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0장(7)
“길리안 경?”
“예. 제가 실험에 참여하겠습니다.”
“허허, 어찌 경이 그런 일에 나선단 말인가?”
“넘버즈에게 입힌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넘버즈인 제가 나서는 것입니다.”
“나는 경이 잘못되는 것을 바라지 않네.”
“저는 다른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음?”
“저 갑옷을 실험하기 위해 따로 기사를 선발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면 기사였던 노예를 또 실험에 쓰려 하십니까? 좋은 갑옷은 당연히 저도 탐이 납니다. 하지만 저 갑옷이 만들어지기까지 과거에 수백이 희생됐다 하셨습니다. 다시 그만큼의 목숨을 제물로 쓰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게 해서 완성된 갑옷을 제게 주신다고 해도, 전 하나도 기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음···.”
“저는 늘 강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른 기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좋은 무구는 기사를 강하게 하지만, 약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강함을 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선 것은 루퍼드였다.
“제가 이 자리에 오른 것은 가문의 후광도 무구의 덕도 아닙니다. 넘버즈의 무구는 당대의 기술을 모두 담아 만든 최고의 무구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마법을 쓰지 않아도 넘버즈는 강합니다. 혹여 볼란트나 티란테와의 대결이 걱정돼서 이러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넘버즈의 치부를 외부에 보이기 싫어 저희 손으로 처리하려는 것뿐입니다. 저 갑옷이 없다고 해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저희는 충분히 강합니다.”
“맞습니다.”
로렌스였다.
“왕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저희를 위해주시는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기사가 힘이라 하셨으면서 힘이 없다 하셨습니다. 저희가 부족해 보인다면 그 또한 저희가 모자란 탓이겠지요. 하지만 아직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고 뜻을 펼치시고 굽히지 마십시오.”
드레드와 미네르바도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넘버즈들을 보며 에런 왕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슐레만이었다.
“왕께서는 참으로 든든하시겠습니다. 큰 결심을 하신 이유를 이제는 알겠습니다. 저도 넘버즈들과 같은 생각입니다. 이 갑옷 하나를 완성하고자 사람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더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예가 물건이라 하나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알겠소. 내 그걸 만들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오. 탑주라면 이곳에 있는 자료로 더 나은 성과를 내리라 믿소.”
“감사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이건 버리기는 아까운 물건입니다. 한 번쯤은 시험해봐야 합니다.”
“허허,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선왕께서 남기신 기록을 보면 처음 만들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물건입니다. 더는 기사의 몸을 매개체로 쓰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 갑옷 자체가 마정석과 같은 기능을 한다고 돼 있습니다. 그건 하나의 완벽한 아티펙트란 말이 됩니다.”
“그게 가능한 것이오?”
“저도 처음 보는 마법 식이 많아 확신은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입어보는 거로도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 말이오?”
“착용자의 신체에 맞게 변형된다고 합니다. 다르게 말하면 누구나 입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마법사의 도움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많은 것이 변할 겁니다.”
“그렇겠지.”
“만약 변형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볼 가치도 없습니다. 자 그럼 길리안 경. 이리로 오시게.”
길리안이 나서자 에런 왕이 말했다.
“난 아직 허락하지 않았소만.”
“어차피 누군가는 입어봐야 합니다. 마침 지원자도 있는데 잘된 일이 아닙니까?”
“음.”
“단, 이 갑옷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주인은 길리안 경이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에런 왕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로렌스가 말했다.
“마침 길리안 경에겐 새로운 갑옷이 필요합니다. 영광의 갑옷이라면 영광의 기사가 입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누가 주지 않겠다고 하였는가? 위험할까 봐 그러는 것이지. 길리안 경. 경에게는 미안한 것이 참으로 많다. 내부가 어수선하여 넘버즈의 임명식도 제대로 못 해주고 합당한 대우도 못 해주고 있으니. 허나 그 갑옷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해도 실망하지 말라. 내가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그리고 마탑주에게 다시 묻겠소. 위험하지는 않겠소?”
