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5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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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멀지 않아?”
“추격하는데 이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습격이 있다면 말이죠.”
“오늘은 활도 있네?”
“저번에 활이 없어서 잡는데 고생이 많았습니다. 비슷한 부류일 테니 이쪽도 준비를 해야죠.”
“그런데 화살이 너무 많지 않아?”
“200발밖에 안됩니다.”
그 말에 미네르바는 피식 웃었다.
40발이 꽂혀있는 화살 통 5개는 따로 제작한 것 같았다. 거기에 활에 검 2자루에 단검들까지.
길리안은 뭔가 할 때마다 무기를 참 많이 들고 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네르바는 길리안과 둘이서 19호가 있는 저택이 보이는 높은 탑 위에 올라있었다.
아침이 돼서야 저택에 습격이 있을 것 같으니 작전을 수행한다고 소식을 받았다.
왕이 모든 기사들을 소집한 시간에 수행하는 작전인데 넘버즈들이 모두 나섰다. 비밀리에 수행해야 하는 작전이니 넘버즈들은 그 시간에 왕성에 있어야했다.
그래서 넘버즈들의 갑옷은 다른 이들이 입고 왕의 옆에 서있었다. 작전에 나선 믿을만한 기사들도 마찬가지.
너무 많은 기사를 동원할 수는 없어서 넘버즈들 외에 기사 100명을 추렸다.
교대를 위한 병사는 300명. 그중 50명은 기사들이 변장을 한 것이고 나머지는 두 팀으로 나눠 먼 곳에서 대기 중.
길리안과 자신이 그중 한 팀이었다.
‘그나저나.’
둘만 있으니 묘하게 어색했다.
길리안은 그대로인데 자신이 의식해서 그런 것 같았다.
‘어제 일은 정말.’
길리안이 넘버즈가 됐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도 셋이 앉아 술을 계속 마셨지만 대화는 별로 하지 않았다.
‘하필 라데카랑.’
다른 여자였다면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라데카와 엔젤은 자매처럼 생각 하는 이들.
‘나는 길리안을 얼마나 좋아하는 거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끌리고 좋아하기는 하지만 아직 드러내놓고 관계를 확실하게 하기에는 망설여진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살면서 이성에 대해 이만큼심각하게 고민해본적은 없었다.
“어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응? 아니 별다른 건. 왜?”
“피곤해 보이십니다.”
“조금 과음을 했을 뿐이야. 이런 작전이 있으면 빨리 말해줬으면 좋잖아. 그랬으면 안 그랬을 텐데.”
그 말에 길리안도 고개를 끄덕였다.
술을 많이 마시기 전에 말해줬더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왕께서 기사들을 소집한 것 자체가 갑작스러운 일이었으니까요.”
“하긴.”
고개를 끄덕이던 미네르바는 다시 길리안을 봤다.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는 아차 싶었다.
아침 일찍 소식을 듣고 작전회의도 하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길리안에게 축하의 말 한마디도 하질 못했다.
“늦었지만 축하해. 넘버즈가 된 걸.”
저택을 주시하던 길리안이 돌아서서 미네르바를 보고 씨익 웃었다.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아닙니다.”
“응? 무슨 말이야?”
“제자리를 찾아가보려고 합니다. 한시적인 넘버가 아닌 제 넘버를 찾아 확실히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아직 아닙니다.”
그 말에 미네르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 마음에 든다는 거다.
예외 넘버까지 받으며 넘버즈가 됐으면 조금은 기분을 내도 될 텐데 그런 것이 없다.
으스대는 것도 없고 자만하거나 안주하지도 않는다.
“이제 한걸음 남았습니다.”
“뭐가?”
“마주 볼 수 있는 위치까지. 한걸음 남았습니다.”
미네르바는 멍하니 길리안을 보다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말 하면서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얼굴이 화끈 거리고 가슴이 뛰었다.
마주볼 수 있는 곳까지 올라오라고 한건 자신지만, 그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가뜩이나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가는데 저렇게 나오니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제 일만 없었으면 정말 기분 좋은 마음이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저, 정오인데 습격은 없는 건가?”
분위기 전환을 위해 그냥 한 말.
“공격을 해온다면 적어도 왕궁의 상황정도는 보고 시작을 하겠지요.”
“하긴.”
다시 저택주변을 주시하는 길리안을 보며 미네르바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넘버즈로서 임무에 집중 할 때.
