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2장(4)
마탑내부로 들어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하는 길리안을 본 슐레만이 말했다.
“안에 들어와 보는 건 처음인가 보군.”
“네.”
“그래 느낌이 어떤가?”
“한마디로 멋집니다.”
마탑은 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건국 초기에는 외성에 존재하며 성벽방어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수도가 커지면서 내성에 속하게 됐다.
처음 수도에 도착했을 때도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던 것이 높이 솟아있던 마탑.
물론 그때는 마탑인지도 몰랐고 수도의 웅장함에 시선을 뺏겨 금방 잊어버렸었다.
마탑의 내부는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밑에서 보니 천장이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었고 나선형의 계단이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계단이 붙어있는 벽에는 수많은 문이 보였는데 그게 각 층으로 통하는 것 같았다.
그보다 밖에서 봤을 때는 건물이 너무 웅장해서 힘이 느껴지는 줄 알았는데 내부로 들어오니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건물 자체가 거대한 힘을 품고 있는 느낌이랄까?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감탄을 하죠. 나도 처음에 마탑에 들어왔을 때는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거든요. 하지만.”
길리안이 옆에서며 말하는 라데카를 보자 그녀가 손가락으로 계단을 가리켰다.
“저 계단을 보라고요. 보기엔 멋지지만 매일 올라다니는 사람들에겐 정말 끔찍하다니까요. 슐레만 마탑주님이 마탑주의 자리를 한사코 거절했던 이유가 저 계단에 있다는 말도 있죠.”
그 말에 길리안이 슐레만을 보자 그가 피식 웃고는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이긴 했지.”
“정말입니까?”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는 길리안을 보며 슐레만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네. 그래도 이제는 부담스럽기는 하지. 마탑주의 집무실이 어디인 줄 아는가? 바로 저 맨 꼭대기라네. 쓸데없이 높게만 지어놔서. 에잉.”
“힘들면 옮기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게 내가 올라다니는 것 보다 옮기는 게 더 힘들다네. 말이 집무실이지 연구실이고 또 수많은 마법서가 보관된 서고이기도 하네. 그중에는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없는 것들도 많다네. 옮기려면 옮길 수야 있지만, 시간 낭비지.”
“그렇군요. 여기선 마법사들이 막 날아다닐 줄 알았습니다.”
“하하하, 이 안에서 그러다가는 죽는다네.”
“예?”
놀라서 슐레만을 보던 길리안은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해서 떨어지면 죽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을 높이였으니까.
슐레만이 계단의 난간에 손을 올리며 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단지 높아서만은 아니라네. 문 너머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이곳 중앙 홀에서는 마법을 사용하는 게 무척 힘들다네.”
“그렇습니까?”
“왜 이상한가?”
“마탑 안에서는 마법의 사용이 더 쉬워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그래야 일하기 좋을 테니까요.”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말하지 않았는가. 문 너머는 괜찮다고.”
“그럼 왜 이곳만 그런 겁니까?”
길리안이 묻자 슐레만이 라데카에게 마법을 펼쳐보라고 말했다.
한동안 주문을 외우는 라데카를 보던 길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치면 그 주변에 힘이 모여든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는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이 없었다.
아니 미약해서 느끼기 힘든 것도 있었지만, 홀의 벽에서 큰 힘이 느껴졌다.
건물 자체가 힘을 품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저걸 보게.”
슐레만의 말에 고개를 돌린 길리안은 허공에 나타난 글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마나 어군요.”
“읽을 수도 있나?”
“배워보고 싶기는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요.”
“뭐든 처음은 어려운 법이네. 알아두면 도움이 되기는 할 걸세. 아무튼, 저 말은 마나 앞에서 겸손 하라는 뜻이라네. 이제 이 안에서 마법의 사용이 제한된 이유를 알겠는가?”
“네. 기사에게 검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는 말과 같은 뜻이겠지요.”
“그렇지. 마법은 내 몸 하나 편하자고 배우고 익히는 것이 아니라네. 그걸 항상 기억하라고 힘들게 벽돌 하나하나에 마법을 부여해 쌓아 올린 것이지.”
