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1장(1)
“제일먼저 입장을 하게 되실 테고, 첫 파트너와는 무조건 춤을 추셔야할 겁니다. 발트의 봄이라는 곡으로 시작할 테니 기억해두십시오. 상대가 정 신경 쓰이시거든 하녀들 중 한명이라 생각을 하시거나 수련할 때를 떠올리십시오. 그 후엔 파트너를 너무 자주 바꾸실 필요도 춤을 많이 추실 필요도 없습니다. 대화를 해보시고 가장 편안한 느낌을 주는 여성과 몇 곡만 추시고, 그다음부터는 그냥 파티를 즐기는 쪽으로 가십시오. 대화를 리드하시는 것이 좋지만 힘드시다면 상대의 말을 관심 있게 들어주는 쪽을 택하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긴장하지 마시고 연습하신대로만 하시면 충분히 파티의 주인공이 되실 겁니다.”
걱정이 되는 듯 또다시 당부하는 집사의 말에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멈추자 집사가 먼저 문을 열고 내려 대기했다.
걸어서 몇 분 걸리지도 않는 거리를 굳이 마차를 타고 가야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집사 때문에 이렇게 타고 온 것이었다.
자신만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입구에서부터 쭉 밀려있는 마차의 행렬 때문에 순서를 기다려 들어오느라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일 테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어? 길리안! 바로 우리 뒤에 있었구나.”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그렉을 보고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그렉의 뒤로 케빈이 막 마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다가온 그렉이 길리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오 신기하게 이 녀석은 뭘 입혀놔도 잘 어울린단 말이지.”
확실히 아카데미의 생도정복은 길리안에게 잘 어울렸다.
그렉의 옆에 있던 케빈이 길리안에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딱 봐라. 일단 키가 되잖아? 그리고 이만하면 미남은 아니어도 봐줄만하게 생겼지. 체격 좋지, 비율 좋지. 그러니 무슨 옷을 입혀놔도 당연히 어울릴 수밖에. 이런걸 보고 옷걸이가 좋다고 하는 거다.”
“지금 한 말은 네놈을 말하는 거냐? 아니면 길리안을 말하는 거냐?”
그 말에 케빈이 씨익 웃었다.
“딱 보면 모르냐? 우리 둘을 말함이지. 이렇게 같이 서있는 것만으로 한 폭의 그림 같지 않냐?”
“네놈이 껴있으면 그게 낙서지 그림이냐?”
“무식한 놈. 하긴 네놈이 예술을 어찌 알겠냐. 아무튼 우리 둘은 남자기숙사 213호 룸메이트 세트지. 작고 못생긴 네 녀석은 당연히 제외고.”
케빈의 말에 그렉이 인상을 팍 썼다.
“세트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네놈이 길리안이랑 비슷한 건 키밖에 없는데 퍽도. 눈깔 네 개 달고서 옆에 있어봐야 넌 그냥 조연이다. 조연.”
그런 그렉의 말에 케빈이 웃으며 내려온 안경을 검지로 밀어 올렸다.
“내가 잘생기진 않았지만 지적으로 생겼단 소리는 좀 듣는다. 솔직히 지적이기도 하고. 그리고 이런 파티에서는 관심 받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이 여러모로 좋은 거다. 멀리 떨어져 있어봐야 주변 풍경에 들러리밖에는 안 돼. 하지만 주연 옆에서면 네 말대로 조연은 되지. 하긴 네놈이 파티를 몇 번이나 다녔다고... 사교계에 대해 뭘 알겠냐.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쳇 그놈의 잘난 척은.”
“네 녀석도 참고하는 게 좋을 거다. 아가씨들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고 춤 한 번이라도 추고 싶다면 말이다.”
“오 길리안 옆에 있으면 가능하단 거냐?”
“물론 노력은 좀 해야 하지만. 일단 주변을 둘러봐라.”
케빈의 말에 그렉은 주변을 빙 둘러봤다.
삼삼오오 모여서 속닥거리는 여자들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오 여자들이 우릴 쳐다보는데?”
그 말에 케빈이 고개를 젓다가 길리안을 가리키며말했다.
“말은 정확히 해야지. 여기 있는 길리안을 쳐다보는 거고 덕분에 우리도 저들의 눈에 띄는 거다. 지금은 쳐다만 보고 있지만 파티가 시작되면 자연스레 몰려들게 돼있지.”
