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0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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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런 왕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왕의 말이 계속될수록 분위기는 엄숙해졌다.
하지만 왕궁의 지하에 왕가의 무덤이 존재하는 이유부터 시작된 그의 말은 어느새 왕국의 역사와 왕들의 업적으로 넘어가 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없자 드겔이 헛기침을 했지만, 왕의 말은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선왕께서는 최초로 마법을 익힌 왕이 되셨지. 선왕께서는 왕자들 중 하나라도 마법을 배울 수 있기를 바라셨고, 나에게 마법에 대한 재능이 있었다면 아마도 마법을 배운 왕이 됐을 것이네. 하지만···.”
“다행히 마법에 재능이 없으셨지요.”
뒤에서 들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다들 몸을 돌렸다.
“마탑주 슐레만 폰 그레고리가 왕을 뵙습니다.”
“어서 오시오.”
에런 왕의 말에 다시 고개를 살짝 숙였던 슐레만이 석실 안의 넘버즈들을 봤다.
“마침 잘 오셨소. 탑주.”
“위대한 넘버즈 No.1 드겔 경께서 이 빌어먹을 마법사를 반겨주시다니 영광이외다.”
슐레만의 말에 다른 넘버즈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고 드겔은 피식 웃었다.
“거 오래전에 말실수 한번 한 것을 가지고 참 오래도 물고 늘어지시오.”
“별로 오래된 일도 아니지 않소? 난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오.”
“어제 일이라고 하기엔···.”
“40년 하고 6개월 3일밖에 안 된 일이라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소이다.”
“허허, 기억력도 좋으시오.”
“원래 마법사는 기억력이 좋다오.”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둘을 번갈아 보는 넘버즈들의 눈에는 궁금한 빛이 가득했다.
“크흠, 그만들 하시오. 이곳이 어디인 줄 잊은 것이오?”
“위대한 에스토의 14대 국왕께서 잠들어 계신 석실이지요.”
“알고 있으니 다행이군. 옛일은 나중에 둘이 조용히 해결하시오.”
에런 왕의 말에 슐레만과 드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이런 곳에 절 부르신 겝니까?”
“그건 음···. 차차 알게 될 것이오. 그보다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제가 왔을 때 마법을 배울 뻔한 이야기를 하셨지요.”
“아~ 그랬지. 그런데 탑주는 내게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없다는 게 왜 다행이라 하였소?”
“어설프게 아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허허, 하긴 그야 그렇지. 그래도 난 선왕을 존경해서 그 발끝이라도 따라가고 싶었다오.”
“어떤 부분을 따라가고 싶으신지는 몰라도 왕께선 선왕보다 훨씬 나으십니다.”
“못난 나를 그리 평가해주는 것은 고맙긴 하나 듣기 좀 그렇구려.”
“솔직히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음···.”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던 에런 왕이 슐레만을 보고 말했다.
“이곳에서 살아생전의 선왕을 직접 뵌 것은 나와 드겔 경, 그리고 마탑주 뿐이군. 마탑주는 나보다도 선왕을 더 잘 안다고 할 수도 있지. 그렇지 않소?”
“어떤 면에서는 그럴 겝니다.”
“그러니 한번 말해보시오. 내 어떤 면이 선왕보다 낫다는 것인지.”
그 말에 슐레만이 주변을 둘러보고 답했다.
“정말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괜찮으니 말해보시오.”
“전 솔직하게 말씀드릴 겁니다. 그럼 충격을 받으실 수도 있고···.”
슐레만이 말을 마치기 전에 에런 왕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아, 이런. 선왕께서 잠드신 곳에서 이리 웃게 되다니. 어쨌든, 충격이라 하였소? 내가 요즘 매일 듣는 소식이 바로 충격적인 소식이라오. 그리고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알고 있소. 이들은 나의 기사이고 내 무능함을 알고도 곁에서 힘을 주는 이들이오. 왕가의 치부를 안다고 해도 다른 곳으로 옮길 이들도 아니고, 탑주의 독설 정도는 내 충분히 들어줄 용의가 있소. 그러니 망설이지 말고 말해보시오.”
에런 왕의 말에 슐레만이 미소를 지었다.
