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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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바바라를 보고 미네르바가 눈을 치켜떴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고모님. 딱 오해하기 좋은 포즈라고요.”
그러면서 자신의 왼쪽 어깨를 가리켰다.
그때야 왼쪽 어깨에 올려진 길리안의 손과 그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의식하고 피식 웃었다.
“그건 그러네.”
그러면서 손을 내리자 길리안도 미네르바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다정하게 하고 계셨어요?”
“결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부드러운 주제인가요?”
바바라에게 웃어 보인 길리안이 미네르바에게 말했다.
“무기에 적응은 되셨습니까?”
그 말에 미네르바가 웃으며 옆구리에 차고 있는 꼬챙이 같은 것을 툭툭 쳤다.
“내거로 만드는데 조금 고생했지만, 어느 정도는. 카렌 경의 뒤를 잇는다는 거 생각보다 많이 부담스럽더라.”
“그렇게 작아지는 거였습니까?”
“응. 솔직히 나도 놀랐어.”
“체인져는 놀랍군요.”
“체, 체인져요? 설마 초대 넘버즈 카렌 경의 그 체인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질문은 길리안을 보며 했는데 대답은 미네르바에게서 들려왔다.
“응. 이게 바로 그 체인져야.”
그러면서 체인져를 손에 쥐었다.
희미한 빛과 함께 챠르르륵 소리가 나며 랜스와 같은 모양과 비슷한 길이로 늘어난 체인져.
그걸 보고 놀란 바바라를 보고 웃어 보인 미네르바가 체인져를 휘두를 때마다 길이가 줄어들어 들더니 다시 한 손 검보다 짧은 길이까지 줄어들었다.
“와~. 정말 대단해요. 검인가요? 아니면 창인가요?”
그 말에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조금 고민해 봤는데 체인져는 그냥 체인져야.”
“고모님. 저 한 번만, 딱 한 번만 손에 쥐어 봐도 되나요?”
“안 돼.”
“힝.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간신히 길들여 놨는데 다른 사람의 손을 타면 곤란하다고.”
“무기를 길들이다니. 정말 멋지네요. 아니 길들여야 하는 무기라니, 무기가 멋지다는 거예요. 고모님 말고요.”
뾰로통한 표정으로 말하는 바바라를 보며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부러우면 넘버즈가 돼서 날 꺾어봐. 그럼 네 것이 될 테니까.”
“윽! 반드시 올라갈 테니까 잘 간수 하고 계세요.”
“기대할게. 길리안. 너는 어때? 디스트로이어에 익숙해진 거야?”
“예. 검을 받은 날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밤새 휘둘렀습니다.”
“나도 그러기는 했는데 그걸 밤새 휘둘렀다니···.”
미네르바는 고개를 저었고 바바라는 어느새 길리안의 뒤로 와서 검을 살폈다.
“처음부터 검이 너무 무식해 보여서 묻고 싶었는데 페트릭 경의 디스트로이어였군요. 검집은 없나요?”
“검집에 넣으면 뽑을 수가 없습니다. 키가 5미터쯤 되면 모르겠지만요.”
“그렇겠네요. 오우거가 쓸 것 같은 검을 사람이 쓰다니. 정말 무겁나요?”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정말요? 정말이죠?”
고개를 끄덕하는 길리안을 보며 바바라가 환하게 웃었다.
“역시 길리안 경은 누군가와는 다르게 통이 큰 기사님이셨군요.”
“그 누군가는 나를 말하는 거겠지?”
“어머 고모님 아직도 계셨어요? 길리안 경. 어서요.”
상기된 얼굴로 보채는 바바라에게 길리안이 디스트로이어를 건넸다.
한 손으로 가볍게 건네기에 역시 한 손으로 받아든 바바라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는 가볍긴 한데 그래도 너무 무겁지 않나요? 20kg은 넘겠네요. 휴튼 경의 양손 검도 쓰기에는 무겁다고 하는데 두 배는 되겠어요.”
“그게 가벼운 상태고 무겁게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원래 무게로 돌아가게 하는 거죠. 손잡이 끝부분을 돌리시면 됩니다. 땅에 닿아도 되니 편하게 하십시오.”
길리안의 말에 검 끝이 땅에 닿게 한 상태에서 검을 비스듬히 든 바바라가 손잡이 끝부분을 돌리려고 낑낑댔다.
“이거 돌아가나요?”
길리안이 다가가 가볍게 돌리는 것을 보고 피식 웃던 바바라가 깜짝 놀라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이건 너무 무겁지 않나요? 그보다 색이 변하네요?”
