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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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을 영창 하는 소리에 놀란 미네르바가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은 상황.
큰 마법을 쓸 때는 잘못하면 마나 폭주가 일어날 수 있고 그 결과는 이미 봐서 얼마나 끔찍한지 알고 있었다.
그 정도 마법은 아니겠지만 혹시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함부로 말릴 수가 없어서였다.
분명 안에서 들리는 대화만 들으면 오해의 소지가 다분했지만, 자신은 길리안을 믿었고 엔젤도 믿었다.
아마 라데카도 같은 생각을 해서 저러는 것일 테니까.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말을 해도 영창을 멈추지 않았다.
한참 말로 설득을 하던 미네르바가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정말 죽이지는 않겠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라데카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서 겉으론 강한 척해도 마음이 무척 여리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 보면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게 라데카였다.
그런 라데카를 보던 미네르바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피식 웃었다.
‘난 왜 검을 잡고 있는 거지? 나도 말로만 둘을 믿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라데카 주변에 모여드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그녀를 봤다.
그때 영창이 끝났는지 눈을 뜬 라데카가 손을 뻗었고 갑자기 뜨거운 열기를 느낀 미네르바가 몇 걸음 물러섰다.
열기가 점점 강해져 벽이 붉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리고 라데카가 손을 내리자마자 녹아내린 벽이 푸스스하는 소리와 함께 굳어버렸다.
딱 한 사람 정도 들어갈 정도의 공간.
‘라데카의 마법이 저 정도였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감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미네르바는 생각을 접고 재빨리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바로 뒤를 따라 들어온 라데카.
둘의 눈에 보인 것은 다행히 옷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길리안과 엔젤.
그런데 그 둘의 모습은 조금 괴상했다.
몸이 기괴하게 꺾여있는 엔젤과 그 상태를 유지하려는 듯 잡고 있는 길리안.
“두, 둘이 어떻게 여길. 길리안 경 빨리 놔줘요.”
“안됩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하니까요.”
“이 상황에서 지금, 아악! 누르지 말라니까. 지금 이 상황이 안 보이냐고요.”
“보입니다만 하던 것은 마저 해야지요.”
“악 정말 고집불통!”
그런 둘을 미네르바는 멍한 눈으로 봤고, 손가락으로 둘을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던 라데카가 입을 열었다.
“이, 이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욧!”
“하타를 가르쳐 드리고 있습니다만.”
길리안의 말에 미네르바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타? 고문 기술이나 근접 전투기술 인가?”
“아니면 설마!”
라데카의 말에 미네르바가 그녀를 봤다.
“설마 뭐? 아는 거라고 있어?”
“그, 그러니까 가학적인 성적 취향이나 그런 걸 당하는 걸 좋아하는 취향, 그런 걸 지칭하는 말이 아직 없잖아요. 그···.”
“라데카!”
엔젤의 뾰족한 음성에 라데카가 입을 다물었다.
“날 도대체 뭐로 보고. 아악! 누르지 말라고.”
“그런데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예요? 말도 막 편하게 하고.”
라데카의 말에 엔젤이 무슨 말이냐는 눈빛으로 봤다.
“내가? 길리안 경이랑?”
“네. 지금도 막 반말하고. 벽 너머에서 들을 때도 이름도 막 부르고 반말하던데요?”
“에이 잘못 들은 거겠지. 아아악! 아, 정말 그만 누르라고!”
“지금도 반말.”
“어, 그러네? 너도 당해봐. 아니 배워봐. 이거 엄청 힘들고 아프다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원래 성격이 나오나 보네요.”
“그런 거겠지.”
그런 둘의 말에 엔젤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네르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그 하타라는 게 뭔데?”
“그러니까 일종의 호흡법이라고 해야 할까요? 음, 몸을 푸는 호흡법? 저기 아주 먼 나라의 사람들이 하는 건데 효과가 꽤 좋다고 해서 배워보고 정식 과목에 넣어보려고요.”
그렇게 말하는 엔젤을 보며 미네르바가 웃었다.
“그런 자세로 말 잘하네.”
“어? 그러게요. 이제 좀 편안하네.”
“그게 편안해?”
“네. 이상하게 처음에는 힘든데 막상 익숙해지고 나면 꽤 편안해요.”
엔젤의 말에 그녀를 잡고 있던 길리안이 손을 놓고 일어섰다.
“이제 다 된 것 같군요. 고생하셨습니다.”
그 말에 엔젤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이제 그만해도 되겠죠?”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하자 엔젤이 자세를 풀고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하아~ 이제 해방이다.”
“무척 개운한가 보네? 무슨 효과가 있는 건데?”
미네르바의 물음에 엔젤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건 직접 배워서 몸으로 느껴보세요.”
“그, 그런 옷을 입고?”
