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장(6)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길리안은 동부관청을 나와 한스를 보고 씨익 웃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받으세요.”
“이건...”
“신분 패와 평민임을 증명하는 서류입니다.”
라첼아저씨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름만 댔는데도 일처리를 빨리해줬다. 거기에 은화 몇 개를 쥐어줬더니 신분 패를 만들어오는 것도 초스피드였다.
엉겁결에 그걸 받아드는 한스의 손에 작은 주머니도 올렸다.
“이정도면 어디 가서 자리 잡고 사는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딱히 갈 곳이 없으면 라이라프 영지에 가보세요. 그 돈으로 땅도 많이 살 수 있을 겁니다. 좋은 사람들도 많고요.”
길리안의 말에 멍하고 있던 한스가 입을 열었다.
“제게... 제게 왜 이렇게 해주시는 겁니까요?”
“저는 어제 아저씨가 제게 한 말을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그 마음도 믿고 싶습니다. 그 정도면 대답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제 실수를 사과하는 의미이기도하고, 그냥 좋은 일 한번 했다고 제 스스로 만족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저씨는 이제 자유인입니다. 그러니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단 죄는 짓지 마세요. 그런 식으로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말을 남기고 멍하니 서있는 한스를 두고 돌아섰다.
“아 성은 제 마음대로 붙였습니다. 마음에 안 들어도 선물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평민이라고 해도 성이 없는 이들은 많다.
예전부터 성이 있는 이들이 아니고서는 딱히 성을 쓰지 않는다. 이유는 성을 등록하려면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까.
길리안은 손을 흔들어 보이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돌아섰다.
“신전에 가면 이마에 있는 노예문양도 지울 수 있을 겁니다. 오해받기 쉬우니까 꼭 지우세요.”
그리고 한스가 뭐라 말하기 전에 다시 돌아서 걸었다.
어젯밤에 그에게 많은 얘기를 들었다. 그가 살아온 얘기였다.
한스는 평민 집안에 태어나 자랐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를 했는데 가게가 잘 안 되서 귀족에게 돈을 빌려 쓴 것이 화근이었다.
장사는 안 되고 빚은 늘고 갚을 방법은 없고, 결국에는 몸으로 때워야했다. 결국에는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농노로 전락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이런 이야기는 꽤 흔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불행의 끝은 아니었다. 신분이 낮아지고 농노가 되었다고 해서 빚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어린 여동생이 둘 있었는데 그들을 노예상인에게 팔려고 했단다.
두고 볼 수 없었던 한스의 아버지는 그에게 동생들을 데리고 도망치라고 했고, 그 말에 따라 도망쳤지만 그들의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는 않았다.
결국에는 잡혀서 아버지는 매를 맞아죽고, 한스와 동생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그렇게 노예로 전락해 살았던 10년에 가까운 세월. 그리고 그토록 갈망하던 자유를 얻었던 이야기. 도둑질을 당해 잃어버린 신분 패와 증명서류.
지독히도 운이 없는 한사람의 이야기였다.
그의 말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 되게 들렸다.
그 이야기의 마지막은 길리안이었다.
문제는 길리안이 들이닥쳤을 때 현상범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이고, 공교롭게도 한스가 현상수배범과 너무 닮았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길드에서 건네준 정보에서도 없던 인물이기는 했었다.
한스는 잃어버린 신분 패와 서류를 찾기 위해 갔었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는 잡았을 때도 들었고, 끌고 다니는 동안에도 들었다.
그때는 믿지 않았는데 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보니 어느 정도는 사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찜찜한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그에게 자유를 주기로 한 것이었다. 라첼이 그를 길리안에게 보낸 것도 일단은 현상범이 아니라는 말이니 말이다.
다만 신분을 증명하고, 스스로의 말을 증명할 명확한 증거가 없을 뿐.
그리고 노예를 어떻게 할지는 오롯이 주인의 몫이다. 죽이건 살리건 자유를 주건 모든 게 주인의 뜻이니까.
그래서 그에게 자유를 주었다. 실수를 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으니까.
길리안은 멍하니 서있는 한스를 뒤로하고 시내의 중심가로 향했다.
오늘도 역시나 지도를 동반자로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수도의 번화가에는 없는 게 없었다.
신기한 것도 많고 구경할 것도 많았지만 우선은 볼일이 있었다.
두리번거리던 길리안이 향수가게를 보고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으음... 이건...”
“힘들겠습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대답보다는 향을 맡는 것에 열중하던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아주 오래전에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병을 봐도 그렇고... 그리고 이제품은 칼렌베르크 왕국에서 더 유행했을 겁니다. 거기서 만들어졌으니까요. 시중에 막 돌아다닐만한 물건은 아닙니다. 제 기억으론 고급향수로 가격이 상당했으니까요.”
“그럼 만들 수 있는지 말씀해주세요.”
“으음... 고급제품들은 저마다 만드는 법이 따로 있는지라...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는 대충 알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같은 향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음...”
길리안은 주인의 말에 실망했다.
결국에는 힘들다는 말이니까.
어머니가 쓰셨던 향수가 구하기 힘든 것인 줄은 알고 있었다. 영지에 자주 들리는 친분 있는 상단사람들에게 부탁해도 구할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원래 그들이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물건이 아니 여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잡화점에서 파는 싸구려 향수도 아니었고 다른 왕국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큰 도시에 들릴 때마다 향수가게를 찾아 물어봤지만 방금과 비슷한 대답만 들었을 뿐이었다.