지나치게 무거운 것은 둘째 치고 거무스름해서 검이라기보다는 몽둥이처럼 보이던 디스트로이어가 검신부터 손잡이까지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원래의 모습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검집에서 꺼낸 진짜 디스트로이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그렇군요.”
신기한 듯 디스트로이어를 보는 바바라에게 미네르바가 말했다.
“휘두를 수는 있겠어?”
미네르바의 물음에 바바라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검을 번쩍 들어 올렸다.
“100kg은 넘겠어요. 휘두를 수는 있지만, 이걸 휘두르면 중심 잡기도 힘들겠어요. 이걸 정말 쓸 수 있는 건가요?”
“아무리 좋은 무기라도 쓰는 사람과 맞아야 하지. 디스트로이어가 전설의 무기지만 네겐 맞지 않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가벼운 상태라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무게에요. 검에 휘둘리겠네요.”
“뭐, 경험은 소중한 거니까. 그거 제대로 쓸 수 있는 건 넘버즈 중에서도 길리안과 드레드, 둘 정도밖엔 없어.”
그렇게 말하곤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고모님 왜 그러세요?”
“아, 아니 미안. 그 검이 길리안에게 가니까 아쉬워서 입맛을 다시던 드레드가 생각나서. 아무튼, 길리안. 넘버즈를 꿈꾸는 꼬마 아가씨에게 보여주라고. 디스트로이어의 주인이라는 걸.”
“저도 보고 싶네요.”
바바라가 건네는 디스트로이어를 받아든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뭘 보여 드려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한 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혼자 수련하듯이 움직이며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검을 휘두르는 길리안을 보며 미네르바가 고개를 저었다.
“와~ 정말 대단해요. 전혀 무게가 느껴지지 않네요.”
그런 바바라의 어깨에 미네르바가 손을 올리며 말했다.
“차기 괴물 후보지. 그렇다고 반하면 곤란하다.”
“네?”
“힘이나 기사의 능력에 반하지 말고 사람을 보라는 거야.”
“확실히 더 알아보고 싶기는 하네요.”
“곤란하다니까.”
“왜요?”
“조카랑 경쟁하고 싶지는 않거든.”
“네? 그럼 설마?”
“쉿!”
미네르바가 입술에 손가락을 대고 윙크를 하자 바바라의 눈이 더 커졌다.
멈춰 선 길리안이 그런 둘을 보다가 미네르바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어떠십니까?”
“응? 뭐가?”
길리안이 검을 겨눠 보이자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었다.
“마음껏 휘두르는 검을 받아줄 상대 없지 않습니까? 제가 받아드리죠.”
“으음? 뭐지? 그 거만한 태도는?”
길리안이 미네르바의 왼쪽 가슴을 검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은 제가 위에 있으니까요.”
“윽! 반박할 수가 없네. 그래도 너무 자극하지 말라고. 뺏고 싶어지니까.”
“쉽게 뺏기지 않을 겁니다.”
미네르바의 손에 들려있던 체인져가 촤르르륵 소리를 내며 한 손 검 길이로 늘어났다.
검을 길리안에게 겨눈 미네르바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랜만에 한번 놀아볼까?”
“저 둘은 뭘 하는 걸까요?”
멀리 있는 길리안과 미네르바가 서로 검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이베트가 묻자 카스트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기사들이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이유야 뻔하지요.”
“설마 여기서 결투라도 하려는 건가요?”
“대련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이 있는 방향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양손을 입에 모은 바바라가 “결투다!”라고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결투?”
“넘버즈들의 결투다!”
라는 소리가 들리고 뭐라 할 새도 없이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것을 본 이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기사들이란···.”
“좋지 않겠습니까? 신분이나 배경도 중요하지만, 기사들은 강함을 동경하니까요. 다들 길리안을 인정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 말릴 수가 없네요.”
그런 이베트를 보고 카스트로가 말했다.
“그럼 가시지요. 아가씨.”
그 말에 이베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누가 들어요.”
“먼저 가서 자리를 마련해 놓겠습니다. 아가씨.”
카스트로가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루프란 경. 아가씨를 모시도록.”
그 말에 루프란이 씨익 웃으며 크게 소리쳤다.
“이베트 아가씨를 모셔라.”
그 말에 기사들이 아가씨를 모셔 라는 소리를 크게 외치며 양옆에 도열했다.
얼굴까지 빨개진 이베트가 양손으로 치마를 잡고 걸음을 옮겼다.
“다들 나중에 각오하세요!”
“예. 아가씨.”
루프란에 말에 이베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몇 번 공방을 주고받은 둘이 거리를 벌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모여든 기사들과 귀족들.
