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0장(6)
말끝을 흐리며 잠시 생각하던 슐레만이 다시 말했다.
“단순히 입었다 벗었다만 하는 정도라면 큰 문제는 되지 않았을지도···.”
슐레만의 말에 에런 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허허, 입으면 죽는 것처럼 그리 겁을 주더니···.”
“그건 제가 결과만 말씀드려서 그렇겠지요. 바로 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기사에게 갑옷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전에는 평상복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시대가 변한 지금도 갑옷을 입고 생활하는 기사도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슐레만이 로렌스와 드레드를 봤고 둘은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했다.
“전쟁에 나가기라도 하면 거의 갑옷을 입고 지냅니다. 그러니 오랜 시간 착용이 가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갑옷을 시험하던 기사 중 어떤 이는 갑옷을 벗고 밤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눈을 뜨지 못했고, 어떤 이는 마법을 시전하다 피를 토하고 죽었고, 어떤 이는 잘 버티다가 석 달 만에 죽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평균을 낸 적이 있는데 아마 한 달 정도였을 겁니다. 죽지 않은 자들은 보통 사람보다 힘을 쓰지 못하게 됐지요.”
“음.”
“중요한 건 갑옷을 착용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착용자가 힘들어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제가 직접보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백지화하고 갑옷을 선왕께서 가져가신 후로는 어떤 일이 더 있었는지 저도 모릅니다.”
“그렇겠지.”
“그게 왕께서 어릴 적이셨으니 아주 오랜 시간이지요. 저는 솔직히 원망스럽습니다.”
“무엇에 대한 원망이오?”
“연구 결과 마법 식, 마법서 등 관련 자료를 모두 왕께서 가져가셨습니다. 저기 새겨진 마법 식 중에는 지금도 유용한 것이 많을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그때 많은 발전이 있었고 지금도 쓰인다고 하지 않았소?”
“일부일 뿐입니다. 사람이 후대에 지식을 전하는 방법이 바로 기록입니다. 또 머리로 다 기억을 못 하니 기록을 합니다. 수많은 실패의 기록도 아주 중요한 것이지요. 특히 마법사에게는 아주 큰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록을 전부 선왕께서 가져가셨으니 많은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음, 기록이라.”
“만약, 지금까지 연구가 계속됐다면 더 많은 발전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실패가 아닌 성공으로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저 갑옷이 제대로 완성됐다면 역사에 한 획을 그었겠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에런 왕 대신 드겔이 말했다.
“그리고 마탑주라는 자가 반란에 그걸 이용했을지도 모르지.”
“음···.”
슐레만이 드겔을 노려봤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수염을 만지며 둘을 보던 에런 왕이 피식 웃고 말했다.
“만약이라···. 만약 그랬다면 탑주의 말대로 됐을 수도 있고, 드겔 경의 말대로 됐을 수도 있소.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지. 나도 만약에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오. 만약 선왕께서 좀 더 정치에 관심이 있었고 왕국의 대소사에 좀 더 신경 썼더라면 하고 말이오. 그랬다면 좀 더 건강한 왕국과 강한 왕권을 이어받아 내 뜻을 펼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
에런 왕이 걸음을 옮겨 석관으로 다가가 손을 올렸다.
“결국, 나의 의지가 부족했던 것을 선왕의 핑계를 대며 원망한 것이라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나였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소. 지나간 일은 아무도 바꾸지 못하지. 그렇다고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소.”
에런 왕이 걸음을 옮겼다.
“내가 왕자 시절부터 선왕을 대리한 것을 알 것이오. 그 시간이 거의 10년이지. 외부에는 건강이 안 좋은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정정하셨소. 선왕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이곳에 자주 오셨소. 아니 이곳을 직접 만드시고 오랜 시간을 보내셨지.”
에런 왕이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벽 앞에서 돌아서 말했다.
“지금은 그저 왕이 잠든 무덤이지만 전에는 이렇지 않았지. 그래도 한때 왕이 기거하던 곳이고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네.”
그러면서 손을 들어 손가락에 끼워진 왕가의 인장을 봤다.
