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1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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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폰 로렌미어 자작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집사의 말에 이베트가 말했다.
“이리로 모시세요.”
그리고 미소 띤 얼굴로 길리안을 보며 말했다.
“어지간히도 급했나보구나. 이렇게 빨리 달려온 것을 보면. 그가 누군지는 기억하니?”
길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지만 인사정도는 했고, 왕의 눈과 귀가되는 인물이니 꼭 기억해야 할 사람이라는 이베트의 당부도 기억이 났다.
“길리안 다시 물으마. 후회되니?”
“아니요. 후회는 없습니다. 물론 제 방법이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른 방법을 찾거나 좀 더 참고 기다릴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화를 다스리지 못한 것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길리안이 이베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그냥 참고 못 본 척 하고 넘어간다면, 전 다음에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말씀하신대로 힘을 모아 나중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해도 하나도 즐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 힘이 없다고 당장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아무 말도 못하는 제가 나중에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저 홧김에 저지른 일도 아니고, 절 봐달라고 제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기 위해, 신분을 높이기 위해, 또 권력을 잡기 위해 기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래도 전 말 잘 듣는 아들은 못 될 것 같습니다.”
“확실히 그럴 것 같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이베트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제 아버지께 돌아가신 어머님께, 그리고.”
길리안이 이베트의 손을 잡았다.
“지금의 어머니께 부끄러운 아들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길리안을 보는 이베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 아이는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품안에 두고 싶은데 그건 자신의 욕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분명 어린 나이인데도 맑고 깊은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고, 스스로 벌인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강한 의지가 보였다. 눈앞의 길리안은 이미 한명의 기사였다.
“길리안···.”
이베트가 말을 하려 할 때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사람이 들어왔다.
브루스 자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둘과 인사를 나눈 브루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이거 제가 좋은 시간을 방해한 모양입니다.”
“네. 조금 늦게 오셨으면 좋을 뻔 했네요. 왜 오셨는지 알고 있으니 본론만 간단히 하셨으면 합니다.”
차갑게 말하는 이베트를 보며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그 전에 길리안 경과 단 둘이 얘기를 좀 나눴으면 합니다.”
잠시 브루스를 쳐다보던 이베트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폐하를 대신해 이곳에 오신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브루스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인 이베트가 길리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길리안. 너에게 많은 말을 했지만 정작 하고 싶은 말을 못해줬구나.”
“말씀 하세요.”
“넌 잘못한 것이 없단다.”
미소를 지으며 길리안의 볼을 쓰다듬은 이베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말씀들 나누세요.”
이베트가 나가자 브루스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군.”
그렇게 말하며 길리안을 봤다.
담담한 표정, 흔들림 없는 눈빛.
자신의 말에 어떤 반응이라도 보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에 침묵하던 길리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자작님께 무슨 변명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없습니다. 예의상 앉아있기는 하나 그저 질책하시러 오신 거라면 이만 일어나고 싶습니다.”
“이곳을 나가면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가?”
“내일도 수업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카데미로 돌아가야겠지요.”
“허허···.”
그 큰 사고를 쳐놓고 내일 수업을 들으러 기숙사로 돌아가겠단다.
헛웃음을 흘리던 브루스가 다시 말했다.
“경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가?”
“예.”
“날 통하면 폐하께 전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도 있을 걸세.”
“제 뜻은 모두 전해 졌을 거라 생각합니다.”
“살다보면 현실과 타협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네.”
“제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타협을 한다고 해도 절대 모른 척 할 수가 없는 일도 있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배웠고,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라면···.”
잠시 말을 멈췄던 길리안이 브루스의 눈을 직시하며 다시 말했다.
“제가 잘못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절 가르친 분들이 잘못 된 겁니까? 그도 아니면 세상이 잘못된 것입니까?”
“음···.”
“기사도나 기사의 서약은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 그걸 떠나서 도대체 법은 왜있는 겁니까? 힘 있는 자들은 지키지 않아도 되고, 힘없는 이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라면···. 하아···.”
말을 하다 한숨을 내쉰 길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진 것 같습니다. 무례인줄 알지만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는 길리안을 보던 브루스가 말했다.
“경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잘 아네. 경의 행동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네. 그리고 지금 밖에 그런 기사들 수십이 진을 치고 있지. 오늘 하루는···.”
“걱정은 감사하나 전 괜찮습니다. 두렵지도 않고 피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럼 이만.”
말을 마친 길리안이 밖으로 나가자 브루스는 깍지를 끼고 눈을 감았다.
살짝 떠보려고 몇 마디 건넸는데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뭐 하고 싶은 말도 다 못 한 것 같기는 하지만.
확실히 방금 길리안의 행동은 무례하다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밉지 않은 녀석이군.’
칼랜베르크에 대사로 갔다가 3년 만에 돌아온 모국.
