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2장(1)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로렌스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뜨거운 여름의 태양이 저물어가고 더위가 누그러질 시간이 될 때까지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침대에 잠들어 있는 아이.
지금은 자는 척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잠이 든 모습.
정말 서럽게 한참을 울던 아이가 울다 지쳐 잠이 들 때까지 그렇게 묵묵히 안고만 있었다.
우는 아이를 안고 있는 동안 어릴 때가 생각나서 위로의 말도 못 해줬고 달래주지도 못했다.
어릴 때, 입도 열지 않고 눈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고 느낀 공포.
그게 너무 무서워서 어머니에게 안겨 저렇게 엉엉 울었고, 그런 자신을 달래주던 어머니의 품은 세상 그 무엇보다도 따뜻했었다.
자신의 상태를 말하기 전까지는.
그 이후로 어머니는 자신을 한 번도 안아 준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서 등을 돌린 어머니와 언제나 냉정했던 아버지.
그러고 보면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안아주질 않았다.
혼자 울다가 지쳐 잠이 든 적도 많았다.
아무도 자신을 달래주질 않았으니까.
자신을 피하고 찾아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어머니를 보고 일부러 다른 곳이나 땅을 보며 말했고, 지금까지도 제대로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감추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건 자신만이 아니라아버지도 알고 있는 일.
처음 그걸 알았을 때는 너무 큰 충격이었고 그때도 저렇게 서럽게 울었다.
어릴 때는 냉정한 아버지가 그렇게 무섭고 또 서운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았기에 자신도 마음을 추스르고 지금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도 있었으니까.
어머니가 자신을 꺼리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찾아가지 않았다.
굳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는 없지만, 만약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티도 내지 않을 것이다.
혼자가 되는 건 그만큼 무섭고 힘든 일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외로움을 느꼈지만, 언젠가부터는 혼자인 것이 편해졌고 또 익숙해지기도 했었다.
집을 떠나 수도에서 지낸 것이 십여 년.
얼마 전까지도 자신을 늘 혼자였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마음을 열 수도 나눌 수도 없는 외톨이.
그게 자신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슬퍼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봐왔다.
능력을 감추기 위해 알면서도 지나쳤다는 건 어쩌면 핑계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알면서도 위로해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슬픔도 두려움도 혼자 감당하고 혼자 이겨냈기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냥 모른 척하고 지나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고 여겼고 결국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해왔다.
떠올려보면 지금까지 누구를 안고 위로해준 건 저 아이가 처음이었다.
자신이 안고 위로해주려던 것인데 왠지 자신이 위로받은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받았던 어린 시절.
그때를 떠올리게 하는 아이.
‘난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나 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만나고 했던 질문.
자신을 키운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던 그 행동을 돌아와서 무척 후회했다.
서로 알면서도 그냥 묻어두고 모른 척하고 지내 온 지가 벌써 이십 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냈을 때 솔직히 가장 놀란 것은 자신이었다.
몇 년 만에 본 아버지와 나눌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굳이 끄집어 낼만한 이야기도 아니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또 알고 있으면서도 아버지의 입으로 듣고 싶어 했던 자신.
아이 같은 행동을 했다고 자책했었다.
아이가 잠든 침대로 다가가던 로렌스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잠든 아이와 자신의 모습.
한동안 멍하니 거울을 보다가 씁쓸하게 웃었다.
지금 잠들어 있는 아이처럼, 자신의 내면에도 저런 아이가 잠들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렌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거울 앞에 섰다.
솔직히 거울을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대충 용모를 살피거나 눈이 얼마나 붉어졌는지 확인하는 정도.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싫었다.
‘눈이 더 붉어졌군.’
붉은 눈동자.
그리고 흰자 주변도 충혈된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그토록 숨겨왔던 능력을 지금은 오히려 마음껏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음모자를 밝혀내 진실을 밝히겠다는 게 목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보며 그들의 생각을 읽어내 진실을 밝히겠다면서, 정작 자신과 그 내면에 꽁꽁 묻어둔 진실과 마주하는 것은 지금까지 피해왔다.
용기를 입에 담으면서 정작 자신은 그럴 용기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로렌스가 거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의 손과 거울에 비친 또 다른 자신의 손이 맞닿았다.
‘어차피 한번은 마주해야 하는 거겠지.’
누군가 자신의 능력을 알고 있고 또 그걸 이용했다는 느낌이 저번부터 강하게 들었다.
어머니와 아버지, 루퍼드를 제외하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만한 사람은 딱 한 명.
로렌스는 거울에서 손을 뗐다가 다시 손을 댔다.
차가운 거울의 느낌.
단지 거울에서 전해지는 느낌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우는 아이에게 따뜻한 위로 한마디 건네지 못했던 자신은 차가운 사람이었다.
한 번도 다른 이를 안아주지 못한 자신은 차가운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으며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던 자신은 차가운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피해 온 것이 단지 능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지금까지 모른 척했고 이날까지 먼저 손을 내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항상 원망만 했었지.’
한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을 직시하던 로렌스가 돌아서서 아이를 내려다봤다.
그러다 드레드의 말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여자와 아이는 잘 때가 가장 예쁘다고 했던가?’
