 길리안은 그때마다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언제까지 도망칠 수있나보자.”
큰 소리로 말한 거구의 도끼가 다시 길리안의 머리를 노렸다.
길리안은 슬쩍 몸을 틀며 오른손의 해머로 덮쳐오는 도끼의 옆면을 쳤다.
땅 소리와 함께 기사의 중심이 무너졌고 길리안은 그대로 회전해 왼손에 든 해머로 거구의 투구를 가격했다. 그가 쓰러지자 오른손에 들고 있던 해머로 또 한 번 투구를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우그러진 투구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길리안은 그 자리에 서서 기사들을 쳐다봤다.
누군가 또 나서리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명씩 덤빌 필요는 없다했습니다.”
크게 외쳤지만 사나운 눈으로 쳐다보거나 자기들끼리 뭔가 말을 나누는 듯 별 반응이 없었다.
어차피 풀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기사들 간의 싸움은 막 싸움이다.
갑옷을 뚫을 수단이 별로 없으니까.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검 대신 커다란 해머를 선택한 것.
갑옷을 뚫지는 못해도 어차피 관절은 꺾인다. 다른 부위는 꺾이면 부상이지만 목은 꺾이면 죽는다.
다른 부위는 갑옷이 찌그러져도 움직임이 불편한 정도지만, 머리는 충격을 받으면 멍해지고 심하면 죽는다.
그렇게 두 명을 처리했다.
자신에게는 당연한 일인데 상대하는 기사들이나 관중들은 놀란 것 같았다.
두 명이 쓰러지고 한동안 움직임이 없자 관중들이 야유를 했다. 야유에도 기사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분명 죽을 각오는 하고 오라 했는데 저럴 거면 이 자리에는 왜 온 것인지 이해가 안됐다.
여럿이 덤비라고 말했는데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살짝 고민이 됐다.
막 싸움에는 자신이 있었다.
마법부여도 받아서 튼튼해진 갑옷을 믿고 저들 사이에 뛰어들어 볼까도 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뭉쳐있는 이들 사이에 뛰어들기는 뭐하니 역시 움직이게 하는 수밖에.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어떻게?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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