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3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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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에 고개를 돌린 길리안의 눈에 길모퉁이 벽에 기대 서 있는 로렌스가 보였다.
손을 들어 보이는 그를 보고 길리안이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새벽에 마탑에서 나와 숙소로 돌아갔을 때 로렌스로부터 전갈이 와있어 이렇게 성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바쁜데 불러낸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밖에서 보자고 하신 겁니까?”
“괜찮다면 결투 전까지 동행하고 싶다.”
“동행이요?”
“뭘 좀 하려고 하는데 같이 가자는 말이지. 억지로 함께할 필요는 없고.”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연락을 못 받고 나오지 못했으면 어쩌려고 그러셨습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마탑에서의 일이 끝나고 여유가 되면 함께하자는 거였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길리안에게 로렌스가 다시 말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결투준비가 덜 됐다면 함께하지 않아도 돼.”
“싸울 준비는 언제든 돼 있습니다. 결투라고 해서 특별히 준비할 건 없습니다.”
“역시.”
라고 말하며 어깨를 툭 치는 로렌스에게 길리안이 말했다.
“그런데 혹시 술을 마시셨습니까?”
그 말에 로렌스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금.”
이라고 말하고 돌아선 로렌스가 다시 말했다.
“많이.”
그 말에 피식 웃은 길리안이 고개를 저으며 뒤를 따랐다.
“가까운 곳인가 보군요.”
“아니. 목적지는 성 밖이다. 아, 일행이 한 명 더 있어. 말은 녀석이 준비하기로 했으니까. 저 모퉁이를 돌면 녀석이 있을 거다. 아마도.”
길리안은 로렌스의 말에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오늘 아침의 로렌스는 평소의 그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같이 밤새 술을 마시고 작전을 수행한 적도 있지만, 그날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도 술 냄새가 풍기는 걸 보면 조금 전까지도 술을 마셨다고 봐야 했다.
오늘은 넘버즈에게 중요한 날.
특히 로렌스나 루퍼드의 대결은 단순한 승급을 위한 대결이 아니었다.
그런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술을 마신 것도 이상한데 일이 있다고 자신을 왕성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자신에게 전해진 편지에 눈에 띄지 않는 복장으로 나오라고 해서 오랜만에 갑옷이나 기사의 정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무기도 지니지 않고 나왔다.
중요한 일이 아닌데 이렇게 불러낼 만큼 실없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궁금하겠지만 조금만 참아라. 지금은 솔직히 말하는 것도 힘드니까.”
“중요한 일이 아니면 조금 쉬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괜찮아. 어차피 내 결투는 오후니까 쉴 시간은 충분하지. 내가 조금 이상해 보이겠지만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지. 그중에 하나라고 생각해라. 하암~.”
말을 마치고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는 로렌스를 보며 길리안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
“또 한 명은 누굽니까?”
“너도 잘 아는 사람이고 곧 볼 수 있을 거다. 잠들지 않았다면.”
말을 하며 길모퉁이를 돌아 약간 넓은 공터에 도착한 로렌스가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턱을 매만졌다.
“음. 설마 정말 잠든 건가?”
로렌스가 작게 중얼거릴 때 마차 한 대가 둘 쪽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한사람이 얼굴을 드러냈다.
“여어~ 길리안 반갑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내 친구 로렌스. 너도 반갑구나.”
웃으며 손을 흔드는 루퍼드를 보며 로렌스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저 녀석은 재우고 나올 걸 그랬군.”
“하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이런 일에 내가 빠질 수야 없지. 자 둘 다 뭐하나? 빨리 타지 않고.”
루퍼드가 재촉하자 로렌스가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 올랐고 길리안도 뒤를 따랐다.
마차에 탄 길리안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차 안에 진동하는 술 냄새 때문이었다.
밤새 술을 마신 건 로렌스 혼자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길리안을 보고 로렌스가 말했다.
“이런 우리의 모습이 이해가 가질 않겠지만 오늘만 봐다오. 살다 보면 꼭 술을 마셔야만 하는 날이 있지. 불행하게도 그게 어젯밤이었고 오늘까지 이어졌을 뿐이다.”
“그렇지. 살다 보면 친구와 밤새 술잔을 기울여야 하는 날이 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걸 어제 알았다만.”
루퍼드의 말까지 끝나자 길리안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맙군.”
그렇게 말한 로렌스가 맞은편에 앉은 루퍼드를 보고 말했다.
“말을 준비하기로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런데?”
“말을 타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게 됐다.”
“음?”
“움직일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 그리고 어차피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일 거면 마차가 편하지.”
루퍼드의 말에 피식 웃은 로렌스가 말했다.
“하긴. 눈에 띄지 않는 옷을 입으라고 했더니 어디 파티라도 가는 복장을 한 네 녀석 때문에라도 마차가 낫겠구나.”
“음? 내 옷이 어때서? 제일 수수한 옷을 가져오라고 했더니 하인들이 이걸 가져온 거다. 따로 고를 시간이나 정신도 없었고. 뭐 다들 이렇게 입지 않나?”
“그래. 그렇다고 치자.”
“어차피 마차를 타고 가면 눈에 띄지 않으니까. 마차는 눈에 띄지 않는 거로 준비했다.”
“그건 다행이군. 그보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라. 네게는 그게 가장 필요해 보이니까.”
“확실히.”
그렇게 말한 루퍼드가 마부 석 쪽의 벽을 톡톡 치자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도착하면 깨워라.”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자마자 바로 곯아떨어지는 모습에 길리안과 로렌스는 소리 없이 웃을 뿐.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만 오늘은 못난 모습을 자주 보이는구나.”
“괜찮습니다. 잠시 눈을 붙이시죠.”
