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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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드십시오.”
“그만 되었다. 이제는 먹는 것도 힘에 부치는구나.”
“저를 봐서 조금만 더 드시지요.”
“허허. 이리 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가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함입니다.”
“나를 돌보지 말고 왕국을 돌보아라.”
“그 또한 소홀히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리안에게 보내는 선물은?”
“이미 출발하였습니다.”
“내가 기안으로서가 아닌 오라비로서 동생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엠버 백작.”
그의 부름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시종장 엠버 백작이 말했다.
“기안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모두 준비했습니다. 휴란 백작이 기안의 선물을 들고 며칠 내로 에스토의 국경을 넘을 것입니다.”
그 말에 기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되었다. 내 사후에는 너의 뜻대로 하여라.”
“아버님께서 원하신다면 에스토는 그대로 둘 것입니다.”
“아니다. 죽은 자의 망령이 왕국을 좌우해서는 아니 된다. 왕이 생각해야 할 것은 첫째도 왕국이고 둘째도 왕국이고 마지막도 왕국이다.”
“늘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국에 위협이 된다면 혈연으로 맺어졌다 해도 망설여서는 아니 된다. 어차피 혼인 한 번으로 개선될 관계가 아니다. 전쟁을 해야 한다면 망설일 필요는 없다.”
“예.”
“다만 아리안은 내게 딸 같은 동생이고 네게는 고모다. 그러니 살길은 열어주어라. 그거면 되었다.”
“그러겠습니다.”
“뤠벤과 크랄. 두 공작 가의 힘이 너무 강대해졌다. 그들의 힘을 줄이고 균형을 맞춰야 할 것이다.”
“예.”
“윈서와 파멜 공작을 가까이 두라. 그들은 기안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니.”
“예.”
“눈앞의 이익을 좇지 말고 더 먼 곳을 보아라. 에스토 보다는 칼랜베르크를 더 경계해야 한다. 가급적 국경을 맞대지 말고 만약 그리된다면 모든 힘을 동원해 눌러야 할 것이다.”
“예. 에스토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검을 녹슬었고 기사는 용기를 잃었다 들었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확신은 금물이다. 녹슨 검은 갈아서 날을 세우면 되고 용기 있는 자는 어느 시대에도 있었다. 용기 있는 자 한 명이 만 명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라.”
“예.”
“천년의 가문이고 칠백 년을 이어온 왕국이다. 로체 위에서 기안이 선조가 널 보살핌을 기억하여라. 곧 나도 그리 갈 것이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로체는 기안의 수도 마룬힐에서 보이는 카라린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였다.
로체는 여름에도 항상 눈에 덮여있고 구름에 가려 그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 많지 않았다.
기안 사람들은 천국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여겼고 왕인 기안의 사후 그곳에서 천국의 문을 열고 안식을 청한다고 생각했다.
늙은 기안이 앙상한 손가락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반지를 빼며 말했다.
“손을 내밀어라.”
“아직 받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 명이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아들이 손을 내밀자 기안이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손가락에 끼워줬다.
“기안의 빛을 너에게 주마. 이제는 네가 63대 기안이다.”
“왜 이것을 벌써 제게 주십니까? 어찌 벌써 유언 같은 말을 남기시는 겁니까?”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직 말할 힘이 있을 때 네게 주려는 것뿐이다.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것은 이제 모두 주었다.”
“저는 아직···.”
“내일 당장 죽지는 않을 테고, 날 보낼 준비를 할 시간은 있을 것이다.”
“음.”
“기안은 제국을 칭하고 있다. 하지만 칭하는 것과 모두의 인정을 받는 것은 다르다. 나는 왕으로 태어나 왕으로 살다가 왕으로 죽는다. 네게 물려주는 것 또한 왕위다. 황제가 되어라. 기안을 진정한 제국으로 만들 거라. 너라면 그리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반드시 그리 만들겠습니다. 그러니 조금 더 지켜봐 주십시오.”