구하기 힘들다고 해도 설마 수도에서도 구할 수 없을 줄은 몰랐다.
“혹시 구할 수 있을만한 곳을 아십니까?”
“칼렌베르크와 무역을 하는 상단에 의뢰하지 않는 한 아마 구하기는 힘들 겁니다. 하지만 의뢰해도 향수한 병을 구하는 것이라면 시간도 무척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들 겁니다.”
“그럼 만들 수 있는 분은...”
“수도 최고의 기술자인 제가...”
로 시작되는 자신의 자랑.
“제가 만들지 못하면 수도에 어느 누구도 만들지 못할 겁니다.”
라는 결론.
지금까지 들른 향수가게에서 지겹게 들은 대사였다.
결론은 구하기도 힘들고 만들기는 더 힘들고, 자기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길리안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상단에 의뢰하는 방법밖에는 없어보였다.
하지만 그런다고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오래전에 유행했던 것이고 아직까지 만들어지고 있는지는 모르는 것이니까.
게다가 상단이 칼렌베르크까지 왕복하는데 몇 달은 족히 걸린다. 구할 수만 있다면야 시간이야 좀 걸려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했는데도 구할 수 없으면 어쩌나하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길리안에게 주인이 손바닥을 비비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선물을 하실 거라면 저희 가게의 최고의 상품을 소개해드리지요. 찾으시는 향수에 비해 향도 좋고 지속시간도 깁니다.”
주인이 이렇게 친절하게 말하는 것도 다 돈의 힘이었다.
길리안의 옷차림은 부유한 도련님이나 귀족의 차림이 아니다. 아직까지 여행을 하며 입던 옷에 큰 짐까지 짊어지고 다녔으니까.
차림이나 등에 메고 있는 검을 보면 잘 봐줘야 용병이나 여행자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처음에 들어간 가게에서는 하도 시큰둥하게 대해서 필요도 없는 향수를 하나 샀다.
계산을 하려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열면서 보인 금화.
그걸 보고 주인의 태도가 싹 변했다.
그다음 가게부터는 그냥 돈주머니를 주인에게 보여주고 대화를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술술 이었다.
다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을 뿐.
“어머 이게 누굴까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길리안이 돌아섰다.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주인은 벌써 여인의 앞에 허리를 90도로 꺾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작부인. 저희 가게를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괜찮은 향수가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좀 보여주세요. 그리고 잠시 대화를 방해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을 닫고 물러났다.
“반가워요 길리안.”
그러면서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는 그 손을 보고 뭔가 했다. 그러다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음... 다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부인.”
길리안이 그녀가 내민 손을 살짝 잡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기본적인 것을 배우기는 했지만 이런 식의 인사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과 행동은 조금 어색했다.
그런 길리안을 보는 이베트는 재미있다는 듯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소리 없이 웃었다.
“향수에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아하하.. 관심이라기 보단...”
그러다 뭔가 생각이 났는지 뒤로 돌아 주인이 냄새를 맡겠다고 열어놓았던 병은 잽싸게 닫았다.
“아... 그 향기를 찾아다녔군요.”
“예. 그보다...”
“손수건 말인가요?”
“아..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런데 어떡하죠? 만날 줄은 몰라서 집에 두고 왔군요.”
“그러셨군요.”
“멀지않으니 잠시 후에 같이 가도록해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 오래 가지고 있는 것도 실례니까요.”
그 말에 길리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감사합니다.”
“하지만 잠시 기다려주겠어요? 마음에 드는 향수를 찾고 싶어서요.”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고 한쪽에 물러나 기다렸다.
그런데 자작부인의 잠시는 생각보다 무척이나 길었다.
향수의 냄새를 맡아보고 살짝 뿌려보고 가져다주는 차를 홀짝이고, 함께 온 다른 부인들과 얘기하고, 그러다 길리안을 불러 향을 맡아보고 어떠냐고 물어보고 등등.
향에 대해 물어오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의 좋다는 말뿐이었다.
“이건 조금 마음에 드는군요.”
그 말에 주인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그리고 가게주인만큼 길리안도 속으로 기뻐했다.
한참동안 이 향수 저 향수 하도 냄새를 맡았더니 코가 마비되고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으니까.
“이걸 내게 선물해줄 수 있을까요?”
향수병을 흔들어 보이며 말하는 자작부인을 보며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농담이건 진담이건 간에 빨리 나가고 싶었고, 손수건도 빨리 돌려받고 싶었다.
‘더럽게 비싸네.’
그 작은 향수병에 담긴 먹지도 못하고, 공기 중에 뿌려 머리 아픈 냄새를 풍기는 것이 10골드라는 말에 뒤로 넘어갈 뻔 했지만 빨리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쩝 이게 밀이 몇 수레야?’
머릿속에 밀을 가득 실은 수레들이 지나갔지만 이미 10골드는 주인의 손으로 들어간 후였다.
향수를 손에 쥔 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리고 돌아서 나가는 자작부인의 뒷모습을 보며 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작부인은 무척 기뻐보였다.
2천 골드를 아무것도 아닌 듯 주고 가던 사람이 10골드짜리 향수를 선물 받고 저렇게 환하게 웃는 게 조금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것도 자의로 선물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여자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라더니...’
형이 한말을 떠올리며 길리안은 걸음을 옮겼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소제목을 정하고 글을 쓰는 스타일이 아닌지라...
솔직히 글 쓰는 것보다 이게 더 어려운.... 소제목을 정할 때마다 고민이...
에고...
Comment '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