“작동할지조차 의문입니다. 그러니 해보지 않고는 장담은 못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게 작동한다면 제가 선왕을 마법사가 아니라고 한 평가는 철회하겠습니다. 마법사이시고 마법 장인이십니다. 그럼 허락하실 거로 알고.”
슐레만이 갑옷의 명치 부분에 새겨진 문양에 손을 대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긴 주문을 마치자 갑옷에서 수많은 문양이 나타나면 희미한 빛을 냈다.
보는 이들이 탄성을 흘리는 동안 슐레만은 나타난 문양마다 손을 대고 주문을 외웠다.
그럴수록 문양에서 발하는 빛이 밝아졌다.
한동안 그것들을 살핀 슐레만이 말했다.
“이 정도면 기대해볼 만합니다.”
“다 된 것이오?”
에런 왕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이제 1단계는 마쳤습니다. 그럼.”
갑옷의 팔목 부분에서 뭔가를 빼낸 슐레만이 길리안에게 그걸 건넸다.
“피를 내서 그것에 묻히게. 아 여기 명치 부분에도 조금 뿌리고. 주인임을 각인하는 작업이라네.”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하고 검으로 손바닥을 그어 팔찌와 갑옷의 명치에 피를 뿌렸다.
“팔찌를 끼고 등에 새겨진 이 문양 위에 손을 대게.”
그대로 하자 슐레만이 또 주문을 외웠다.
생소한 주문인지 그도 기록을 보며 읽는 데 무척이나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길리안이 손목에 찬 팔찌와 갑옷에서 환한 빛이 일면서 철컹철컹 소리가 나며 갑옷이 열렸다.
흉갑 부분이 위로 올라가고 팔다리 부분은 반 이상이 열렸다.
사람이 그대로 들어가 설 수 있을 정도였다.
“자 이제 들어가서 서면 되네.”
“보통 갑옷과는 다르군요.”
보통 갑옷은 부위별로 끼워서 입고 조이고 그래야 하는데 이 갑옷은 달랐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많은 것이 변할 것이라고.”
슐레만에게 웃어 보인 길리안이 갑옷에 몸을 맞춰 섰다.
“좀 작군요.”
그런 길리안안의 앞에 슐레만이 투구를 들고 섰다.
“이걸 쓰면 시작이네. 그리고 이게 고비이지. 혹여 변형되지 않으면 압박이 심할 것이네. 다른 넘버즈들도 준비하시게. 잘못되면 갑옷을 뜯어내야 할 테니. 드겔 경은 검으로 길리안 경의 팔찌를 노리시오. 물론 잘못됐을 경우지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드겔이 검을 뽑아 들었다.
“준비되었는가?”
길리안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하자 슐레만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이 갑옷이 빛을 보길 바란다네. 이것에는 너무 많은 이들의 피와 원망이 서려 있네. 그래서 저주받은 갑옷이 아닌 정말 영광스러운 갑옷이 되었으면 하네.”
투구를 높이 든 슐레만이 다시 말했다.
“경은 이 갑옷을 입고 많은 피를 볼 것이네. 하지만 보잘것없는 이들의 목숨도 소중히 하는 경이라면 쓸데없는 피는 보지 않겠지. 어차피 사람을 죽여 사람을 지키고 또 살리는 것이 기사이네. 그리고 경은 내가 마음에 드는 몇 안 되는 기사라네.”
미소를 지은 슐레만이 길리안의 머리에 투구를 씌우고 몇 걸음 물러났다.
잠시 후 흉갑부분이 밑으로 내려오고 열렸던 부위들도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작은 갑옷을 억지로 입은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웃는 이는 없었다.
“괜찮은가?”
“예.”
“이상하다 싶으면 언제든 말하게.”
“예.”
담담한 표정의 길리안을 보며 다들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렇게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갑옷에 나타난 모든 문양에서 빛이 점점 강해졌다.
그리고 갑옷이 녹아서 흐물흐물 해지는 것 같더니 빈 부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탄성을 흘릴 때 길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 그러는가? 혹시 뜨거운가? 아니면?”
슐레만이 다급하게 묻자 길리안이 표정을 고치고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조금 간지러워서 그만. 그걸 빼면 괜찮습니다.”
그 말에 넘버즈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면서도 내색도 하지 않던 이가 간지럽단다.