자칫 자신 때문에 넘버즈로 첫 임무에 나선 길리안 에게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린 너무 멀리 있는 거 아닌가?”
“어차피 거리는 상관없다. 습격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린 우리의 일을 하면 될 뿐.”
“그런데 이마위에 그건 뭔가?”
“이건··· 안경이라고 할 수 있지.”
“눈이 나쁜 줄은 몰랐군.”
드레드의 말에 로렌스는 피식 웃었다.
“나도 몰랐다.”
그러면서 이마위의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대화를 나누다 마지막에는 사람들과 조금 어울렸다.
그러다 안경을 쓴 길리안의 친구를 보고 호기심이 생겨 그걸 받아쓰고서 정말 깜짝 놀랐다.
눈이 핑핑 돌 정도.
그냥 색이 있고 눈을 가리는 용도는 없는지 묻자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서, 그 생각을 조금 훔쳐보다가 하나 골라낸 것이 지금 이마위에 있는 안경이었다.
보통의 것과는 다르고 붉은 색에 눈 전체를 덮을 수 있었다.
사막에 갈 때를 대비해 햇빛과 바람을 막을 용도로 만들었다는데, 겉을 덮은 유리의 색만 바꾸니 자신에게 딱 이었다.
조금 이상해 보여도 눈에서 붉은빛이 나는 것 보다는 나았다.
그리고 빛이 나도 충분히 가려지는 걸 확인해서, 좋은 무기나 갑옷을 얻었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하룻밤 사이에 준비해준 것이 고마워 다음에 보답을 할 생각까지 했으니까.
“번호배정은 의외로군.”
“뭐가 의외인가?”
“넘버즈는 강함이 번호순이 아닌가? 저택의 수비는 중요하니 그렇다고 쳐도···.”
“나와 같은 조가 된 게 불만인가보군.”
“그렇지는 않다. 다만 새로운 넘버즈가 궁금하니까. 난 조금 전까지 저택에만 있었다.”
“그건 미안하게 됐다.”
드레드는 어제 하루 다른 이들에게 완전히 잊혀서 저택에서 풀로 말뚝근무를 했다.
“보통은 높은 번호와 낮은 번호를 함께하지 않던가?”
“그렇기는 하지만···.”
드레드가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았다.
어제 재미있는 볼거리를 그는 모두 놓쳤으니까.
“어차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사이다. 그리고 그에 대해서는 곧 알게 될 거다. 아마 직접 그를 상대하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음?”
“한가해지면 무서운 속도로 올라올 거다. 그리고 넌 특히 상성이 좋지 않아. 힘과 힘이 맞붙으면 센 쪽이 이길 테니까.”
“내가 진다는 건가?”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얕잡아보지 말라는 거다.”
“같은 넘버즈를 얕볼 만큼 내 실력이 우위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나도 이 자리에 오르려 목숨을 걸었으니, 쉽게 내줄 생각은 없다.”
넘버즈들의 번호변동이 크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압도적인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치열하게 싸우게 되고 서로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들 강자고 비슷한 실력이다 보니 확신이 서지 않는 한 도전을 안 하게 되는 것.
“문제는 그거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거.”
“음?”
궁금해 하는 드레드에게 어깨를 으쓱 해보인 로렌스가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에 웃으며 말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곧 시작될 수 있으니까.”
드레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저택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둘러 진행한 작전이라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물론 습격이 있다면 말이다.
저쪽에서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던 간에 저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다.
자신이라면 절대 시작도 하지 않을 이유가 저 안에 있었으니까.
“고생했겠군.”
드겔의 말에 루퍼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19호에게서 알아낸 자료를 보고 있는 드겔.
솔직히 말하면 어제 저녁 술을 마시다가 이곳이 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건 드레드 덕이었다.
그가 사람을 보내 내일 왕이 모든 기사를 소집했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짧은 편지를 받아서였다.
갑작스럽게 계획 된 것이고 그것을 실행하려면 왕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
호기 좋게 모든 기사를 소집하며 예외는 없다고 큰소리친 왕을 설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눈앞의 드겔은 그 예외를 만들어 냈고 이번 작전에 직접 나섰다.
솔직히 그가 직접 참여 할 줄은 몰랐다.
“헌데···.”