“로체에서 널 지켜볼 것이다. 언제나 네게서 눈을 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의 꿈이고 나의 전부이다. 널 통해 기안은 계속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님.”
“다만 널 닮은 황자를 보고 가지 못할 것 같아 아쉽구나.”
“곧 황자가 태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만 힘을 내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것은 그것 하나뿐입니다.”
“그럼 이제 나를 쉬게 해주겠느냐? 말을 하는 것도 이제는 힘에 부치는구나. 가서 기안의 일을 하고 왕국을 돌보아라.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리고 눈을 감는 아버지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또 오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성큼성큼 걸어 왕의 침실을 빠져나갔다.
“기안이 되신 것을···.”
“축하라면 이르다.”
“허면 대관식은···.”
“모든 것은 아버님의 사후에 해도 늦지 않다.”
63대 기안이 된 그의 말에 엠버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기안은 왕의 이름과 왕국의 이름이 같다.
기안 가문의 전통이 왕국을 세운 후에도 그대로 이어진 것.
그건 왕국의 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처 가문을 잇는 자는 가문의 성을 이름으로 쓰고 그가 가문이 되었다.
“얼마나 남으셨는가?”
“그것이···.”
말을 망설이는 백작을 한 번 더 다그치자 그가 말을 이었다.
“한 달을 넘기기 힘드실 거라고···.”
“한 달인가.”
기안이 복도의 창밖으로 보이는 로체를 바라봤다.
그를 보며 엠버 백작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63대 기안.
이제 스무 살이 된 그는 62대 기안이 뒤늦게 얻은 황자였다.
황후와 11명의 황비에게서 얻은 수많은 자식들은 모두 딸이었다.
마흔 중반에 들어서야 얻은 유일한 황자는 그에게 보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궁에서만 아들을 키우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전장에 항상 데리고 다녔고 모든 것을 직접 가르쳤다.
기안의 기대만큼 황자는 잘 성장했다.
기안이 병을 얻고 그것이 고치기 힘든 병임을 알고 제일 먼저 한 것은 황위를 물려주기 위한 선행 작업이었다.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은 모두 쳐냈고 한동안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기안의 병세가 악화 돼 15살의 나이에 황자가 국정을 돌보기 시작했고, 권력을 점차 황자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젠 죽음을 앞두고 황자에게 인장을 물려 준 것이다.
기안이 쏟은 애정만큼 황자였던 그가 아버지를 생각하는 마음 또한 대단했다.
식사를 거르는 일이 잦아지자 식사 때마다 직접 시중을 들기 시작했고, 그것이 벌써 일 년이 넘었다.
기안의 역사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부자지간이라 할 수 있었다.
“황후의 출산은 언제인가?”
“아직 반년 정도는···.”
“늦군.”
“에스토의 일은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들의 수도에서 일어난 불상사가 페슈미안 공국이 벌인 일이라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에스토에서 그에 대한 입장을 우리나 공국에 알려온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 그 후에 대응해도 늦지 않겠지. 공왕을 불러들이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겠다.”
“예.”
“아니, 공작들도 모두 오라하라. 기안의 마지막 길을 지켜봐야 할 의무가 그들에겐 있으니.”
“그리하겠습니다. 허면 장례를···.”
“그건 아직.”
“예.”
그리고 한동안 말없이 로체를 바라보던 기안이 돌아서며 말했다.
“갓난아이를 준비하라. 사내로.”
“크리스, 크리스! 내 아들 크리스. 흐흑.”
크리스가 누워있는 관을 붙들고 오열하는 그의 어머니를 보며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자식이 있기에 그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배다른 동생이긴 해도 어쨌든 형제이니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은 사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죽어서 그나마 별 이야기 없이 넘어간 것이지 살아 있었다면 베어드 백작 가의 명예는 땅에 떨어졌을 테니까.
며칠 동안 랜스에 독을 발랐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갔지만, 공식적으론 아무런 발표가 없었다.