슐레만이 난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계단을 올라다니는 것은 불편하지. 높은 곳으로 갈수록 힘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러면서 겸손을 배우라는 뜻도 있다고 생각하네. 작은 불편함도 참지 못하는 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그렇지요.”
“지금은 쉬엄쉬엄 걸어 올라가야 할 정도로 늙어버렸지만, 젊은 시절에는 이 계단을 오르내리며 언젠가 탑주가 되어 마탑의 최상층을 차지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었네. 힘든 줄도 모르고 반백 년 동안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었던 힘의 원동력이었지. 그때가 그립구먼.”
그런 슐레만을 보며 길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다른 꿈은 없으십니까?”
“음?”
“예전에 마탑주가 되셨다가 일 년도 안 돼서 물러나셨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단지 최고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이에서 다른 뭔가를 이루겠다는 꿈 말입니다. 그건 없으신지 여쭙는 겁니다.”
“꿈이라···. 하하, 그게 왜 없었겠나. 사실 전에는 그걸 하려다가 쫓겨난 거라네.”
“예?”
“그렇게 놀랄 것 없네.”
“왕께서 임명하신 자리에서 쫓겨나셨다면···.”
“아, 마탑은 다른 조직과 조금 다르다네. 마탑주는 왕이 그냥 임명한다고 탑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네.”
“그럼···.”
“마탑주는 마탑 내부에서 선출한다네. 그렇게 마탑주가 선출되면 왕께 알리고 왕이 임명하는 것이지. 기사들과는 조금 다르다네.”
“그럼 이번에도 선출되신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지.”
“음.”
궁금해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길리안을 보며 슐레만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마탑을 마탑답게 만들고 싶었네. 마법을 배우고 익히고 연구하고 또 경쟁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이 마탑이니까. 처음 탑주가 됐을 때 그걸 하려다가 쫓겨났지.”
“그러셨군요.”
“솔직히 말하면 난 아주 뛰어난 마법사는 아니라네. 원로 중에는 나보다 훨씬 대단한 마법사들이 많아. 이전에 마탑주였던 자나 나보다도 마탑주에 더 어울리는 이들이지. 그들을 제치고 마탑주가 되었을 때 난 기쁘기보다는 부끄러웠다네. 내가 그들보다 위에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는 없었거든. 그게 뭔지 알겠나?”
“신분입니까?”
“그렇다네. 귀족이라는 신분과 자작의 작위를 이은 몸이라는 거였지. 나의 마법 지식이나 능력이 그들의 위에 있는 것이 아니었고, 같은 조건이었다면 난 마탑주가 되지 못했을 거라네.”
“그렇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음?”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셨을 테니까요. 노력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얻는 것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합니다. 노력하신 만큼 실력도 느셨을 테니,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실력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실력만으로는 조직을 이끌 수 없지요.”
길리안의 말에 슐레만이 미소를 지었다.
“꽤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아는군. 자네 말대로 부끄러워할 만큼 모자란 정도는 아니네. 난 아마도 자신의 능력을 더 인정받고 싶었던 거였는지도 몰라. 아무튼, 마탑주가 돼서도 난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었네. 파벌 때문이었지.”
“파벌이요?”
“마법사들에게는 여러 개의 학파가 있네. 처음에는 협력하고 경쟁하며 마법을 발전시켜 왔지만, 지금은 그저 파벌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지.”
“음.”
“나를 마탑주로 올려놓은 것도 또 그 자리에서 끌어내린 것도 내가 속한 학파였네. 그들의 힘으로 마탑주에 오른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지. 그리고 이번에 죽은 마탑주도 나와 같은 학파라네.”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이번 일로 내가 속했던 학파는 힘을 잃었네. 아니 그들만이 아니고 마탑이 힘을 잃었다고 봐야겠지.”
