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0장(4)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여긴···.”
주변을 둘러보는 카미르에게 길리안이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날 화재로 살 곳과 가진 것을 모두 잃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야.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곳이기도 하고.”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곳?”
“어. 이제 여름이 돼 가는데 아직 변변한 집도 없고 천막에서 살고 있지. 이곳에 자주 오는 건 아니지만 올 때마다 화가 나.”
처음에는 지원해주는 이들도 꽤 있었지만, 이제는 거의 잊혔다고 봐도 좋을 정도. 아직 이곳에 신경을 쓰는 이들은 이베트 자작부인과 자신을 포함한 몇 명 정도였다.
그보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왜 계속 이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받은 지원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이렇게 살고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는 것.
이곳 사정에 관해 설명해주는 길리안의 말을 들은 케빈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나도 짐작은 간다.”
안톤까지 그렇게 말하자 둘을 보고 카미르가 물었다.
“그 이유가 뭔데?”
“너도 참 세상 물정 모르는구나.”
그 말에 인상을 쓰는 카미르를 보며 케빈이 다시 말했다.
“오면서 한 얘기는 어디로 들은 거냐? 부패가 기사들에 한한 얘기가 아니라는 거지. 이해 안 가는 표정인데 생각을 해봐라. 네가 여기에 후원을 한다 치자. 네가 직접 여기 와서 물건 나눠주고 돈 나눠주고 그러냐?”
“그러진 않겠지.”
“그래. 거의 밑에 사람을 시키고 그들은 이곳을 담당하는 행정관한테 넘겨주지. 대부분 목적은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게 알려지고 그 보고가 위로 올라가는 걸 바라고 하는 거지. 사건 터지고 그 정도 생색내기는 내 아버님도 하셨거든. 그런데 이게 좋게 쓰이면 좋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지.”
“음···.”
“솔직히 누가 뭘 얼마나 줬는지 여기 있는 이들이 어떻게 알아? 행정관 놈들이야 받아서 나눠줬다고 보고 올리면 끝이고 위에선 그렇게 알 테고, 저들에게 전해지는 것은 없고. 뭐 그런 거지.”
“그건···.”
“왜 불가능해 보이냐? 하급행정관들이 그 많은 걸 자기들끼리 해먹지는 못할 테니 당연히 관청의 고위직들도 연결돼 있을 테고, 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하고 밑에 사람들에게 좀 떼어줄 수도 있지. 해먹으려고 하면 방법이야 많고, 아주 좋은 돈벌이지. 뭐 내 생각일 뿐 이다만 이 일로 좀 파고들면 아마 줄줄이 엮여 나올걸? 뭐 손대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말이지.”
“하아~.”
한숨을 내쉬는 카미르를 보며 길리안이 말했다.
“카미르. 어릴 때 칼랜베르크에서 자랐다고 했지?”
“어. 고위 귀족 가에 보내져 그곳에서 자랐지. 귀족들 사이에선 아직 흔한 일이니까.”
“거긴 어때? 그쪽도 이런가?”
“음··· 글쎄. 물론 그쪽에도 썩어 빠진 자들이야 존재하지. 하지만 우리와 비교해보면 체계도 잘 잡혀있고 관리도 잘 되고 있다고 봐야겠지. 같은 사건이 터졌다고 해도 대처나 피해자들에 대한 조치는 우리 왕국보단 나을 것 같단 생각은 들어. 수도가 이 정도면 다른 직영지는 보나마나겠어.”
그런 대화를 하는 중에 한 남자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요. 도련님.”
“네. 부탁한 것은 어떻게 됐습니까?”
“도련님 말씀대로 하기는 했습니다만···.”
말끝을 흐리는 한스를 보며 길리안이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한스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가죽가방을 건넸다.
“수고했어요. 미안한데 식사 좀 가져다줘요.”
“여기서 드신다는 말씀입니까요?”
“네. 배식하는 것 같은데 그거 가져다주면 됩니다.”
“하지만···.”
“가져다주세요.”
길리안의 말에 고개를 숙인 한스가 급한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누구냐? 인상이 아주 험악한데?”
케빈의 물음에 길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다.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바닥에 앉아 한스가 건넨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그건 뭔데?”
“나도 이곳에 후원해 줄 땐 한스를 보내거든. 아무래도 나보단 한스가 나을 것 같아서 일 좀 부탁했지. 사건에 대한 것도 있고 이곳에서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도 있고. 뭐 그냥 이곳 사람들의 얘기랄까?”
길리안의 말에 케빈이 손을 내밀었다.
“나도 좀 보자.”