카스트로가 기사들을 정리해서 자리를 넓히는 것을 본 미네르바가 말했다.
“이런, 가볍게 하려고 했는데 이래선 그럴 수도 없겠네.”
“그렇군요. 어차피 처음부터 가볍게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투구를 벗어 안면 가리개로 쓰던 가면을 뜯어냈다.
“뭐 하는 거야?”
가면을 얼굴에 대고 투구를 쓴 길리안이 말했다.
“시야가 가려서요. 얼굴에 붙어서 떨어지지는 않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광의 갑옷이 아니라 아쉽네.”
“지금도 충분히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디스트로이어의 손잡이 끝을 돌렸다.
다시 거무스름해진 디스트로이어를 본 미네르바가 의아한 눈빛을 하자 길리안이 말했다.
“힘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고개를 끄덕 한 미네르바가 다시 길리안을 겨눴다.
“그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미 코앞으로 다가온 미네르바의 검을 길리안이 검을 들어 슬쩍 밀어냈다.
눈으로 좇기 힘든 빠른 찌르기가 연속으로 들어왔지만 그걸 모두 쳐내며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양손으로 검을 쥐고 큰 움직임도 없는데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유효한 타격을 할 수 없자 미네르바의 눈빛이 변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가 들고 있는 체인져의 모양과 길이가 수시로 변했다.
갑자기 쭉 늘어나 눈앞까지 온 그녀의 검을 고개를 젖혀 피한 길리안이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하아~. 이제는 물러나게 하는 것도 힘드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공격해오는 미네르바.
하지만 길리안도 방어만 하지는 않았다.
눈을 뗄 수 없는 둘의 공방에 기사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길리안에게서 경의 모습이 보이네요.”
큰 동작 없이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받아내며 검을 들고 있는 자세가 오랜 시간을 보아온 카스트로의 모습과 같았다.
크고 단단한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모습.
“몇 달 만에 제 것을 모두 가져가 버렸습니다.”
“네?”
“더는 가르칠 것도 제가 다듬어 줄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카스트로의 말에 이베트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봤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런데 길리안이 계속 밀리는 것 같네요.”
“밀리는 게 아닙니다.”
“그럼요?”
“자신의 강점과 상대의 약점을 알고,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미네르바 경은 몰아붙이고 있는 게 아니라 조급해하고 있는 겁니다.”
누가 봐도 미네르바가 길리안을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 모르지만, 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죠.”
미네르바는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랜만에 붙어본 길리안은 예전에 그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
대결을 시작하고 단 한 번도 길리안의 갑옷에 검이 닿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빨리 강해지는 건 반칙이라고.’
이를 악문 미네르바가 땅을 박차고 쏘아져 나가며 체인져를 쭉 뻗었다.
촤르르륵 소리를 내며 쭉 늘어난 체인져가 길리안을 노렸지만, 옆으로 슬쩍 물러나며 오히려 검을 휘둘러 공격해 왔다.
자세를 낮춰 간발의 차이로 피한 미네르바가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돌아서며 자세를 잡았다.
“언제까지 막기만 할 거야?”
길리안이 검을 늘어트리고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지치실 때까지랄까요?”
그 말에 미네르바가 쓰게 웃었다.
확실히 어깨를 들썩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자신과 비교해서 길리안은 처음과 별로 변한 것이 없었으니까.
미네르바가 길리안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길리안이 작게 말했다.
“아이작 경도 알고 있을 겁니다. 방패를 쓰니 저보다 방어능력이 훨씬 뛰어날 겁니다.”
“알아.”
“한 손 무기를 쓸 테고 저보다 파워는 약할 테니 모험을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겁니다.”
“응. 생각하고 있었어.”
“그래도 방패를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을 않는 정도에서 공격을 받아낼 정도면 될 겁니다.”
“그래.”
“그리고.”
“해줄 말이 더 있어?”
“너무 의식하지 마십시오.”
“뭘?”
“백작님.”
“음.”
“너무 의식하시는 것 같습니다. 신경이 분산된 상태에서 꺾을 수 있을 만큼 전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이작 경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제게 집중하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길리안에게 미네르바가 말했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별말씀을.”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멈춰 돌아선 길리안이 검을 들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아는 미네르바 경의 검은 더 빠르고 더 날카롭습니다. 보여주십시오. 알고도 막지 못하는 당신을 검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길리안을 보던 미네르바가 검을 들어 그를 겨눴다.
“원한다면. 보여주지.”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목적이 전투가 아닌 편이라 전투신은 별로...
날이 너무 춥네요.
다들 건강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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