대사의 일보다 본래 목적은 그곳에서 정보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해도 국가 간의 관계에 완전한 신뢰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처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소기의 성과도 있었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아마도 왕국에 큰일이 터지지 않았다면 몇 년 더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칼랜베르크에 갔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곳에서도 국내 상황을 보고 받기는 했지만 직접 와서 산적한 일들을 처리하다보니 이건 완전히 엉망이었다. 어디까지 노출 됐는지 역으로 이용당한 조직의 재정비부터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딸의 잘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동안 버텨온 것이 용할 정도.
탓을 하려면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탓해야 했다. 솔직히 자신이 계속 있었다고 해도 지금 벌어진 일들을 미리 알고 막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잠잘 시간도 없이 업무를 처리하는 중에 소식을 접했을 때는 머리가 지끈 거렸다.
어린 녀석이 앞뒤 가리지 않고 저지른 일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세한 보고를 받고 조금 생각을 해보니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일단 목격자가 너무 많아서 쉽게 무마하기가 힘들다는 점. 그리고 국왕만을 겨냥해서 한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사들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많은 기사들을 불러 모은 이유가 그것이라 생각했다.
앞날이 보장되다시피 한 촉망받는 왕실기사가 많은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스스로 검을 부러트려 왕에게 보냈다.
‘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바로 그 ‘왜?’라는 이유에 있었다.
그리고 그 ‘왜?’라는 이유를 알게 되면 낮은 곳에 있는 자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뻔하고, 생각 있는 기사들의 가슴에 불을 붙이는 것도 시간문제이긴 했다.
명분이 너무 좋고 그리고 그 명분이 길리안에게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 모든 것이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면 실로 무서운 일이지만 그동안 길리안에 대해 조사한 자료를 봤고, 방금 얘기를 나눠본 결과 그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눈에 담겨 있었다.
왕과 기사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지만 치밀한 계산이 숨어 있지는 않다는 것.
다만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소문의 확산이 너무 빠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 여기에 온 것이다. 솔직히 길리안 보다는 이베트 자작 부인을 만나려는 목적이 더 컸다.
“어쩌면 좋게 해결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요?”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하는 이베트의 목소리에 브루스는 눈을 떴다.
“좋게만 해결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요.”
“자작님께서 3일만 눈감아 주시면 폐하께도 그리고 길리안에게도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맞은편에 앉으며 말하는 이베트를 보고 브루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부인이셨습니까?”
“네. 아 그리고 혹시 오해하실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지금 상황 자체가 계획 된 것은 아닙니다. 누가 시킨다고 그런 행동을 할 만한 아이가 아니니까요.”
브루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운 것일 수도 있었다.
이제 몇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이쪽에서 뭔가 하기도 전에 이베트는 벌써 행동에 옮기고 있었으니까.
수도의 대부분의 술집에서 길리안의 일화를 술안주로 삼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자세하다는 것.
소문을 막기에는 이미 늦었고 내일 날이 밝으면 더 가속화 돼서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위험한 행동을 하고 계십니다.”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이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 위험할 것도 없지요. 어차피 알고 계신 건 자작님뿐이시지 않나요? 그리고 몇몇이 더 알게 된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좀 지나면 많은 이들이 알게 될 일이 조금 빨리 알려질 뿐입니다. 그리고 이상한 억측이나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아는 것이 양측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제가 했다는 증거도 없지요.”
이베트의 말에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귀국해서는 잠시 인사를 나눈 것이 전부이고, 그녀와 이렇게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은 3년만이다.
그가 알던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친우인 그녀의 남편이 죽었을 때도, 그녀의 아들을 잃었을 때도 그 후에도 그녀를 계속 지켜봐왔다. 분명한건 소중한 이들을 잃고 아들의 복수 하나에 매달려온 그녀의 눈에 지금은 생기가 돌고 열의에 차있다는 것.
“어차피 이일에 뭔가 조치를 취할 여유도 없으시지 않나요?”
그건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작님께 도와달라고는 하지 않겠어요. 다만 방해만 하지 말아주세요. 자작님과는 싸우기 싫으니까요. 3일. 딱 3일이면 됩니다.”
이베트의 말에 브루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영웅이라도 만드실 생각입니까?”
“네. 그래야 한다면 그럴 겁니다. 솔직히 영웅이 뭐 별것인가요? 사람들이 영웅이라 생각하면 그리 되는 것이 아닌가요? 폐하께서는 그저 넓은 도량으로 그 영웅을 품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상황이 좋게 돌아간다면 자작님께서 하시는 일도 훨씬 수월해 지실 겁니다. 잃는 것 보다는 얻는 게 훨씬 많을 겁니다.”
브루스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베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계속 됐다.
생각의 정리를 마친 브루스가 눈을 뜨고 이베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잘만 되면 서로에게 좋을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럼 어디 좋은 해결 방법을 모색해 봅시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어찌하고 계신가요?”
“아마 지금쯤 프란트 왕자에게 보고를 받고 계실 겁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미리보기는 일단 그냥 유지하려 합니다.
비축 분을 가지고 복귀한 것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도 그리 많은 게 아니라, 그냥 연재예약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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