그러면서 눈을 감고 손에 꽃이라도 들고 있는 듯, 향기를 맡는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며 말을 이었다.
“흐음~ 마치 꽃향기에 이끌린 나비들이 모여들 듯이... 캬아.. 내가 말해놓고도 표현이 너무 시적이군. 그렇지 않냐?”
“아 이게 오기 전에 버터를 통으로 쳐 먹고 왔나. 향기는 무슨 땀 냄새겠지. 느끼한 자식아.”
그런 면박에도 케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무튼 직접적으로 대쉬하는 레이디들도 있지만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경우도 많거든.”
“우회적?”
“그렇지. 이를테면 친해 보이는 친구를 통해서라든지...”
“통해서 뭘?”
“아 멍청한 녀석. 직접적으로 말을 못하니 말을 전해달라든지, 아니면 뭘 좋아하는지 등등을 친구에게 슬쩍 물어본다는 거지. 대화가 쉽다는 말이다. 대화가. 이정도면 알아들었겠지?”
“오 그럼 길리안한테 관심 있는 아가씨를 네가 중간에서 가로채겠다는 거네?”
그렉의 말에 케빈이 인상을 썼다.
“아 이자식이 말을 해도 꼭. 그냥 그렇다는 거다.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고, 대화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그런 쪽으론 생각을 못하겠냐? 이 생각자체가 불순한 놈아.”
그 말에 그렉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놈이 돈 써가면서 길리안의 방에 들어가려 한 거였구나. 아카데미 생활 내내 그 덕을 보려고...”
“크흠.. 아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누가 들으면 내가 길리안을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접근한 줄 알고 오해하겠다.”
“아니냐?”
“아니고말고. 길리안 이녀석말은 신경 쓰지 마라. 난 너와의 순수한 우정으로 그런 거니까. 알았지?”
라고 말했는데 길리안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어이 길리안?”
케빈이 어깨를 흔들자 그때서야 길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어 미안. 무슨 말 했어? 딴생각 좀 하느라고.”
“너 얼었구나?”
“아니. 잠시 딴생각 좀 한 거야. 뭐 조금 긴장은 돼지만.”
그 말에 케빈이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하긴 너 라이라프 영지에서 왔다고 했지? 시골영지이니 이렇게 많은 귀족들과 레이디들이 참석한 파티는 경험하기 힘들었겠지. 그런데 혹시 여자경험도 없는 거냐?”
“어.”
너무도 빠르고 간단한 대답에 오히려 케빈이 당황했다.
“허허... 설마 키스도 못해본 거냐?”
그 물음에도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해봐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 말에 케빈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기는 하다만... 너 정도면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여자들은 공략할 수 있었을 텐데... 음 아직까지 키스도 못해봤다는 건 역시나 그럴 마음이 없다는 거였겠고...”
말끝을 흐리던 케빈이 낮게 속삭였다.
“너 설마 취향이 남자냐?”
“남자?”
인상을 찡그리고 말하는 길리안을 보며 케빈이 손사래를 쳤다.
“아하하하 아.. 아닌가보구나. 인상 펴라. 여자한테 관심이 없어보여서...”
여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취향이 남자 쪽인 것인가?
뭐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미소년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들이 좀 있다고 했다.
단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멀리하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그런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그렇다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면 또 행실이 바르지 못하고 여자를 밝힌다는 소문이 돌 것 같았다.
이건 뭐 어느 박자에 맞춰서 춤을 춰야하는 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심이 없는 건 아니야. 단지 스승님께서 수련에 방해가 된다고 멀리하라고 하셨거든.”
“허어.. 이 녀석 수련하다 평생 혼자 살 녀석일세. 그렉 저놈이야 키도 작고 못생기고 내세울 것도 없어서 그렇다 치지만... 아무튼 연구대상이라니까. 뭐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한번 경험해보면 눈이 번쩍 뜨일 거다. 그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나면 지금까지 내가 왜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 거다.”
그런 케빈의 말에 인상을 박박 쓰고 있던 그렉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자식이 말끝마다 날 걸고넘어지네. 그런 네놈은 경험이 있냐? 내가 알기론 너도...”