그리고 벽에 조각된 사자의 입속으로 손을 넣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헛기침을 하며 다른 사자의 입속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손을 빼며 중얼거렸다.
“역시 위에 두 마리는 아니군. 크흠.”
그리고 밑에 있는 사자의 입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그러자 잠시 후 진동과 함께 벽이 옆으로 밀려났다.
“오~ 또 다른 방이 있었군.”
나타난 다른 석실을 보고 말하는 에런 왕에게 슐레만이 말했다.
“모르셨습니까?”
“나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오. 이곳은 선왕께서 직접 꾸미셨고 살아계실 때는 나도 함부로 올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다만 내가 지금 선왕의 유언을 어기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되오.”
“유언을 어기시다니요?”
“선왕께서 그러셨지. ‘후대에 마법을 익힌 왕이 또 나오거든 나의 무덤에서 왕가의 인장을 쓰라. 그렇지 않은 왕은 그냥 예만 표하고 돌아가라.’라고 하셨소. 난 마법을 익힌 왕이 아니니 유언을 어긴 것이라오.”
슐레만은 아무 말 없이 놀란 표정으로 왕을 쳐다봤다.
그건 드겔을 제외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하오?”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소. 후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고. 이제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러는 것이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몰랐던 일들이 내가 직접 통치하는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소. 솔직히 알면서 눈감아 준 것도 꽤 되지만, 몰랐던 일이 더 많았던 게 사실이라오. 아무튼, 다시 힘을 내보려는데 내게 그럴만한 힘이 없다오. 영주들 눈치도 봐야 하고 왕국을 어지럽히는 괘씸한 자는 꼬리도 잡지 못했다오.”
씁쓸한 표정을 한 에런 왕이 계속 말했다.
“나는 말이오. 강해지고 싶소. 내가 강해지려면 내 뜻을 받들고 내게 충성하는 나의 기사들이 강해지면 되오. 하지만 그들이라고 갑자기 강해질 수는 없는 일. 내가 이 갑옷을 넘버즈에게 입히겠다고 한 것은 농담이 아니라오. 갑옷만이 아니오. 검이든 무엇이든 나의 기사들이 강해질 수 있다면 난 이곳에 있는 것을 아낌없이 쓸 것이오.”
말을 멈춘 에런 왕이 모두를 한번 본 후 슐레만에게 말했다.
“기사만이 아니오. 탑주도 나의 사람이고 왕가에 충성하는 신하요. 선왕이 원망스럽다 했소? 이제 그 원망을 거두시오. 선왕께서 가져가신 것을 내가 돌려주리다.”
“정말이십니까?”
놀라서 묻는 슐레만에게 에런 왕이 웃으며 말했다.
“당대의 왕은 나요. 내가 그리 하겠다 하면 그리될 것이오. 선왕의 유언을 받드는 것은 나의 의무지만, 마법을 익힌 왕? 하하, 그것도 왕국이 존재하고 왕가가 존속해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소?”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석관을 쳐다봤다.
“선왕께서도 이런 날 이해해 주실 것이오. 그렇지 않다고 해도 상관없소. 나중에 꾸지람을 듣는 것도 나의 몫이니.”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몸을 돌렸다.
“어디 안에 뭐가 있는지 한번 봅시다.”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나타난 또 다른 석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면 에런 왕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자신이 마법을 익힌 것이 아니라 문이 안 열리면 어쩌나 했기 때문.
그런 에런 왕의 뒤를 모두가 따랐다.
에런 왕은 석실에 들어서자마자 사방을 둘러봤다.
또 다른 석실도 상당히 넓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사방의 벽을 둘러싼 커다란 책장과 거기에 빼곡히 꽂혀있는 책들 그리고 커다란 테이블과 그 위에 실험에 쓰인 것 같은 여러 가지 물품들.
뒤에서 들리는 오~ 하는 감탄사에 돌아보니 슐레만이 입을 벌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고 웃다가 드겔이 손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키는 걸 보고 시선을 돌렸다.
드겔이 가리키는 곳에 있는 갑옷.