드겔이 말끝을 흐리자 루퍼드가 물었다.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치 짜 맞춘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그 말에 루퍼드는 속으로 뜨끔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
19호는 혀가 없어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른다. 쓸 줄 아는 것은 이상한 기호인데 암호였다.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이는 단 한명.
로렌스뿐이다.
암호 표를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소통은 제한적이었고, 글을 가르치는 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하는 수 없이 그림도 그리게 하고, 말은 알아들으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게도 했다.
그리고 자백을 토대로 유추한 것이 더 많아 그것도 따로 기록을 해 놨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만든 심문 자료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회유와 심문과정을 중간 중간 왕에게 보고는 했지만, 자세한 것은 말하지 않아 드겔이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인데 보자마자 이상한 점을 집어내고 있었다.
“소통이 제한적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유추한 것이 더 많은 것은 어쩔 수 없으나, 그걸 확인하는 것도 곤란했습니다.”
루퍼드의 말에 드겔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마지막장에 나온 그림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확실히 확인하기 쉽지는 않겠군. 허나.”
드겔이 고개를 돌려 루퍼드를 봤다.
“경은 너무 완벽한 것을 좋아하는군.”
“아무래도 가볍게 움직일 사안도, 상황도 아니니까요.”
“그렇기는 하네만 이정도면 우선 움직여야 하는 것이네. 배신자일지도 모르는 자들이 아무 제약 없이 왕께 접근할 수도 있는 상황이니.”
드겔이 들고 있던 자료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이건 우리에겐 전쟁이네. 전쟁에선 적의 수도를 점령하거나 왕을 잡으면 승리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바꿔 말하면 이쪽이 그리 되면 지는 것이네. 왕을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뭘 해도 진 것이네.”
“음.”
“경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네. 신중한 것도 완벽한 것도 좋지만, 때론 과감해야 할 필요가 있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드겔이 19호를 보자 그가 얼른 눈을 피했다.
“날 보거라.”
머뭇거리던 19호가 눈을 맞추자 웃으며 말했다.
“너와 같은 이가 몇인지 모른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많겠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널 죽이러 올 것이 확실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헛걸음 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그때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드겔이 테이블 위에 있던 활과 화살 그리고 단검을 19호 쪽으로 밀었다.
“어차피 그쪽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너도 알 것이다. 그러니 확실하게 우리 쪽으로 붙어라. 그리고 확실히 우리 편임을 증명해라.”
“무기를 주어도 괜찮겠습니까?”
드겔이 고개를 돌려 루퍼드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자는 갈 곳이 없네. 원하는 것이 자유이고 새로운 삶이라면 우리의 적이 없어져야 가능 할 일. 그러니···.”
드겔이 다시 19호를 봤다.
“너 자신을 위해 싸워라.”
자신이 쓰던 무기를 내려다보는 19호가 그걸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드겔이 다시 말했다.
“습격이 없다면 한 시간 후에 움직일 것이네. 허나 이렇게 나서 주는 것은 마지막이네.”
“예.”
“그나저나 오랜만에 마탑주의 얼굴을 보겠군.”
그는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다고 부탑주에게 일을 맡기고 쉬고 있었다.
마탑에 대한 조사도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형식적이었을 뿐.
루퍼드를 비롯한 젊은 넘버즈들이 쉽게 움직이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됐다.
그만큼 마탑은 특별한 위치에 있었기에 건드리기가 까다롭다.
며칠 전이었다면 자신이 말을 꺼내도 고민하다 유야무야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제 궁 밖으로 나선 에런을 봤을 때, 처음 왕이 됐을 때의 그를 보는 듯 했다.
지금이라면 변화를 줄 수 있다.
그때.
창문이 깨지며 뭔가가 방안으로 날아들어 왔다.
루퍼드는 바로 몸을 돌리며 검을 빼 그것들을 쳐냈다.
벽에 부딪쳤다 떨어지는 화살.
“괜찮···.”
돌아서서 드겔에게 괜찮으냐고 물으려 했지만 괜한 걱정.
앉아있는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는 화살 두 개를 보고 역시라는 라는 생각이 들었다.
뚝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 잡혀있던 화살이 부러져버렸다.
드겔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어디 손님을 맞아해 볼까?”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로렌스에게 고글하나 줬습니다.
길리안과 넘버즈들의 본격적인 활약은 다음 편부터~
내일 하루 쉬면서 글 쓰고 월요일 날 두 편들고 찾아뵙겠습니다.
음, 연참대전 완주 가능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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