“아아 날 너랑 같은 선상에 놓고 취급하지 마라. 내게도 네가 모르는 사생활이란 게 있단다. 꼬마 녀석아.”
“헉. 설마... 너 이 자식 나 몰래?”
“당연하지. 원래 그런 경험은 나누는 게 아니란다. 조용히 은밀하게. 그래야 소문이 안 나거든.”
“이 배신자. 어쩐지 저번 파티에서 날 버리고 사라지더니... 에이 치사한자식.”
“요즘 아가씨들 중엔 오픈마인드가 꽤 있거든. 귀족가의 레이디들도 그렇고. 뭐 네 녀석에게까지 오픈될지는 모르겠다만... 취향이 독특한 여자들도 있긴 하니까 실망하진 마라.”
그러면서 길리안을 쳐다봤다.
“그리고 길리안. 너무 긴장할거 없다. 처음엔 다 그래. 나도 그랬어. 춤은 좀 추냐?”
“어. 조금.”
그 대답에 케빈이 길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럼 됐다. 넌 그냥 가만히 있어라. 나머진 내가 다 알아서 해 줄 테니까.”
그 말에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뭘 알아서 해주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파티경험이 많은 케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좀 안심이 되긴 했다.
“이제 슬슬 입장할 때 안됐나? 아 길리안 너 제일 먼저 들어가는 건 알지?”
“어 들었어.”
“이런 운 좋은 녀석. 아니 실력이 좋은 거지. 아무튼 레이디 슈발리에의 손을 잡고 입장해 춤을 추다니. 아카데미에서 제일 아름다운 레이디니까 잘해봐라.”
길리안은 그저 쓰게 웃을 뿐이었다.
가을이 되면 각 아카데미가 일제히 축제를 벌인다.
여러 가지 행사 중 아카데미 최고의 미인을 뽑는 대회가 있는데 거기서 1등으로 뽑히면 레이디 슈발리에라는 칭호를 얻는다.
뭐 사회적으로 그리 대단한건 아닐지 몰라도 아카데미 내에서는 최고의 미인이란 말이니 그 나름의 영광스런 명예랄까?
그리고 축제의 마지막 날에는 각 아카데미가 한자리에 모여, 선의의 경쟁을 통해 우의를 다지는 통합축제가 있는데 이게 하이라이트였다.
각 아카데미에서 선발된 최고의 학생들이 정해진 종목에서 경쟁을 하게 된다. 레이디 슈발리에는 작년 통합축제 미인대회에서 2위를 했다.
이미 사교계에 데뷔도 했고 그 미모와 성품을 인정받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케빈이 레이디 슈발리에를 거론한건 아카데미의 전통 때문이었다.
합격축하파티에는 신입생들이 가장 먼저 입장을 하게 된다.
시작이 기사아카데미였기에 아직도 제일 신경 쓰는 학부는 역시나 기사학부.
선두는 기사학부부터 시작인데 혼자 입장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아카데미 학생과 짝을 지어 입장을 시작한다.
제일 먼저 입장하는 것은 역시나 기사학부의 수석입학자. 그리고 그의 파트너는 아카데미 최고의 미인인 레이디 슈발리에.
“아 이제 들어갈 준비를 하나보네. 길리안 이따 들어가서 보자.”
그렇게 말하는 케빈에게 고개를 끄덕인 길리안이 걸음을 옮겼다.
길리안은 주먹 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슈발리에. 전 길리안 후버입니다.”
집사에게 인사법서부터 여자들에게 흔히 하는 적당한 미사여구까지 다시 배웠지만 영 맞지가 않았다. 그전에도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꾸밈이 많기 때문.
스승인 엘런은 “기사는 기사가 되기 전에도 기사고, 죽고 나서도 기사다.” 라고 했다.
기사가 되려는 자는 작위를 받기 전에도 기사의 마음가짐으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사들이 하는 인사법을 쓴 것이다.
어차피 이 자리는 스스로를 보여주려고 마음먹고 나온 자리니 만큼 꾸밈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단 한번으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보여줄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꾸준히 그런 모습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니까.
그 부분에 대해선 집사도 길리안의 생각이 옳은 것 같다고 수긍하기도 했다. 다만 요즘은 기사들도 파티에 가선 거의 저러지 않는 다는 다던데, 뭐 예의에 벗어난 행동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니까.