밖에 있는 영광의 갑옷과 똑같은 갑옷이 하나 더 있었다.
“저건 영광의 갑옷인가?”
에런 왕이 중얼거리며 슐레만을 보다 모두가 그를 봤다.
갑옷 앞으로 다가간 슐레만이 돌아서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밖에 있는 것이 두 번째 만들었다가 아무런 효과도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요. 선왕께서 가져가신 후의 일은 저도 모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뭔가를 계속 하셨다면 자료나 기록이 있겠지요.”
그러면서 가까운 테이블에 있는 책자를 집어 들어 펼쳤다.
한동안 그것을 읽던 슐레만이 중얼거렸다.
“음, 이것이로군.”
그 말에 에런 왕이 손을 내밀었다.
“어디 한번 봅시다.”
슐레만이 보던 것을 넘기자 그걸 쓱쓱 훑어본 에런 왕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마나 어입니다. 그래서 마법을 익힌 왕이라는 전제를 다신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올 거란 생각은 못하셨나봅니다.”
에런 왕이 보던 것을 슐레만에게 다시 넘겼다.
그걸 받아들고 다시 빠르게 읽어 내려가는 그를 보고 에런 왕이 말했다.
“어허, 혼자만 보지 말고 소리 내 읽어보시오. 다들 궁금해하지 않소.”
그 말에 헛기침을 한 슐레만이 첫 페이지로 넘겨 일기 시작했다.
“어서 오라. 위대한 에스토의 왕이여. 이걸 읽을 수 있다면 그대는 마법에 관심을 가지고 익힌 왕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는 반평생을 이 갑옷에 매달렸다. 수많은 실패와 역경을 딛고 드디어 마법을 익히지 않은 자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갑옷을 만들어 내었다. 난 왕보다 마법사나 장인에 더 어울리는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한다. 내가 이것을 만들기 위해···.”
한참 동안 읽던 슐레만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마법사들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으시군요.”
“크흠. 그건 내가 나중에 처리해 주리다. 그보다 어서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예.”
라고 대답한 슐레만이 쓱쓱 책장을 넘겼다.
“하시고 싶은 신 말씀이 무척 많으셨나 봅니다. 대부분 자신의 업적에 관한 말씀입니다만. 음, 그러니까···.”
그리고 한참 동안 눈으로 읽기만 하고 말은 없었다.
에런 왕이 궁금해서 독촉을 해도 대답도 없었다.
그러다 읽던 것에서 눈을 떼고 생각을 하는 것 같던 슐레만이 말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건 처음 만들어졌던 영광의 갑옷은 맞습니다. 그걸 선왕께서 문제점을 고치고 다시 만들어 완성한 것입니다.”
라는 말에 에런 왕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하지만?”
“전혀 검증되지도 않았고 이론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선대왕들께서 모으신 마도 시대의 마법서와 아티펙트를 모아 사용하셨다는데 그 또한 확인을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이 있었던 겁니까?”
슐레만의 물음에 에런 왕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있었을 것이오. 나도 직접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선왕께서 가져다 쓰신 모양이군. 뭐 어차피 꺼내 쓰려 했던 것이니 잘되었소. 꼼꼼하신 분이셨으니 마법에 관련된 것은 모두 이 방에 있을 것이오.”
“그러면···.”
“모두 사용할 것이오. 하지만 마탑도 아직 정리 중이고 아무에게나 보여줄 수 없으니 탑주가 살펴보시오. 세상에 나가도 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할 것이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저 갑옷은···. 결국, 실험을 해봐야 한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실험에 참여하겠습니다.”
뒤에서 들리는 말에 에런 왕과 슐레만이 돌아섰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며칠 연재를 못 해 죄송합니다.
감기에 걸렸습니다.
약이 독한 건지 감기가 독한 건지 아주 죽겠습니다.
연재주기 공지도 내리고 연참대전도 포기했습니다.
도저히 못쓰겠더군요.
주말에 푹 쉰 덕에 조금 나아지긴 했습니다.
아무튼, 제가 살아있으니 넘버즈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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