길리안이 반 정도를 건네주자 옆에 있던 카미르와 안톤에게도 그걸 나눠줬다.
“왜 나는 안 줘?”
불만스럽게 말하는 그렉에게 케빈이 피식 웃으며 몇 장을 건네자 그걸 좋다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스가 음식을 가져왔고 그걸 본 케빈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냐? 이 딱딱한 빵에 정체 모를 수프는?”
“이건 오늘 저녁으로 나온 것인데, 도련님이나 귀한 분들이 드실만한 것이 아닙니다요. 제가 금방···.”
“됐어요. 한스. 매일 먹는 사람들도 있는데 한 끼 정도 못 먹을 것도 없지요. 그만 돌아가 쉬세요.”
“하지만 도련님···.”
“가서 쉬세요.”
“아, 알겠습니다요.”
대답한 한스가 고개를 숙이고 떠나가자 길리안이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뭐해? 안 먹어?”
그러면서 수프에 넣어놨던 빵을 집어 입에 넣었다.
“이러면 그나마 먹을 만해.”
그런 길리안을 보고 케빈이 피식 웃으며 빵을 입속에 넣었다.
“나도 가끔 서민체험은 하는데 이건 더 맛이 없네. 카미르 넌 어떠냐? 이런 거 처음이지?”
그 물음에 카미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빵을 입속에 밀어 넣었다.
케빈도 입을 닫았고 다들 한동안 빵을 먹으며 손에 든 것을 읽기만 했다.
“나.”
길리안이 입을 열자 다들 그를 쳐다봤다.
“어떻게 하고 싶은지 결정했어.”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이렇게.”
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구리에 달려있던 것을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힘껏 던졌다. 잠시 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빛이 하늘에서 번쩍였다. 빛은 바로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밝아지며 더 높이 올라갔다.
“그거 위험할 때 지원 요청하는 신호 아니냐?.”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맞아.”
“음···.”
“설마 기사들이 그랬겠냐는 생각도 했었고 사건을 해결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었어. 내부의 일이니 조용히 해결할 방법을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그래선 안 될 것 같아. 사건의 해결보다 더 시급한 문제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길리안 너 무슨 생각인 거냐?”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케빈은 길리안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웃고는 있는데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십 수 명의 기사들이 도착했다. 병사들이 뒤따라 뛰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인가?”
말을 몰아 다가서며 말하는 기사를 보고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힘에 부쳐 도움을 청했습니다.”
“지키고 있는 병사들도 그대로인 걸 보면 폭동이 난 것 같지도 않고. 실수였는가?”
“실수가 아닙니다. 북부관청의 행정관들을 잡아 조사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수가 너무 많아서 말입니다.”
“북부관청? 음···. 길리안 경이지?”
“그렇습니다.”
“그래 경이 행정관들을 조사하겠다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들에게 전해져야 할 후원금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화재 현장을 정리하는 일에 강제로 동원하고 제대로 임금을 지급하지도 않았습니다.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폐하께서 세금을 면제해 주셨는데, 세금을 걷겠다고 그나마 가진 것도 없는 이들에게서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그럴 리가.”
“저도 별로 믿고 싶지는 않지만 사실입니다. 이 일에 치안기사들이 병력을 동원해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 관련자가 너무 많아 혼자서는 힘이 들더군요.”
“그런 일이라면 북부지구 관할이니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네. 동부지구에 속한 경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네.”
“치안기사의 관할은 행정구역에 따라 나뉘지만 그건 관청과 업무 협조를 위해 나눈 것일 뿐. 그 권한과 의무는 직영지 전체에서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 관할을 나누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죠.”
“그건 경이 기사가 된 지 얼마 안 돼 잘 몰라서 그런 것이겠지. 어쨌든 같은 기사인 경의 말이니 조사는 해보겠네.”
“그 조사에 저도 참여하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말입니다.”
“우리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말에 길리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왠지 안 하겠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하겠다고 하였네. 그전에 경이 그런 말을 하는 출처부터 말해주게. 그들부터 조사해 볼 테니.”
“아무래도 그쪽하고는 말이 안 통하는군요. 북부지구의 치안기사들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그쪽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쪽?”
“이름을 몰라서요. 당신의 옆에 있는 기사도 그 뒤에 있는 기사도 모르겠군요. 마침 다른 기사들이 오니 그들과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지금 뭘 하자는 것인가? 명성을 조금 얻었다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나 보군.”
“모르는 이들이 절 알아보는 걸 보면 제가 유명하긴 한가 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당신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군요.”
“뭐라?”