여자는 모르겠지만 아이는 그렇다는 데 동의할 수 있었다.
정말 서럽게 울어댈 때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니까.
‘네가 깨어났을 때, 내가 널 제대로 안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구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에 누군가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인은 검지를 입술에 대고 있는 로렌스를 보고 급히 허리를 숙인 후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잠든 아이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은 로렌스가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인가?”
“만찬에 참석하실지 아직 대답을 주지 않으셔서···.”
“중요한 볼일이 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다른 분부는 없으신지요.”
“아이가 일어나면 식사를 주고 씻기도록. 내가 올 때까지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를 대해본 경험이 있는 여자가 좋겠군.”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기던 로렌스가 다시 돌아서서 말했다.
“아, 소중하게 대하도록. 나의 손님이니까.”
“에녹스 경.”
“예.”
“내가 분명 영주들을 공격하라 명하였습니다.”
“명하신 대로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왜 한 명의 영주도 죽지 않은 겁니까? 발길을 돌린 영주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런대도 내가 명한 대로 했다고 할 참입니까?”
벨리타의 음성에는 노기가 가득 실려 있었다.
그녀의 말에 즉시 대답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에녹스가 입을 열었다.
“황녀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아~ 말해보세요.”
“에스토의 자멸을 원하십니까?”
에녹스의 물음에 벨리타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내가 뭘 원하는지는 경도 잘 알고 있지 않나요? 지금 그걸 또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에스토의 자멸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음.”
“죽이려 했다면 에스토의 영주 반 정도는 죽일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갑작스럽게 큰 혼란이 오겠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 혼란이 어떻게 정리될지도 예상해 봐야 합니다.”
“내가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럼 왜 그런 말을 하는 건가요?”
“사람은 자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나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이로운 쪽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또 세상에 완벽한 계획은 없고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보며 모든 권력을 손에 넣었던 그도 자신이 제게 죽을 거란 건 예측하지 못했지요.”
“음.”
“기안이 에스토와 전쟁을 벌이고 에스토가 그것을 어느 정도 막아내며 기안이 힘을 되도록 많이 소모하면 좋겠지요. 황태자께서 베이가를 점령하는 동안 눈을 돌리지 못할 만큼 말입니다.”
“맞아요. 그래야 오라버니께서 날개를 펴실 테니까요. 약해진 둘을 삼킬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요.”
“일개 영지도 아니고 왕국을 상대로 세우는 계획입니다. 생각해야 할 변수와 상황이 너무 많습니다. 큰 흐름 정도만 예측해도 성공한 것이지만 그마저도 마음처럼 되지는 않지요. 영주들을 많이 죽이면 한순간 큰 혼란을 가져올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빨리 상황이 정리될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에스토 영주들의 후계구도는 대부분 안정적입니다. 그들이 죽으면 바로 후계자들의 세상이 열리지요. 그중에는 왕에게 복수의 칼을 겨누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이는 정말 소수밖에는 없을 겁니다.”
“음.”
“왕이 상황을 설명하고 작위를 인정해준다고 하면 속내는 어떻든 간에 그들은 받아들일 겁니다. 그들의 분노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면 에스토의 왕은 별 어려움 없이 지금 상황을 넘길 수 있습니다.”
에녹스의 말에 벨리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들 모두가 왕에게 칼을 겨누고 반기를 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의 무력충돌이 국가 내에서 발생하면 쉽게 정리가 되지 않겠지요. 그건 기안만이 아니라 다른 왕국도 침을 흘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에스토 주변의 다른 왕국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음.”
“어차피 에스토 내부에서 무력 충돌은 일어날 겁니다. 에스토의 상황을 너무 악화시키지 않는 선에서 지금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적당히 혼란스럽고 적당히 신뢰에 금이 가 있는 지금이 말입니다.”
“경의 말에 일리가 있군요. 그럼 영주 회의는 그냥 지켜봐야 할까요?”
“그게 좋다고 생각됩니다.”
“대귀족들과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힘을 등에 업고 다른 영주들을 누를 생각인 것 같더군요.”
“그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에스토의 왕이 영주들을 결속시킬 수도 있어요.”
“나쁘지 않습니다. 그들이 뭉치지 않으면 오히려 기안에게 좋은 먹잇감만 던져줄 뿐입니다. 에스토와 싸우는 기안을 원하시는 것이지 에스토를 삼킨 기안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칼랜베르크에서 직접 에스토에 손을 델 것이 아니라면 이정도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처음부터 지금까지 원하는 대로 된 것이 없어요. 뭔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네요.”
“상대를 너무 우습게 보셨기 때문입니다. 에스토에서 기안에 칼을 뽑게 하는 것은 실패하셨지만, 좋은 경험이 되셨을 겁니다.”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군요.”
“하하, 그럴 리가요. 기안에서 에스토에 칼을 뽑게 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아주 확실한 카드도 손에 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말에 벨리타가 미소를 지었다.
“그건 나중에 사용할 생각이에요. 그보다 그들을 지원할 방법은 생각해 둔 것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그럼 얘기해 보도록 해요. 혼란이 너무 빨리 끝나는 것은 원치 않으니까요.”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로렌스 편이 잘 안 써져서 순서를 좀 바꿨습니다.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