그리고 다행히 쓰러졌던 상대도 부상에서 회복해서 건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저 소문으로 끝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길리안이 결투에 관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정도.
‘그냥 영지로 보내버렸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랬다면 저 여자는 이곳에 오지 않았을 테니까.
크리스는 형제라고 하지만 그의 어머니에게는 그다지 좋은 감정은 없었다.
아버지와 다른 형제들 사이를 갈라놓은 장본인이기도 했으니까.
우는 소리를 한참을 들었더니 슬슬 질리기 시작했고, 오열하는 모습마저 가식적으로 보였다.
다니엘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크리스의 시체를 내려다보는 아버지를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브래들리 폰 베어드.
무척이나 아끼던 막내아들의 죽음이 큰 충격이겠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영주들이 속속 수도에 도착하고 있는 가운데 유일하게 베어드 백작 가에는 아무도 마중을 보내지 않았다.
그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여차하면 베어드 가문은 배제될 수도 있는 상황.
저 여자가 지금 상황을 이용해 아버지를 흔들기 전에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은 듣고 싶지 않다.”
“가문을 위해서 꼭 들으셔야 할 이야기입니다.”
“하아~. 조금 기다리거라. 슬픔이 가시질 않는구나.”
로렌스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맡에 앉아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움직여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넘겨줬다.
레오폴드의 노예사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자아이.
먼저 수도로 보내 제대로 된 치료를 받게 했고 지금은 다행히 괜찮아졌다는 보고를 받고 이렇게 온 거였다.
“언제까지 자는 척을 하고 있을 생각이냐?”
눈을 뜨지 않고 오히려 더 꼭 감는 아이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내 사라졌다.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아이를 보다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널 해칠 생각도 때릴 생각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마. 그러니 음···.”
말을 해도 별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 들어오라고 하니 부단장 그란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노예상인을 찾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일단은 그자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 아, 이건 저 아이의 기록입니다. 생각보다 멀리서 왔습니다. 베이가 왕국 너머에 있는 리베란에서 여기까지 왔더군요.”
그란스가 건네는 것을 받아 든 로렌스가 눈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저 아이 깨어있는 것 아닙니까?”
“네. 절 무서워하는군요.”
“하하, 단장님이 조금 무섭기는 하지요.”
“그렇습니까?”
“농담입니다. 아마 단장님이 무서워서가 아닐 겁니다.”
“그러면···.”
“죽음의 공포는 어른들도 극복하기 힘든 겁니다.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려 와서 그런 일까지 겪었으니, 저 아이에겐 이 세상이 지옥일 겁니다.”
“음.”
잠시 생각하던 로렌스가 그란스를 보고 말했다.
“전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단장님께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 말에 웃어 보인 그란스가 아이를 번쩍 안아 들었다.
이불이 벗겨지자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 보였다.
비명을 지르면서 때리고 밀쳐냈지만 그란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괜찮다고 말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자 울음은 더 심해졌지만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엉엉 우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는 그란스를 보며 로렌스가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시군요. 말을 알아듣는 모양입니다.”
“말을 알아듣는 게 아닐 겁니다. 우리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왔지만 그곳에서도 아이가 울면 안아주기는 하겠지요. 저는 나가서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으니 아이 좀 받아주십시오.”
그란스가 건네는 아이를 엉겁결에 받아든 로렌스가 말했다.
“아이를 안아본 적이 없어서···.”
“갓난아이도 아니니 그대로 안고 계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가려는 그란스의 팔을 로렌스가 잡았다.
“언제까지 안고 있어야 합니까?”
“울음이 그칠 때까지 안아주십시오.”
“음.”
“단장님께서 살린 목숨이니 책임도 지셔야지요.”
그리고 웃으며 나가버리는 그란스를 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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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배쨰님님 추천 감사합니다.
연참으로 보답하고 싶은데...
주말에 연참을 한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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