라는 미네르바의 말에 엔젤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기사 정복을 입고해도 바지가 음···. 아무튼 안 찢어지고 버티는 옷이 이 딱 붙는 바지밖에는 없더라고요. 남자 귀족들은 이런 걸 어떻게 입나 몰라요. 라인이 다 보여서 민망한데. 그래도 가릴 데는 다 가렸고.”
말을 멈추고 길리안을 슬쩍 보고 다시 말했다.
“사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교관이라서 별로 신경은 안 쓰였어요. 둘 다 고생 좀 하겠어요.”
미네르바와 라데카를 번갈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엔젤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남 걱정할 때가 아니네. 형제가 닮아도 너무 닮았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윌리엄에게 배우려고 했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그의 말에 잠시 보류하기로 했는데 찾아온 길리안.
형의 부탁을 받았다고 가르쳐 주겠다고 해서 일단은 배워보기로 하고 시작한 하타.
나름 유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배우는 건 정말 고통스러웠다.
여자라고 봐주거나 배려하는 건 정말 하나도 없었고, 한번 자세를 잡고 나면 딱 붙잡고 있는데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럼. 지금 상황은 오해라는 건가요?”
라데카의 말에 엔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휴~ 다행이다.”
“라데카.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니?”
“일단 둘이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거에 안심했고, 다음엔 길리안 경이 혹시 이상한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그걸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뭐 그런 거요.”
그 말에 미네르바와 엔젤에 놀란 눈으로 그녀를 봤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결혼할 건데 당연히 생각해 봐야죠.”
라는 말에 미네르바와 엔젤의 시선이 길리안에게 향했다.
“저는···.”
“잠깐!”
길리안의 말을 막아선 라데카가 말했다.
“지금 당장 나랑 결혼할 생각 없다는 거 알거든요. 나도 지금 당장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고, 내가 청혼 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대답하지 말라고요.”
그 말에 엔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아, 라데카 너 정말 진심이구나? 당장이라도 결혼할 기세네?”
그 말에 크게 한숨을 쉰 라테카가 말했다.
“당연히 결혼도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혼자만 진심이면 뭐해요? 저, 저···. 아~ 내가 말을 말아야지. 저기요, 길리안 경.”
“네.”
“당신 나한테 고마운 거 있죠?”
“음, 결투 때는 감···.”
“지금 감사하지 말라고요. 감사해도 안 받을 거니까. 그리고 궁금한 것도 있죠?”
잠시 생각하던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이후로 바빠서 잊고 있었던 일.
그런 길리안을 보고 라데카가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그럼 찾아와야 할 거 아니에요? 찾아와서 감사도 하고 궁금증도 해결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내가 언제 찾아오나 두고 보고 있었는데 엔젤 언니랑 이상한 거나하고···.”
“라데카! 이상한 거라니.”
엔젤의 말에 그녀를 힐끔 본 라데카가 다시 길리안을 보고 말했다.
“아무튼, 당신은 모르지만 나한테 고마워할 일 엄청나게 많거든요. 내가 당신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받을 건 받아야겠어요. 말로만 하는 감사는 안 받을 거니까 각오해요.”
그런 라데카를 보며 길리안은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지금 이 자리와 상황이 상당히 불편했다.
엔젤에게 하타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갑자기 벽을 뚫고 들어온 것이 미네르바와 라데카.
살짝 오해를 받은 건 풀린 것 같은데 문제는 라데카가 한 말 때문에 미네르바를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였다.
다들 말이 없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걸 깬 건 엔젤.
그녀가 갑자기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기 때문.
그저 웃는 게 아니라 배까지 부여잡고 깔깔거리며 웃는데 그녀를 보던 미네르바도 같이 웃기 시작했다.
웃는 둘을 보며 라데카는 피식 웃었고 길리안은 계속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세 여자를 번갈아 볼 뿐.
“그만 웃어요. 왜 그렇게 웃는 거예요?”
보다 못한 라데카가 말을 꺼내자 웃던 엔젤이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하아, 아 배 아파. 너한테 꼼짝 못 하는 것도 그렇고, 길리안 경의 표정이 너무 웃겨서.”
“저런 표정 의외로 귀엽다니까.”
미네르바의 말에 엔젤이 고개를 끄덕했다.
“그러네요. 예전에 사건 조사하러 갔을 때, 산에서도 딱 저런 표정이었죠. 많이 당황스러운 상황이긴 하겠죠.”
“그렇겠지. 길리안.”
미네르바의 부름에 시선을 돌린 길리안에게 그녀가 다시 말했다.
“당황할 거 없어. 라데카한테 고백받은 거 알고 있으니까. 아 맞다. 키스! 한 것도 알아.”