“궁금하지 않나?”
“궁금하긴 하지만 어차피 조금 지나면 알게 될 테니까요.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레오폴드 녀석 때문이다.”
“레오폴드라면···.”
“카마엘 백작 가의 쓰레기 녀석. 며칠 전에 내게 맡겨달라고 한 걸 기억하나?”
“예.”
“그 일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날 그 녀석을 베고 싶었을 거다.”
길리안은 씁쓸한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죽이려고 하면 죽일 방법은 많고 그런 녀석을 베는 건 일도 아니지. 다만 일이 커지지 않게 하려면 몰래 처리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
“그렇지요.”
“결투에 응하면 좋겠지만 그럴 놈이 아니거든. 그러니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거다.”
“그렇군요. 하지만 노예사냥의 처벌은 무척 가볍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아침 일찍 움직이는 거지. 단 이런 싸움은 개인의 무력대결이 아니라서 가문과 가문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고 권력과 권력의 대결이 될 수 있다. 명분만 있다고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 싸움이 되지.”
“음.”
“법을 어기지 않는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법이 항상 옳지만은 않은 것처럼 말이지. 법은 누구에게나 공정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지. 지금의 법은 너무 낡았다. 새로 추가하고 변한다고 해도 기대한 것이 못 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
말을 마친 로렌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취했나 보군. 쓸데없는 말이 많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난 법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레오폴드 녀석을 처리할 생각이다. 그걸 지켜보고 판단은 네가 해라. 내가 하는 행동들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음.”
“과정이 옳다고 해서 항상 옳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좋은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늘 과정이 좋은 것도 아니지. 아마 내가 하는 일들이 너와는 맞지 않을 거다. 뭐 나도 딱히 이런 일을 하는 게 좋은 것은 아니다만. 살다 보면 목적을 위해 맞지 않은 옷을 입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니까. 어쩌면 더러운 시궁창 싸움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후우~.”
한숨을 내쉰 로렌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미안하다 길리안. 잠시 눈을 붙이마.”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는 로렌스를 보던 길리안은 커튼을 살짝 젖히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조금 두서없이 말한 것 같지만 로렌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왜 자신에게 굳이 그런 말들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레오폴드는 카마엘 백작 가의 후계자다.
다음 대 백작이 될 인물.
신분이 어떻든 간에 로렌스의 말처럼 죽이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고, 만약 그렇게 한다면 법이라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이 돼버린다.
그렇다고 지금의 법안에서 그를 처벌받게 하는 것도 힘들었다. 노예사냥은 고작 벌금형이고 그건 그자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렌스가 뭘 하려고 하는진 몰라도 그를 처벌받게 하는 건 그에게도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었다.
칼부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그보다도 살벌한 가문과 가문의 싸움이 될 것이다.
무력 대결은 편하고 아무리 강자라도 물러서지 않고 싸울 수 있지만, 이런 싸움은 다르다.
가능하다면 이런 싸움은 피하고 싶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해결 할 수는 없겠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런 싸움은 언제든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이었다.
창밖을 보던 길리안의 시선이 로렌스에게 향했다.
로렌스는 그걸 일부러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노예 수십이 죽어 나갔다고 해서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일을 벌인 귀족의 잔인성이야 알려지겠지만 그뿐.
도망치는 것을 죽였다고 하면 솔직히 잘못도 아니다.
그런 세상인데 자신과 약속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혼자서 모든 걸 다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로렌스 혼자 모든 책임을 지고 일을 벌이는 걸 보고만 있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옆에서 들리는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길리안이 루퍼드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로렌스와 루퍼드를 처음 봤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 둘의 모습은 상상도 할 수가 없던 모습이었다.
둘 다 존경의 대상이었고 대단한 기사들이지만, 결국엔 사람.
이렇게까지 술을 마신 이유는 몰라도 둘의 인간다운 면을 조금 엿본 기분이었다.
길리안은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문 쪽으로 가는 건가?’
목적지는 듣지 못해서 몰라도 가는 방향을 알고 나자 그쪽에 뭐가 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잘 달리던 마차가 한쪽으로 붙더니 멈춰 섰다.
목적지는 성 밖이라고 들었고 아직 성문을 나서지도 않았는데 멈춰선 마차가 움직일 기미가 없자 길리안은 마부 석과 연결된 작은 창을 살짝 열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왕실의 행차입니다.”
“음?”
길리안의 시선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에 왕성 밖으로 나올만한 왕실의 인물이 딱히 떠오르질 않았다.
거리에 사람도 별로 없을 시간이라 조용히 지나가는 행렬을 보고만 있었다.
“삼 왕자군.”
언제 눈을 떴는지 커튼을 살짝 젖히고 창밖을 보던 로렌스가 한 말이었다.
“삼 왕자라면···.”
“본적이 없겠군. 하긴 나도 한 번밖에 보질 못했으니까.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해 왕성보다는 왕가의 별장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지.”
말을 듣는 동안 마차가 지나쳐 갔고 창을 열고 밖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마차가 지나가자 창밖을 보던 로렌스가 커튼을 내리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왕실이 또 한바탕 시끄럽겠군.”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너무 오랜만이라 죄송합니다.
그놈의 일 때문에...
핑계라면 핑계겠지만, 일이 바빠 연재를 못 했습니다.
일과 연재를 병행하기가 힘이 드네요.
그래서 일을 좀 줄일 생각입니다.
전업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지는 못하겠지만요.
그것 때문에 이런저런 고민이 좀 많습니다.
사는 게 참 마음처럼 안되는 군요.
아악! 무료로 올리려고 했는데... 생각없이 그냥 등록해 버렸네요 ㅠ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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