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7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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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트는 한 손으로 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리안이 어깨에 박힌 랜스를 뽑고 쓰러졌을 때는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너무 놀라 정신을 잃을 뻔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옆에 있던 라데카 때문이었다. 자신보다 먼저 기절한 그녀를 보고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모두 당황해 있을 때 나선 건 젊은 넘버즈들이었다.
귀빈석에서 관전하던 그들이 날듯이 길리안에게 달려가 갑옷을 벗기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줬다.
응급조치가 끝나고 괜찮을 거란 말을 듣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이 정말 영겁처럼 느껴졌다.
그들에겐 무척 감사하고 있었다.
‘정말 너란 아이는···.’
자신을 지옥의 나락 끝까지 떨어뜨렸던 범인은 아주 곤히 자고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편안한 얼굴을 하고서.
좀 전부터 은은한 미소까지 머금고 있는 걸 보면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꿈에서 어머니라도 만나고 있는 거니?’
속으로 물으며 길리안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무 좋다고 그녀를 따라가면 안 된단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잊지 말렴.’
괜찮을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이상하게 불안했다.
빨리 눈을 떠서 웃으며 괜찮다고 직접 말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정말 안심이 될 것 같았으니까.
‘일어나면 볼기라도···.’
때려줄까 보다 하는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어린 라미레스를 떠나보내고 다른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쓰기는 했지만, 자신의 아이를 직접 성인까지 키워본 적은 없었다. 유명한 화가에게 시켜 라미레스가 나이를 먹은 모습을 그리게 해서 봐왔지만 그건 상상일 뿐.
자신의 시간은 그때 멈췄고 십수 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래서인지 길리안이 항상 어리게 느껴지고 지금도 아이처럼 대하게 된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질책할 때가 많았다.
길리안과 라미레스를 혼동하고 있지는 않지만, 가끔은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건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은 유독 더 그랬다.
전혀 닮지 않은 둘이지만, 둘 다 자기 아들.
또다시 아들을 잃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 아이 덕분에 과거에서 벗어나 한 걸음을 내디딜 수가 있었다. 그 발걸음이 멈추고, 다시 멈춰진 시간 속에서 사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가끔은 길리안을 생각하는 정도가 스스로 느끼기에도 집착에 가까울 때가 있었다.
온 신경이 그에게 가 있고, 더 잘해주고 싶고, 더 편한 길을 가게 해주고 싶고, 더 품 안에 두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정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길리안이 떠나갈 거 같아서 그걸 참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었다.
길리안이 자신을 길을 갈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만 말릴 수는 없었다. 응원해주고 믿어주고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으니까.
길리안의 어머니, 그녀였다면 아마도 그랬을 것 같았다.
앞으로 지금보다 더 놀랄 일이 많을 테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살아있어만 준다면, 무사하기만 하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나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단다. 절대로···.’
이베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생각하다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혼자만 있었다면 벌써 울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기 싫었으니까.
그때 손등에 느껴지는 따뜻함에 다시 길리안을 봤다.
“저 괜찮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잘 잤니?”
“네.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꿨습니다.”
“어머니를 만났니?”
“네.”
“무슨 말을 하시던?”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그냥··· 예전처럼 미소를 짓고 계셨습니다.”
“내가 네 꿈을 방해한 모양이구나.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일 텐데···.”
“아닙니다. 제가 또···.”
길리안이 손을 들어 이베트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어머니를 우시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건 그냥 나 혼자 우는 거란다.”
“죄송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어머니 앞에서 절대 쓰러지지 않으려 했는데···.”
그런 길리안을 보고 이베트가 눈물을 훔치고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그 약속은 앞으로도 못 지키겠는걸? 다른 약속을 하는 건 어떠니?”
“어떤···?”
“절대 나보다 먼저 죽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겠니?”길리안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습니다.”
“이번 약속을 어긴다면 정말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각오하렴.”
“예?”
“쫓아가서 혼내줄 테니까.”
“음···.”
따라 죽겠다는 말이다.
웃으며 하는 말이었지만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하아~. 다행이구나. 정말 괜찮은 것 같으니.”
“네. 지금은 무척 상쾌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길리안의 볼을 이베트가 살짝 꼬집었다.
“오늘은 정말 얄미워죽겠구나. 그래, 마음은 편안하니?”
