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2장(6)
“라데카? 네가 어쩐 일이니?”
“어? 일하는 사람들은 어디 가고 언니가 나와요?”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런데 웬일이야?”
“어머. 제가 못 올 데라도 왔나 보네요. 돌아갈까요?”
“그래, 잘 가.”
라고 간단하게 답하는 미네르바를 라데카가 멍한 눈으로 보다가 획 돌아섰다.
“흥! 다신 오나 봐라.”
그러곤 걸음을 옮기는 라데카의 뒷덜미를 미네르바가 잡아끌었다.
“어딜 가려고.”
“악! 가라면서요. 가라고 해서 가는데 왜 잡는 거예요?”
“장난이었는데?”
“무슨 장난을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해요?”
“그래야 이렇게 먹히니까.”
“칫.”
뾰로통한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 라데카의 볼을 미네르바가 꼬집었다.
“한두 번도 아닌데 반응이 항상 똑같네.”
“매번 그렇게 놀려 먹으면 재밌어요?”
“어.”
“으, 정말! 갈 거예요.”
“가긴 어딜 가!”
뒤에서 라데카의 허리를 끌어안은 미네르바가 문을 향해 돌아섰다.
“자~ 들어가자.”
“아악! 밀지 마요. 내 발로 갈 테니까.”
“싫은데?”
라고 말한 미네르바가 라데카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내려 달라고요.”
라데카가 몸부림쳤지만 미네르바는 내려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으 정말! 힘 센 거 자랑해요?”
“너무 가벼워서 이 정도는 보통 여자들도 하겠는데? 허리는 뭐가 이렇게 가는 거니? 품에 쏙 들어오는 게 완전 여자네.”
그 말에 한숨을 내쉰 라데카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정말 남자 같아.”
“내가 정말 남자였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라고 말한 미네르바가 라데카의 가슴을 만졌다.
“꺄악!”
라데카의 비명에 미네르바가 그녀를 내려놓고 귀를 막았다.
“그만. 안 그럴 테니까 소리 그만 질러.”
“하아~ 으.”
몸서리를 치면서 자신을 노려보는 라데카를 보며 미네르바가 피식 웃고 말했다.
“틈만 나면 내 가슴을 만지려 했던 게 누구였더라?”
“치, 언제 적 얘길 하는 거예요? 그런데···.”
주변을 둘러본 라데카가 다시 말했다.
“정말 아무도 없나 보네요?”
그 정도 비명이면 누가 달려와도 달려올 텐데 아무도 나와 보는 사람이 없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아니, 그냥 혼자 있고 싶어서.”
“역시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라데카를 보며 미네르바가 물었다.
“역시라니?”
“내일 있을 결투 무척 중요하잖아요. 이전과는 다르게 보는 사람도 무척 많을 테고, 특히 발렌슈타인 백작님도 관전하실 테니까요. 다른 넘버즈들에게도 중요하겠지만 언니에겐 어느 때보다 중요한 결투가 될 테니까요. 긴장할 만해요.”
“내가 긴장했다고?”
“네. 오늘만 그런 건 아니에요. 언니는 중요한 결투나 일이 있으면 항상 혼자 있고 싶어 했으니까.”
“내가 그랬나?”
“티 안 낸다고 그걸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나 엔젤 언니는 잘 알고 있죠.”
씁쓸하게 웃는 미네르바를 보며 라데카가 말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놓을 거예요?”
“아, 미안. 일단 좀 앉아. 차라도 한 잔 줄까?”
“언니가 직접 끓여주는 건가요?”
“당연하지. 사람을 다시 부르기도 미안하잖아.”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언니가 끓여주는 차를 다 마시고.”
“나도 그 정도는 할 줄 알거든.”
“그럼 부탁할게요. 아, 그전에 갑옷 좀 가져다줘요.”
“갑옷? 왜?”
“왜긴요. 조금 손봐주려고 그러는 거죠.”
그러면서 로브의 소매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놓기 시작했다.
쉬지 않고 계속 나오는 물건들을 보며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대단하네.”
“감탄만 하고 있지 말고 빨리 갑옷 가져와요.”
