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3)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말 위에서 고개를 숙이는 루퍼드를 보며 인사를 받은 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로구나. 네가 날 마중하러 온 것이냐?”
“예.”
“아들의 호위를 받는 것도 괜찮겠지.”
다시 말을 모는 그의 옆으로 다가간 루퍼드가 다시 그를 봤다.
자신의 아버지인 에드가 폰 히스클리프 후작.
갑옷을 입은 모습을 별로 보지 못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기사가 지녀야 할 전투기술은 딱 기본 정도.
어차피 후작이 직접 나서 싸울 일은 없다고 봐야 했다.
개인의 전투력이 낮을 뿐 다른 능력과 수완은 뛰어난 편이었다.
“수도에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하더구나.”
그 말에 루퍼드는 대답 없이 씁쓸하게 웃었다.
변화는 이제 막 시작한 단계여서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도 많고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개인적으로는 넘버즈 승급 결투도 잡혀 있어서 요즘처럼 바쁜 날이 없었고 하루가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 또 뒤통수를 얻어맞는 일이 생겼다.
그 때문에 적들을 잡으러 또 뛰어다녔지만, 성과는 없었고 시간만 빼앗겼다.
영주회의 전에 급하게라도 마무리 지으려던 몇 가지 일도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영주들을 맞이해야 하는 상황이 됐고 지금도 급하게 마중을 나온 것.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이구나.”
“예.”
“그런 상황에 넘버즈들의 승급 대결을 한다니. 재미있는 일이구나.”
정말 재미있어서 하는 말이 아님은 루퍼드도 알고 있었다.
“볼란트 경의 도전을 받아들였다고?”
“그렇습니다.”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
“무슨 말씀이신지···.”
“실전 대결이라고 들었다만.”
“그렇습니다.”
“그런 일에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지 묻는 것이다.”
“제겐 있습니다.”
“흐음.”
잠시 침묵하던 에드가 후작이 다시 말했다.
“이제 그쯤 하면 된 것이 아니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기사 놀이 말이다.”
“놀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 네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러고 있는 것이더냐? 그쯤이면 실력도 충분히 보였고 하고 싶은 대로 했을 테니, 이제는 돌아와 직접 영지를 맡아 보거라.”
루퍼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그를 보며 후작이 다시 말했다.
“놀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했나 보구나.”
낮은 한숨을 내쉰 루퍼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놀이처럼 즐겁기는 합니다. 하지만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즐겁다?”
“예. 얼마 전이었다면 아버님의 말씀에 별 이견 없이 따랐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흐음.”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놀이라 하셨으니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말해 보거라.”
“제가 아버님 밑에서 영주 놀이를 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뭐라?”
“위대한 가문에 태어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주신 것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핏줄, 선조들이 이룬 영광과 가문의 후광이 늘 저를 밝게 비춰주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루퍼드가 아버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모든 것이 날 때부터 제게 주어진 것일 뿐. 후작 가의 어디에도 제 손으로 이룬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나의 아들이고 히스클리프 후작 가의 직계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감사한 줄 몰랐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게 싫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문의 아카데미가 아닌 골든 로드에 들어갔고, 왕실 기사의 길을 택했습니다. 저 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이루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고 그렇게 넘버즈 No.2 까지 올라왔습니다.”
후작은 담담한 눈빛으로 아들을 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한동안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룰 만큼 이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자만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달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더냐?”
“길리안 경을 아십니까?”
“오는 동안 들어보았다. 베어드가의 막내를 죽이고 No.9가 되었다지? 그가 그리 대단하더냐?”
“그는 정말 대단합니다. 보고 있으면 부러울 정도로 눈이 부십니다.”
“뭐라? 네가 무엇이 부족하여 그 어린 평민 출신 기사에게 부러움을 느낀다는 말이냐?”
“모든 것을 다 가진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그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꿈입니다.”
“꿈?”
“예. 제가 아직 찾지 못하고 갖지 못한 꿈을 그는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그 꿈을 이뤘습니다. 아버님께 꼭 여쭙고 싶었습니다. 아버님께서는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허허, 꿈이라···.”
“영지를 발전시키고 후작 가의 영광을 이어가는 것 외에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흐음.”
잠시 생각하던 에드가 후작이 말했다.
“그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제게는 꼭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럼 너의 꿈은 무엇이더냐?”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꿈이 생기면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문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 같구나.”
“예.”
“왕의 기사로 만족한다는 것이냐?”
“예.”
“허허.”
“처음에는 제 능력과 제힘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이고 갈 수 있는 길이라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길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가 없구나.”
“아버님의 밑에 있을 동안에는 가문으로 돌아가 작은 영지를 맡는 것은 괜찮습니다.”
“네 형의 밑에는 못 있겠다는 말이냐?”
“예. 형은 저를 두려워합니다. 큰 형은 저를 품을 수 없고 저도 절 두려워하는 형을 섬길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돌아가면 가문의 비극을 보게 되실 겁니다.”
“음···.”
에드가 후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가문을 이을 첫째가 가장 뛰어나면 더없이 좋겠지만, 먼저 태어났다고 해서 가장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형제간의 갈등은 어느 가문에나 있는 것이었고 그건 후작 가도 마찬가지.
아들 중에 가장 뛰어난 것이 루퍼드였고 막내가 욕심을 낸다면 자신의 사후에는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저는 에스토 왕가에 충성을 맹세한 히스클리프 후작 가의 사람으로 왕가의 기사가 되어 왕을 섬기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가문에서 받은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형제의 피를 보면서까지 더 욕심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정말로 기사가 되었구나.”