길리안은 얼마 전에 있었던 마탑주의 반란사건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사건의 본질은 그게 아니었지만, 마탑주가 몬스터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 너무 큰 일이었고 다른 일들까지 죽은 마탑주에게 책임이 전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미 죽은 자를 욕하는 것은 조금 그렇지만, 그자는 원래 마탑주에 어울리는 자가 아니야. 그자 하나 때문에 오랜 세월 쌓아온 명성과 수많은 공이 퇴색돼버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마탑의 마법사 모두의 잘못이네. 그 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됐지만, 마음이 편치는 않군.”
“그래도 연루된 마법사가 그리 많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게 그렇지도 않다네.”
“예?”
“이런 일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지.”
“그건 그렇지요.”
“일이 터지자마자 마탑에서는 다음 대 마탑주를 선출해서 왕께 알렸지만, 왕께서 임명을 거부하셨네. 반란을 꾀한 무리가 수장을 바꾼 걸 어떻게 믿겠냐고 하셨지. 다들 구금되고 조사를 받기에 가만히 있으면 마탑의 마법사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나선 것도 있다네.”
“됐다!”
뒤에서 갑자기 들리는 라데카의 목소리에 대화하던 길리안과 슐레만이 돌아섰다.
라데카의 손바닥 위에 사람 머리통만 한 빛무리가 둥둥 떠 있는 게 보였다.
“오~ 네가 벌써 그 정도 실력이 됐느냐?”
놀랍다는 듯 말하는 슐레만을 보며 라데카가 미소를 지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상층에 올라갈 충분한 실력이 되는 데도 인정해 주질 않더라니까요.”
“쯧쯧, 못난 것들하고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이번에 아주 싹 뜯어고쳐 주마.”
슐레만의 말에 라데카의 미소가 짙어졌다.
“봤죠? 내가 이런 마법사에요.”
그렇게 말하는 라데카에게 길리안이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는 것이 별로 없기에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모릅니다.”
“음, 그러니까 쉽게 설명을 하자면 음···.”
잠시 생각하던 라데카가 다시 말했다.
“마탑은 하층 중층 상층으로 나뉘어요. 상층으로 올라가려면 이곳에서 마법을 시전 할 수 있어야 하죠. 상층의 한 개 층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장로의 자격이 주어지죠. 최상층의 마법서도 열람할 수 있는 자격도 부여되고요.”
라데카의 말을 슐레만이 받았다.
“이곳에서 날아서 꼭대기 층으로 갈 수 있을 정도가 되면 마탑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자격도 부여되지.”
“음, 그렇군요.”
“좀 더 감탄하라고요. 기사로 치면 나도 넘버즈급 실력이니까.”
“하하, 네. 대단하시군요.”
길리안의 말에 라데카가 볼을 부풀렸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여자라고 상층에 못 올라가고 있었던 거라고요. 하여간 여자가 가치를 인정받고 대우받는 곳은 파티장이나 무도회장밖에 없다니까요.”
라데카의 투덜거림에 슐레만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주마.”
“감사합니다. 탑주님.”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썼구나. 어서 올라가서 이 가면을···.”
슐레만이 들고 있던 투구를 이리저리 살피며 인상을 찌푸렸다.
“가면이··· 없군. 정말 없어.”
그렇게 중얼거리다 라데카와 길리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오는 길에 혹시 떨어지는 걸 보지 못했나?”
“저는 못 봤어요.”
“저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 떨어지는 것이 있었다면 제가 알았을 겁니다.”
둘의 대답에 인상이 더욱 찌푸려졌다.
“떨어진 것도 아닌데 사라졌다?”
아무리 봐도 가면은 보이질 않고 만져 봐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뭔가 확인하려는 듯 슐레만이 주문을 외우다가 허공에 다시 나타난 마나 어를 보고 투덜거렸다.
“음, 불편하긴 불편하군. 여기선 힘들 것 같으니 어서 올라가서 갑옷을 입어보도록 하지. 라데카. 혹시 모르니 사람들과 우리가 온 길을 확인해 보거라.”
그리고 높은 계단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어디 그럼 올라가 볼까?”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너무 오랜만이라 죄송합니다.
현장 스케줄도 꼬이고 빨간 날에는 체력 충전을... 쿨럭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일 많이 생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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