웃는 얼굴로 키스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하는 미네르바를 보고 길리안의 표정이 더 이상하게 변했다.
“나도 당신이랑 미네르바 언니 사이를 알아요. 물론 고백했을 땐 몰랐지만요. 그래도 별 상관없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도 분명히 날 좋아하게 될 테니까.”
그런 둘을 번갈아 보던 길리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길리안에게 엔젤이 말했다.
“내가 정리해 줄게요. 그러니까 셋은 삼각관계랄까? 미네르바 언니도 라데카도 길리안 경을 마음에 두고 있대요. 서로 그걸 알고 있고 양보할 생각도 없는 그 둘은 라이벌 관계. 둘이 길리안 경을 놓고 경쟁하는 거죠. 와~ 정말 행복하겠어요? 표정은 엄청 불행해 보이지만.”
불행하다기보다는 난감한 표정이었다.
“그럼···.”
말끝을 흐리며 세 여자를 본 길리안이 다시 말했다.
“전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선택권은 길리안 경에게 있어요. 남자도 아닌 여자들이 이렇게 다 오픈하고 경쟁하는 경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다들 평범하지는 않으니까. 어쨌든 내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둘 다 만나 봐요.”
“네?”
“어차피 경도 지금 당장은 결혼이란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서로 알아가다 보면 답이 나오겠죠.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 둘 다 아닐 수도 있고 또 둘이 계속 경을 좋아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우리가 내일 일을 모르듯이 남녀 사이의 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 마찬가지니까요.”
길리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차피 둘이 괜찮다는데 문제 될 거 없지 않아요? 누구 한 명이 안 괜찮다고 해도 난 지금은 문제 될 게 없다고 봐요. 내 일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문제 될 게 없어서 하는 말이에요. 인간관계를 하다 보면 사람을 계속 만나게 되죠. 그중에 경을 좋아하는 여자가 더 없을 것 같나요? 다만 알고 만나냐 모르고 만나냐의 차이일 뿐이니까요.”
“음···.”
길리안이 미네르바를 보자 그녀가 말했다.
“길리안, 엔젤의 말이 맞아. 그리고 내가 한 말은 유효해.”
그 말에 낮은 한숨을 쉬었다.
여자에 대해서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해야 할까?
가까워진 것 같으면 거리를 벌리고, 생각이 많으니 기다리라고 해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다른 여자를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솔직히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기다리면 그녀가 다가올 줄 알았는데 지금은 또 다른 상황이 돼버렸다.
길리안은 라데카를 봤다.
항상 그녀를 대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고백을 받았을 때도 무척 당황스러웠다.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몰라도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요. 그보다 하타. 나도 그거 가르쳐 줘요.”
“예?”
“뭘 놀라고 그래요? 라이라프에서는 일반인들도 한다면서요. 듣기론 피부도 좋아진다던데 그거 배우고 더 예뻐질 거예요. 내가 예뻐지면 당신한테 좋은 거라고요. 그러니까 가르쳐 줘요. 대신 안 아프게, 살살, 천천히.”
“가르쳐 드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앞으로 시간이···.”
“시간 핑계 대지 말고 시간을 내라고요. 하루에 일 분, 일초라도 나한테 시간을 내란 말이에요.”
“라데카, 하타에 대해 알고 있었니? 아까는 모르는 것 같더니.”
미네르바의 물음에 라데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깐 놀라서 생각 못 했고, 방금 생각났어요. 그쪽에선 기사들은 필수로 하는 것 같고 일반인들도 조금씩 한다고 해요. 아마 길리안 경도 어릴 때부터 했을 거예요. 맞죠?”
“예. 검을 잡으면서 배우기 시작해서 8살이 돼서부터는 지금까지 거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미네르바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나도 가르쳐 줘. 예뻐지는 것 보다 그 효과가 좀 궁금하네. 피로를 푸는 데 도움만 돼도 상당한 거니까.”
그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치, 저 봐. 내가 가르쳐 달라고 할 때는 시간 운운하더니 미네르바 언니가 가르쳐 달라니까 바로 승낙하네. 정말 기사우대는 너무 하다고요.”
라데카의 말에 다들 피식 웃었다.
“그럼 둘이 같이 배우면 되겠네요. 정말 뜻깊은 시간이 될 거예요. 내가 장담할게요.”
라고 말하며 엔젤이 씨익 웃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오늘이 가기 전에 한편을 올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12시 전에 잠을 청할 수 있는 것도.
연재 안 한다고 몸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신경만 더 쓰이네요.
내일부터는 연참대전 한다 생각하고 써보겠습니다.
그리고 내일은 저 밑에 있는 3장 2편의 제목을 2장으로 고칠 겁니다.
그러면 소제목이 1장씩 마이너스가 되겠군요.
뭐 별 상관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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