아버지의 말에 루퍼드가 미소를 지었다.
“기사에겐 최고의 칭찬입니다. 아버님께 들은 그 어떤 칭찬보다도 기쁩니다.”
“어쩌면 네 꿈은 계속 기사로 살아가는 것일 지도 모르겠구나.”
그 말에 루퍼드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내게 바라는 것은 없느냐?”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혹시 가문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습니까?”
“없다.”
“다행입니다.”
“바라는 것을 물었거늘···.”
“이미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왕의 뜻을 지지하길 바라겠구나.”
“예.”
“그냥은 아니 된다.”
“예? 그럼···.”
“가장 아끼고 뛰어난 아들을 빼앗겼는데 그냥은 넘어갈 수 없지 않겠느냐?”
“하하하하.”
“공주들의 혼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
“아직은 마음에 드는 여자가 없습니다. 혹여 생기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직접 고르겠다는 말이구나.”
“예.”
에드가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마.”
“하하, 제가 평민이라도 데려오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그건···.”
잠시 생각하던 후작이 다시 말했다.
“너의 눈에 띌 정도라면 그만한 가치가 있겠지.”
의외의 대답에 루퍼드가 놀란 표정으로 아버지를 봤다.
“그리 볼 것 없다. 그만큼 너의 뜻과 결정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었고 일가를 이룰 자격이 네게는 있다. 네가 내게 인정받고 싶어 했던 것도 알고, 가문의 후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것도 알고 있다. 나는 네가 그 자리에 오르도록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한 적이 없으니, 지금 네가 이룬 것에 자부심을 가져라.”
“감사합니다.”
에드가 후작은 아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에런 왕은 복이 많구나.”
“하하하, 요즘 왕께서는 매일 주름이 늘어나고 계십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 아마 처음 있는 일이지?”
“예?”
“그간 수도에서 일어난 일도 영주 회의에 참석하는 영주들이 기습을 받은 것도 지금까지는 없었던 일이란 말이다.”
“그렇습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처음 겪는 일에는 대처하기 힘들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니 대비하기도 힘들다.”
“그렇지요. 얼마 전에 함정을 파서 적들을 조금 쳐내기는 했지만, 그 또한 일부러 먹이를 던져준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가장 즐기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뜬금없는 물음이었지만 루퍼드는 별로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사냥이시지요.”
아버지인 에드가 후작은 기사들과의 사냥을 무척이나 즐겼다.
어릴 때는 형제 모두를 항상 사냥에 데리고 다닐 정도여서 잘 알고 있는 일.
“그렇지. 늑대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느냐?”
“그야 당연히 늑대가 사는 숲으로 가야겠지요.”
“그렇다. 그럼 적을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적의 본거지를 알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나도 늑대가 있는 숲은 알지만, 그 숲에 늑대의 굴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사냥은 가능하지.”
“음.”
“늑대를 발견하고 쫓기 시작해 잡는 것은 운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나타나기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쫓기 시작하는 것은 사냥이 아니지.”
“그야, 그렇지요.”
“사냥을 나가면 그곳 사람들에게 늑대를 어디에서 보았는지 묻는다. 보통은 그곳부터 시작하지만 그게 한두 군데가 아니지. 그래서 몰이꾼과 여러 기사와 함께 몰이 사냥을 한다.”
“음.”
“지금 수도를 어지럽히는 적들은 어떠하냐? 어차피 멀리 있지는 않을 것이다. 수도 근방 어딘가에 굴을 파놓고 사는 늑대라고 생각하면 편할 수도 있다.”
대답 없이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루퍼드를 한동안 보던 에드가 후작이 루퍼드의 어깨를 툭 쳤다.
“지금 네가 해야 하는 일은 에드가 폰 히스클리프 후작을 수도까지 의전 하는 것이다. 다른 일은 나중에 하려무나.”
그 말에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이렇게 편하게 대해주는 것도 어릴 때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묻겠다. 네가 한 말에 정말 후회는 없는 것이냐?”
“없습니다.”
“네게 돌아갈 것들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말 괜찮겠느냐?”
“예.”
“그럼 너에게는 다른 것을 주어야겠구나.”
“더 바라는 것은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주신 것과 그걸 인정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게 가문에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구나.”
“예?”
“아니다. 네가 너무 커버린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권력의 힘을 잘 알고 물려받을 것도 많다.
그런데 그걸 포기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확실히 막내인 루퍼드가 너무 커버린 느낌이었고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왕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너의 뜻도 있느냐?”
“물론입니다.”
“그럼 반대만 할 수는 없겠군. 너의 뜻이 들어간 국왕의 개혁을 지켜보마.”
“가문에는 피해가 가지 않을 겁니다.”
“영향은 주겠지.”
“좋은 영향일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를 보고 루퍼드는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는 동안 고민을 했었는데 의외로 이야기가 쉽게 풀려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좋다. 너에게 줄 것을 결정했다.”
“아직 아버지의 시대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상속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내가 가진 것 중 주고 싶은 것을 나의 아들에게 줄 뿐이고, 내가 주면 넌 받으면 되는 것이다.”
“예.”
“드니로프를 네게 주마.”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연참은 무슨... ㅠㅜ
아무튼, 루퍼드 부자는 나름 좋은 분위기로~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