“방금 그런 면이 선왕보다 뛰어난 면이십니다. 젊은 날의 왕께서는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잘못은 인정하고 고치려 노력하던 분이셨지요. 그런 모습을 다시 찾으신 것 같아서 기쁩니다.”
“여러 말을 들어주는 것도 왕의 일이니 그리 대단하다 할 것 없소.”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선왕께서는 마법을 못 쓰셨습니다. 당연히 마법사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내 선왕께서 마법을 쓰시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소. 나만이 아니라 당시에 수많은 귀족과 기사들도 보았지. 마법 왕이라 불리셨던 분이시거늘···.”
“간단한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아티펙트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마법에 재능이 전혀 없는 자라도 노력하면 죽기 전에 간단한 마법 한두 개는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고 마법사라고 부르지는 않지 않습니까?”
“그렇지.”
“선왕께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마법에 대한 지식과 이론은 당대의 고위 마법사들 못지않으셨지만, 마법을 직접 펼치는 것은 힘드셨지요. 마법에 대한 관심이 지나칠 정도로 높으셔서 다른 것은 돌보지 못했다는 건 왕께서도 아시는 일이 아닙니까?”
“그야, 음···.”
“형제간의 암투도 왕위를 둘러싼 권력다툼에도 무신경하셨습니다. 대외적인 것은 물론 왕의 일도 제대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관심을 가진 것은 마법뿐이셨지요. 그래도 그 덕에 마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니 업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지금 덕을 보는 것도 분명히 있기는 합니다.”
에런 왕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나칠 정도로 마법에 관심을 가지기는 하셨다.
에런 왕이 걸음을 옮겨 석실 한쪽에 있는 갑옷에 손을 댔다.
“그래서 나도 그 덕을 좀 보려고 하오. 내가 알기론 이 갑옷은 그 당시의 최고의 장인들과 마탑의 모든 힘을 동원해 만든 아주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소. 속으로 탐이 나기도 했지만, 선왕의 유언이 있어 이곳에 넣어두고 있었지. 탑주를 부른 이유는 이것 때문이기도 하오. 그대도 이 영광의 갑옷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으니 잘 알 테니까.”
그 말에 슐레만이 씁쓸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왜 그러시오?”
“왕께서 하신 말씀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대단한 갑옷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요. 그 이유를 아십니까?”
“음, 사실 나도 잘 모르오. 기록도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고 어차피 선왕의 무덤에 넣어둔 물건이라 잊고 있기도 했지.”
슐레만이 젊은 넘버즈들을 보며 말했다.
“경들은 영광의 갑옷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그 말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씁쓸하게 웃은 슐레만이 에런 왕을 보고 말했다.
“왕께서는 선왕의 덕을 보려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혹시 저 갑옷을 쓰실 생각이십니까?”
에런 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한 시대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이 갑옷을 넘버즈 중 일인에게 줄 것이오. 솔직히 모두에게 주고 싶지만, 아쉽게도 하나뿐이니···.”
“아쉬워하실 것 없으십니다.”
“무슨 말이오?”
“그 갑옷은 지금 그 상태로 두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입니다.”
“음? 내 그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소.”
“선왕께서 붙이신 그 갑옷의 이름은 영광의 갑옷이나 마법사들이 붙인 이름은 다릅니다.”
“마법사들이 따로 이름을 붙였다?”
“예. 바로 데스나이트입니다.”
“데스나이트? 그건 신화에나 나오는 마물 아니오?”
“그냥 그 뜻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즉, 저건 기사를 죽이는 물건입니다.”
“갑옷이 기사를 죽인다?”
“처음의 목적은 당연히 왕실기사의 전력 강화를 위해서였습니다. 단순히 기사가 입는 갑옷의 방어력을 높이는 수준이 아니라 선왕께서는 더 많은 것을 원하셨지요. 바로 마법을 쓰는 마법 기사를 원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기사단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습니다.”
“허허.”
“그보다 큰 목적은 선왕께서 본인이 자유롭게 마법을 쓰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당시에 살아있었던 제 스승도, 이제는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동기들도 저것에 매달렸지요. 선왕께서 전폭적인 지원을 해주시고 본인도 직접 참여하셔서 몇 년에 걸쳐 만들어 낸 물건이 저것입니다.”