“에리스 폰 그레드입니다. 듣던 대로 훌륭한 기사님이 되실 것 같군요.”
치마를 잡고 살짝 무릎을 굽혀 인사하는 그녀는 아카데미 최고의 미녀라는 타이틀이 어울릴 만큼 아름다웠다.
탐스러운 금발과 하얀 피부 파란눈동자.
지금까지 만난 여인들 중 이베트 자작부인은 논외로 하고 미네르바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 같았다. 굳이 둘을 비교하자면 약간의 화장도 한 에리스쪽이 훨씬 여성미가 돋보여 그런지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9살이라고 들었는데 몇 년 더 지나 성숙미가 더해지면 정말 보기 드문 미녀가 될 수 있어보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이름을 불러주시겠어요? 레이디 슈발리에라는 칭호는 마치 기사처럼 불리는 것 같아 좀 그렇거든요.”
“알겠습니다.”
보통의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말을 높여주지 않는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하지만 평민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는 있다. 그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가진 재산, 인맥에 따라 평민의 신분을 가진 이에게도 어느 정도의 대우는 해주기 마련이다.
골든로드나 드니로프와는 다르게 유명귀족가문 출신이 적은 슈발리에는 거의 평 귀족의 자제들이 많고, 아카데미에 다닐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평민들은 대부분 좀 산다 하는 이들.
표현은 좀 이상하지만 하급 귀족과 상급 평민이 어우러진 곳이 슈발리에다.
그래서 귀족들도 어느 정도는 평민들을 대우를 해주는 편이었다. 물론 그런 것 따지지 않고 귀족의 신분을 앞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혹시 기사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그런 건 아니에요. 기사도 아닌 제가 기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싫을 뿐입니다.”
하긴 슈발리에는 기사의 신의 이름을 따온 것이니, 그녀에겐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군요.”
하는 길리안의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끝나버렸다.
뭔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길리안이 다른 말을 걸 것 같지 않아 보여, 에리스는 주변에 있던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전 잠시.”
라는 말에 길리안을 봤는데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곤 어딘가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조금 기분이 상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귀족도 아니고 특히 기사의 길을 가는 이들은 투박한 면이 좀 있었다.
아카데미 역사상 입학시험 최고점을 기록한 기대 받는 인재. 좋은 후견인을 둔 덕에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도 자주 이름이 나오는 이였다.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조금씩 과장되기 마련.
50미터가 넘는 절벽을 5번인가 왕복했다는 말도 있고, 한손으로 두 명을 들어 올린다는 말도 있었다. 지금 당장 왕실 기사임관시험을 봐도 합격할거라는 소문을 들었을 때는 그냥 웃음만 나왔다.
아카데미에서도 그에게 기대를 많이 걸고 소문을 내는데 일조하는 것 같았지만, 이제 17살에 갓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너무 과하다 할 정도였으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시험성적이 좋은 만큼 노력은 많이 했을 것이다. 다르게 생각하면 기사로서의 능력은 출중할지 몰라도 다른 것은 부족하다는 말도 된다. 주된 능력을 키우는 만큼 다른 것에 투자할 시간은 없었을 테니까.
요즘엔 기사들도 파티 장에선 저렇게 인사를 하지 않는데, 그러는 것을 보면 스스로가 이미 기사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딱 봐도 여자를 많이 대해보지 않은 티가 난다. 거기에 어린나이를 생각하면 제대로 된 예절과 레이디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어 보였으니까.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이지만 꾸밈이 없어 보이긴 했고, 평소에도 과묵할 것 같았다. 그런 이들과는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고 유머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그러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는 것.
에리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다가온 길리안이 입을 열었다.
“아직 준비가 덜 됐다고 합니다. 입장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지도 모른답니다.”
“그렇군요.”
짧게 대답한 그녀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폈다.
어디 갔었나 했더니 그걸 알아보러 갔었나보다.
그보다 인상을 찡그렸었던 이유는 춥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밤이 되면 쌀쌀하고 지금 입고 있는 파티드레스는 추위를 막아주는 디자인이 아니었다.
훤히 드러난 어깨와 가슴골.
솔직히 말하면 이런 디자인의 옷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번지더니 지금은 당연하다는 듯이 입고 다닌다.