“네, 네.”
미네르바가 갑옷을 가져다주고 차를 내올 때까지 라데카의 소매에서는 계속해서 이런저런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연구실을 옮겨온 거야?”
“음, 너무 많이 가져왔나?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까 조금 많아졌네요.”
그런 라데카를 보며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언니 걱정돼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내일 결투에서 언니가 다치기라도 해봐요. 그럼 또 그 사람이 언니한테 신경 쓸 테니까. 라이벌의 입장에서 그걸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뿐이니까요.”
라데카의 말에 피식 웃은 미네르바가 그녀의 이마에 손가락을 튕겼다.
“악! 아파요. 뭐 하는 짓이에요?”
이마를 감싸고 눈을 흘기는 라데카를 보며 미네르바가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지 못한 벌.”
“쳇. 정말 솔직하지 못한 게 누군데.”
라데카의 말에 미네르바가 손으로 앞머리를 넘기고 이마를 들이댔다.
“자.”
“뭐 하는 거예요.”
“한 대씩 때리면 공평해질 테니까.”
“손가락 가지고 되겠어요? 확 마법을 날려버릴까 보다.”
“내가 그렇게 미워?”
“미우면 이러고 있겠어요? 으 정말. 내가 뭐 하는 짓인가 몰라.”
“그러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해주면 서로 기분 좋잖아.”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요?”
“그럼. 누가 그러더라. 말 안 하면 모르는 거라고.”
“하아~. 솔직히 말하면 언니를 응원하는 쪽이니까요. 물론 그 사람과의 관계는 빼고요.”
피식 웃는 미네르바를 보며 라데카가 계속 말했다.
“언니가 다치는 것도 잘못되는 것도 싫어요. 결투에서 이겼으면 좋겠고요. 나 말고도 언니가 그래 주길 바라는 사람들 많아요. 뭐 거의 다 여자들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해요? 결과를 내는 게 중요하지.”
“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미네르바를 보며 라데카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농담.”
“으이그.”
“그런데 이번 결투에서 결과가 중요하기는 해요. 넘버즈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고 말하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이번에 모두의 눈앞에서 상대를 꺾으면 더는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
손에 든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고 라데카가 말했다.
“발렌슈타인 백작님의 경우는 음···.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인정해 주시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해?”
“사람들의 평판은 무척 중요하죠. 주변의 인식이 바뀌고 다들 언니를 인정한다면 못 이기는 척 인정해 주시지 않을까요?”
“그랬으면 좋겠네.”
“그러기 위해선 내일 이겨야겠죠?”
라데카의 말에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야지.”
“내가 이렇게까지 해주는데 못 이기면 정말 미워할 거라고요.”
“고마워.”
“아~ 새로 만들고 있는 갑옷이 나왔으면 이 고생은 안 해도 되는 거였는데.”
“뭘 얼마나 해주시려고요? 마법사님.”
“관절 부위를 조금 부드럽게 해줄게요. 그러면서도 방어력은 조금 더 높이고, 무게도 좀 줄일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보고요. 결투할 때 동만 만이지만요.”
“그럼 정말 고맙지. 옆에서 많이 봐서 그런지 내 특징을 잘 알고 있나 보네?”
“아, 이건 내 생각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은 거예요. 언니만이 아니고 갑옷을 입은 기사들에게 중요한 게 그거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그렇지. 아, 길리안은 왜 마탑에 가 있는 거야?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그쪽 기사들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하고···.”
“음~ 기사들 입이 꽤 무거워지긴 했네요. 탑주님이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거야?”
“큰일이라고도 할 수 있죠.”
“으, 빨리 말해봐. 궁금하단 말이야.”
“라이벌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
“뭐?”
미네르바의 표정을 보고 풋 하고 웃음을 터트린 라데카가 깔깔거리고 웃다가 말했다.
“하아, 그 사람이 쓰는 가면 언니도 본 적 있죠?”
“응. 얼굴에 직접 쓰니까 뭐랄까. 음···.”
“조금 징그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요?”
“맞아. 그런데 그게 왜?”
“그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난감하기는 한데···.”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하던 라데카가 다시 말했다.