그렇게 빈 부분을 메우는 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빛이 점점 사그라드는 것을 본 슐레만이 기록을 살폈다.
“이제 다 된 것 같군. 한번 움직여보게.”
그 말에 길리안이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어떤가?”
“괜찮습니다. 불편하지도 않고 무게도 가볍고 상당히 편안합니다.”
그 말에 슐레만이 크게 웃었다.
한동안 웃던 그가 에런 왕을 보며 말했다.
“선왕께서는 마법사이시고 마법 장인이십니다. 아직 좀 더 살펴봐야 하지만 저것만 해도 기사들의 갑옷이 많이 변할 겁니다. 다른 곳에 쓸 수도 있지요. 그리고 사람이 바뀐다고 갑옷을 다시 제작하는 수고만 덜어도 그게 어디입니까?”
“그렇군. 어디 다른 것도 확인해 보시오.”
“예.”
슐레만이 길리안에게 다가가 갑옷을 꼼꼼하게 살폈다.
“기운이 없다거나 그러지는 않은가?”
“괜찮습니다. 그런데 투구에 안면 가리개가 없습니다.”
“아 그것은 실드마법이 대신한다고 나와 있네.”
그렇게 말한 슐레만이 길리안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냥 얼굴에 닿는 손.
“음. 역시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군.”
“손볼 수 있겠소?”
에런 왕의 물음에 슐레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음은 마법이네. 초기에는 공격마법을 10가지나 넣고자 했지만, 그것도 달라졌지. 보니까 방패를 대신할 실드 마법과 음, 실드를 검처럼 쓴다는 발상이군. 왼쪽 팔뚝 부분의 이곳을 누르게.”
슐레만이 가리킨 곳을 누르자 문양 세 개가 나타났다.
“전투 중에 그냥 활성화되면···.”
“걱정하지 말게 다른 충격으로는 나타나지 않을 테니. 이 갑옷의 주인은 이제 경일 세.”
길리안의 어깨를 툭툭 친 슐레만이 다시 말했다.
“자 그럼 잘 듣게나. 파란 문양이 왼쪽에 방패를 대신할 실드를 펼치는 것이고 빨간 문양을 누르면 실드가 검 모양으로 오른쪽 팔뚝에서 나올 것이네. 노란 문양을 누르면 매직에로우 마법이 왼쪽 팔뚝에서 발사될 것이네. 일단 설명은 그러니 한번 실험해 보세.”
슐레만이 거리를 벌리자 길리안이 파란색과 붉은색의 문양을 눌렀다.
다시 다가온 슐레만이 고개를 끄덕이면 말했다.
“지속시간과 충격에 얼마나 버티는지 다시 생성은 되는지 확인해봐야 할 것은 많지만 일단 방패를 대신 할 수 있는 기능은 가동하는군. 오른팔의 실드로 된 검은 어떤가?”
“확인해봐야겠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으니 유용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럼 저쪽 빈 벽을 겨냥해서 노란색 문양을 눌러보게.”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문양을 누르자 왼쪽 팔뚝에서 희미한 빛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음, 이건 작동하지 않나 보군.”
그리고 로브의 소매에서 팬과 잉크를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자 다음은 강도 실험이네. 갑옷은 방어력이 우선이지. 기사의 랜스 공격에도 흠집이 나지 않을 거라고 적혀있지만, 역시 증명되지 않았으니···. 드겔 경.”
“말씀하시오.”
“경의 검은 기사의 랜스 공격보다 강력할 것 같소만.”
그 말에 검을 들고 있던 드겔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확인해 보시겠소?”
“확인은 내가 아니고 이쪽이 할 것이오.”
그 말에 길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깨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드겔이 몇 걸음 물러서서 검을 세우고 말했다.
“다들 물러나게.”
말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살기가 쏟아져 나왔고 검이 윙윙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그럼 가네.”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하는 것을 본 드겔의 신형이 빛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갑옷 스펙은 다시 나올 겁니다.
왕실무덤 탐방은 다음 편에 끝날 겁니다.
기사회의 하고나면 31장에 영주회의겠군요.
Comment '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