“보시다시피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자만심만 늘어가서 큰일입니다. 그러니 선배 기사로서 따끔한 가르침을 주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참아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것이네. 실력이 부족해 아카데미에서 계속 배우겠다고 했으면 배우는 것에 집중하게.”
“아카데미에서 배울 것이 많아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실력이 부족해서는 아닙니다. 이 자리에도 검을 섞을 만한 기사들이 보이질 않는데 그나마 당신이 가장 괜찮군요. 모두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도 전 괜찮습니다만.”
“작정하고 시비를 거는 것이군.”
“알면서도 참고 있는 것이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혹시 두려워서는 아니시겠죠?”
“훗, 미쳤군.”
“지극히 정상입니다만. 뭐 검 한번 섞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명성도 제가 더 높고 제게 지셔도 손해 볼 것은 없으실 겁니다. 그쪽은 알려지지도 않았으니 떨어질 명성도 없겠죠.”
“난 프랑코 폰 켈리바다. 한 번만 더 그쪽이라고 한다면 용서치 않겠다.”
“이런 그쪽은 귀족 출신 기사셨군요.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납니다. 참 더러운 일을 많이도 하셨더군요.”
길리안의 말에 프랑코가 검을 빼 들었다.
그걸 본 길리안이 씨익 웃었다.
“워워~.”
갑자기 프랑코의 말이 뒷걸음질을 쳤고 다른 기사들의 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케빈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얼굴은 웃고 있는데 눈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보다 기사들의 말이 물러서는 이유는 길리안이 쏟아낸 살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이 타는 말도 훈련을 받는다. 전장에서 기사를 태우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기 위해 훈련받은 말들이 한 사람의 살기에 놀라 동요하는 걸 보니 할 말이 없었다.
하긴 기사 수업을 받는 자신도 뒷걸음질을 쳤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기사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을 둘러본 길리안이 프랑코에게 말했다.
“검을 뽑고 왜 뒷걸음질을 치십니까? 어릴 때부터 수련했을 테고 아카데미도 나왔을 테고 기사가 된 지도 한참 됐을 텐데 말 한 마리도 제대로 못 다루시는군요. 그래서 어디 기사라 하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프랑코는 말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다른 말들은 이미 진정이 됐는데 그의 말은 아직 겁에 질린 듯 동요하고 있었다.
말을 달래길 포기한 프랑코가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길리안이 말했다.
“이제 좀 싸울 마음이 생기신 모양입니다.”
“그 입을 찢어주마.”
“능력이 있다면 그렇게 하시죠. 그런데 아직도 안 달려드시는군요. 수도의 기사들은 입으로만 싸우는 것 같습니다. 너무 말이 많아서 저도 배우고 늘어난 것은 말밖에 없단 말이죠.”
그 말에 프랑코가 길리안에게 달려들었지만 둘 사이에 말을 탄 기사가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급히 말을 세우며 묻는 기사를 보고 길리안이 피식 웃었다.
푸른색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 로렌스였다.
“참 빨리도 오십니다. 늦으실 거면 좀 더 늦게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하하. 이런 나를 질책하는 건가?”
“질책이 아니라 원망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안장에 있던 가방과 한스가 건넸던 것을 모아 로렌스에게 던졌다.
“사건을 조사한 자료인데 별로 건진 것은 없습니다. 대신 다른 것만 잔뜩 건졌지요. 되도록 폐하께 직접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읽으실진 모르겠군요.”
“내가 정리해서 올리지.”
“그럼 이것도 좀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끌렀다.
“검을 반납하겠다는 건가?”
“그럴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겠지?”
“너무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그냥 반납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리고 검을 수평으로 들고 검 손잡이와 검 끝을 잡고 힘을 줬다. 검집과 함께 서서히 휘어지는 검을 보고 로렌스가 말에서 뛰어 내렸지만 툭 소리가 나며 너무도 쉽게 부러져 버렸다.
“길리안 경!”
“이 검도 폐하께 전해 주십시오.”
길리안이 부러진 검을 로렌스의 발 앞에 던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보셔서 아시지 않습니까? 안 하겠단 말입니다. 왕실기사 따위 제게 아무런 가치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야.”
“제가 왜 이러는지 알고 계십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로렌스가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지만 이런 행동은 제일 마지막에 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하는 겁니다. 조용히 넘어가면 묻힐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제가 드린 것을 보시면 왜 이러는지는 아실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넘버즈가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겁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로렌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기 나름이지.”
“그럼 좀 잘하지 그러셨습니까.”
길리안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길리안 경!”
불러봤지만 길리안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로렌스는 발밑에 있는 부러진 검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늦어서 죄송합니다.
Comment '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