“쉽게 말하면 그 가면이랑 영광의 갑옷이 합쳐졌다고 하면 맞을 것도 같고.”
“합쳐져?”
“네. 아무튼 그래서 지금 마탑이 난리도 아니에요.”
“뭔가 잘못 된 거야?”
“그렇지는 않아요. 결과만 놓고 보면 훨씬 더 좋아진 건데, 문제는 지금의 마법 지식으로는 설명하기가 힘든 일이라서 그렇죠.”
“음.”
“그 가면이 영광의 갑옷을 변형 시켰다고 하면 될 것 같네요.”
“그게 가능해?”
라는 미네르바의 물음에 라데카가 어깨를 으쓱 해보였다.
“그래서 말했잖아요. 설명하기 힘든 일이라고요.”
“좋은 거면 다행이기는 하지만 좀 걱정되네.”
“네. 그래서 지금 마탑이 비상이 걸렸죠. 더 웃긴 건 그 사람이 없으면 그 어떤 실험도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응?”
“그 사람이 입고 있지 않으면 반응도 없고 변형도 안 되고 새로운 마법 식도 못 새기고. 한마디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각인 해제도 안 되고 그 사람 전용 갑옷이 돼버렸죠.”
“그렇구나. 길리안이 고생하겠네.”
“그게 고생이라고 해야 하나? 오히려 그 사람이 더 적극적이어서 마탑의 꼬장꼬장한 원로마법사들의 귀여움을 한껏 받고 있죠.”
“그래?”
“네. 예의 바르고 겸손하고 마법에 대한 궁금증도 많고, 그리고 나이 많은 노인네들한테 잘 맞춰준다고 해야 할까요? 그 괴팍한 원로 마법사들이 손녀사위 삼겠다고 난리예요. 내 참. 어이가 없어서.”
재미있다는 듯 웃는 미네르바를 보면서 라데카가 말했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요. 그래서 할아버지도 그 사람을 내 짝으로 점찍었나 봐요.”
“응?”
“아, 내가 말 안 했던가요? 그 사람 할아버지가 손녀사위 삼겠다고 한 사람이에요.”
“그, 그렇구나.”
“언니는요?”
“내가 뭘?”
“결혼한다는 말이 들리던데요?”
라데카의 말에 미네르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건, 하아. 그냥 오빠한테 마음에 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괜히 큰 소리로 떠들어대서 그런 거야.”
“그렇구나.”
라고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라데카를 보고 미네르바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녀가 말했다.
“난 또 벌써 얘기가 다 끝난 줄 알고 바짝 긴장했잖아요.”
“오빠는 괜찮겠지만 아버지는 글쎄. 내가 가는 길도 인정해 주시지 않는 분이 그 사람을 인정해 줄 리가 없지.”
씁쓸하게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며 라데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아! 깜빡할 뻔했네. 언니 이거.”
라데카가 로브의 소매에서 꺼내 건네는 걸 받아든 미네르바가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뭐야?”
“그건 체인져에 대한 연구 기록이요.”
“응?”
“초대 넘버즈들이 쓰던 마법 무기나 방어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었데요. 예전에야 마법사들만 참고하는 자료였지만 이제는 다시 무기가 세상에 나왔잖아요. 그래서 지금 무기를 쓰는 주인들은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냐고 마탑주님께 졸라서 사본을 만들어 온 거예요.”
“그래?”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체인져는 특별하더라고요. 지금 다시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뭐 그건 다른 것들도 그렇지만 아무튼, 길이만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꼭 무기로만 사용했던 것도 아니더라고요. 카렌 경은 체인져를 다양하게 변형시켜서 사용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보면 많이 참고가 될 거예요.”
“고마워. 오늘 정말 신세를 많이 지네.”
“별말씀을. 말했잖아요. 언니 응원한다고. 여자라고 무시하는 것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라고요.”
고개를 끄덕인 미네르바가 라데카를 보고 씨익 웃었다.
“응.”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글 쓸만한 상황이 못 돼서ㅠㅜ
다시 정상 연재가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추운 날씨에 건강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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