말을 하는 슐레만의 눈빛이 그때를 회상하는 듯 아련하게 변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저걸 만들면서 많은 연구가 진행됐고 지금도 사용하는 수많은 마법부여 식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기사의 갑옷을 강화하는 방법도 저 때 바뀐 것이지요. 하지만 원하는 성과를 내는 어려웠습니다. 문제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실험이 필수입니다. 당연히 적당한 기사가 필요했지요.”
“음, 그럼?”
“예. 처음에는 왕의 명을 받은 기사가 실험에 참가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의 예상 밖이었습니다. 설마 죽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렇게 기사 몇 명이 저 갑옷을 실험하다 죽었습니다. 그 후에는 왕국의 기사를 실험에 쓸 수는 없으니 기사였던 노예들을 구해 갑옷을 입히고 실험을 했습니다. 저 갑옷이 완성될 동안 죽은 자는 백이 넘고 폐인이 된 자는 더 많습니다.”
“허허, 그런 일이. 그러면 완성은 된 것이오?”
“완성은 됐다고 할 수 있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음?”
“마법이란 본래 외부의 마나를 움직여 펼치는 것이지요. 그게 순수한 마법입니다. 그래서 마나 어를 익히고 길고 긴 주문을 외는 겁니다. 마나 어란 마나와 소통하기 위한 언어입니다. 마정석을 이용한 마법은 마정석에 담긴 마력을 매개체로 마법을 좀 더 빠르고 쉽게 펼치는 것입니다. 그 또한 결국 외부 마나를 이용해서 마법을 펼치는 겁니다. 하지만 매개체인 마정석의 마나도 소모되지요.”
“그럼 저건 방식이 다르오?”
“마법을 몇 번 정도 쓸 수 있는 아티펙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기에 마정석을 매개체로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문제는 마법을 전혀 모르는 기사가 시전자라는 것이지요. 마법을 못 쓰는 자라도 저 갑옷만 입으면 마법을 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기에 수많은 마법 식이 새겨졌고, 확인되지 않은 마법 이론도 적용됐습니다. 그 결과 마법사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낮은 한숨을 내쉰 슐레만이 다시 말했다.
“바로 기사의 몸. 저 갑옷을 입은 사람의 몸속에 있는 마나를 매개체로 사용하게 된 것이지요. 그 원인은 솔직히 말해서 저도 모릅니다. 그때의 저는 한참 부족했으니까요. 하지만 그 당시에 최고의 마법사들도 원인은 알 수 없었습니다. 똑같은 작업을 거쳐 완성한 다른 갑옷은 저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냥 보통 갑옷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처음 완성했던 저것만이 유일하게 마법을 쓸 수 있었지요.”
“허허. 탑주에게 직접 듣고도 믿지 못할 이야기군. 조심스럽게 사용한다면 어떻소?”
“저 갑옷을 착용하는 순간 자동으로 활성화되는 마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지속해서 마나가 필요하지요. 마법사가 마법을 펼치면 위력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것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모든 마법을 다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갑옷에 새겨진 마법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점도 많은데 보완할 수도 없거니와 착용자가 컨트롤 할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쓸모없는 물건이지요.”
“음.”
“기사들이 몸속에 마나가 있는지 없는지를 가지고 아직도 말이 많은데, 확실히 말하면 있습니다. 저 물건이 그거 하나는 증명해 줬지요.”
그 말에 다들 피식 웃었다.
“궁금한 것이 하나 더 있소.”
“말씀하십시오.”
“탑주의 말을 들으면 이 갑옷은 입으면 죽는 것처럼 들리오. 그런데 난 분명 선왕께서 이 갑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있소. 그것도 한번이 아니오. 그래서 조심하면 사용 할 수 있는지 물은 것이라오.”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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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그냥 이건 네 꺼, 이건 너 가져라~ 이런 걸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 갑옷은 어떻게 할까요? 버릴까요?
그나저나 제가 신데렐라가 돼버려서 12시 전에 연재를 해야 하기에...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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