언제부터 풍만한 가슴이 미의 기준중 하나가 됐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점점 파이다간 가슴을 다 드러내놓고 다니게 될지도 모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아슬아슬할 정도로 파인 옷을 입는 여자들도 있지만, 지금입고 있는 옷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도 춥기는 마찬가지. 이런 옷이 싫지만 유행을 선도할 수 없는 입장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재밌는 건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것이 유행인데 치마의 길이는 점점 더 길어진다는 것이다.
걸을 때는 치마의 앞자락을 살짝 들어 올릴 수밖에 없었고 뒤쪽은 당연히 바닥에 끌린다. 그러면서 속치마와 발은 보이면 안 된다.
다리를 보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아마 여기서 치마를 올려 종아리정도만 보여도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리라. 맨발이나 다리를 볼 수 있는 것은 남편이나 정인 뿐.
솔직히 말하면 이런 불편한 규율을 만든 자를 보면 따귀라도 한 대 갈겨주고 싶었다. 물론 이미 죽었겠지만.
그리고 이런저런 복잡한 것들 때문에 어떤 땐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여기사들이 부럽기도 했다.
찬바람이 스쳐지나가자 몸이 떨렸다. 해가지고 어둑어둑 해진 터라 더 추웠다.
원래는 이 위에 걸치는 숄이 있었지만 금방 들어가게 될 줄 알고 하인에게 주고 왔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여학생들 대부분이 비슷한 처지였다.
“음...”
에리스는 어깨를 감싸는 무언가에 고개를 돌렸다.
“날이 아직 차갑습니다. 오늘은 바람도 제법 부는군요.”
옆에 있던 길리안이 망토를 벗어 덮어준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런 길리안이 뒤에 있던 생도에게 말을 전하자 그 말이 전달되고 생도들이 망토를 풀어 여학생들에게 건네는 것이 보였다.
이제야 달려온 관계자가 뒤늦게 입장이 좀 늦어질 것이라고 전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미소를 지으며 길리안을 올려다봤다.
아까 한 생각 중에 몇 가지는 틀린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치자 길리안이 멋쩍은 듯이 웃었다.
처음 봤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눈동자가 은회색이었다. 그보다 처음 인사를 나눴을 때도 딱 이랬다.
눈을 마주보고 그다음엔 자신의 어딜 봤더라 하고 생각해봤는데 눈을 마주친 것 빼면 없었다.
보통 남자들이 여자를 처음 보면 얼굴을 보고 그다음에는 위아래로 훑어본다. 티 나지 않게 보는 것 같지만 마주보고 있으면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다 보인다.
개중엔 가슴골에 노골적으로 시선이 머무는 이들도 있었고 그럴 때면 정말 불쾌했다.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입은 게 아니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자신의 입장에서는 옷이 이런 것이지 보여주려고 입은 것은 아니다. 말이 좀 안되지만 어쩔 수 없이 입는 것이란 것.
그리고 어느 정도란 것이 있고,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 맞다.
그런데 길리안은 그게 없었다.
가만 보면 아주 미남은 아니지만 남자다움은 느껴졌다.
우월한 신체조건 때문에 어디 내놔도 그리 빠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카데미에서 생활하다보면 학부가 다르다고 해도 계속 마주치게 된다.
여자에게 관심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선입견을 가지고 선을 그어놓을 필요는 없는 것.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생도와 친분은 나쁠 것은 없으니까.
“원래 수도태생이 아닌가 봐요. 억양이 조금 있군요.”
“아. 전 동부 끝에 있는 라이라프 영지 태생입니다.”
“라이라프요? 거긴 몬스터가 나온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정말인가요?”
“옛날얘기입니다. 지금은 거의 보이지 않죠.”
“몬스터를 보셨어요?”
“네. 조금.”
“얘기해줄 수 있나요?”
그 말에 길리안은 미소를 띠고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를 하나 했는데 몬스터얘기를 물어보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꽤 친밀한 녀석들이었기에 할 말은 좀 있었으니까.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새벽까지 썼는데 9431자. 헉헉.. 1.1만자는 참 힘들군요.
어제 잠은 많이 잤는데... 문제는 낮잠이라 밤잠을 못 잤네요. 하아... 피곤한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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