그 말에 길리안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을 죽이면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그게 누구라고 해도···. 하지만 저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래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하지만 길리안. 앞으로 조금은, 정말 조금은 너 자신도 아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내가 늘 걱정하고 있다는 것도 조금은 알아주렴.’
이란 말은 하지 못했다.
“네. 어머니가 늘 걱정하고 있으시다는 건 잘 압니다. 알면서도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
그 말에 이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길리안이 그런 이베트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전 죽으려고 애쓰는 것도, 일부러 죽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경기에 이겨 승급한다고 해도, 상대도 굴복하지 않았을 거고 저도 만족스럽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 알고 있단다.”
“그리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선, 제 목숨도 걸어야 합니다. 그게 제겐 당연한 겁니다.”
이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네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으니까. 그자는 정말 죽어도 마땅한 자더구나. 그래도 기사란 자가, 아니 넘버즈라는 자가 어떻게 랜스 촉에 독을 바를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끔찍하구나.”
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잃기 전에 독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맞았나 보다.
죽은 그에게 예를 표했던 것도 후회가 될 정도.
악독한 일을 벌인 현상범들과 그가 다른 점이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기사 같지 않은 자들이 죗값을 치르고 있었다.
물론 모두가 벌을 받은 것은 아니다.
사람치고 허물이 없을 수는 없으니, 정말 죽여야 할 자나 기사 자격이 없다고 여겨지는 자들만 걸러냈다.
그 정도만 해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사들의 상태는 심각했으니까.
그래도 며칠 새 기사들의 분위기 자체가 많이 변한 느낌은 있었다. 이게 잠깐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넘버즈에 크리스 같은 자는 더는 없었으면 했다.
길리안은 생각을 접고 다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베트 외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다는 것 정도는 정신이 들면서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하는 미네르바를 보고 마주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네가 쓰러졌을 때 넘버즈들이 빨리 나서줘서 네가 무사한 것이니 고맙다는 말을 잊지 말렴.”
“예.”
이베트에게 대답한 길리안이 미네르바에게 감사를 전하기 전에 그녀가 먼저 말했다.
“전 이미 길리안에게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빚이 남아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에요.”
미네르바는 웃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길리안은 그런 미네르바를 보다 시선을 돌렸다.
방 안에 있는 또 한 사람.
젊은 남자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려는데 이베트가 불렀다.
“길리안.”
“네.”
“분명 오늘 네가 죽인 자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 알고 있었다.
베어드 백작가의 막내.
“물론 기사 간의 결투에서 벌어진 일이니 대놓고 어떻게 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긴 힘들게 된 것은 사실이란다. 이것도 좋게 말해서 그런 것이지.”
“네.”
“네가 너의 길을 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오늘 같은 일이 벌어지겠지. 그리고 귀족들과 부딪치는 경우도 많을 거란다. 물론 넌 전하의 기사니 그런 이들의 위협에서 널 지켜야 하는 것은 전하의 몫이란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해줄 수는 없을 테고, 항상 네 손을 들어주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맞는 말이기는 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내 양자가 되지 않겠니?”
“그건 음, 그건 이미 예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 물론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상황이 또 다르니까. 그렇지 않니?”
“그렇기는 하지만 제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그걸 떠나서 제겐 어머니십니다. 그거로는 부족하십니까?”
“물론 충분하지만, 내가 말하는 뜻이 그런 게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 않니? 나의 양자가 되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된단다. 내 재산이나 내가 가진 배경. 그리고 자작의 작위도. 비록 영지는 없지만, 작위를 가진 귀족이 되는 거니까. 아무도 널 무시할 수 없을 거란다.”
“몇 번을 말씀하셔도 제 대답은 처음과 같습니다. 전 지금 이 상태로 만족합니다.”
“정말 너란 아이는···. 좀 더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테고, 네가 하고 싶은 일도 더 많이 할 수 있게 될 텐데. 그래도 싫으니?”
“네.”
바로 나오는 길리안의 대답에 이베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은 어떨까?”
“어떻게···.”
“난 널 법적으로도 양자로 들이고 싶고, 넌 내가 가진 것을 받기 싫어서 거부하니 이렇게 하자꾸나. 성을 바꾸지 않고도 내 양자는 될 수 있단다. 성을 바꾸지 않으니 당연히 넌 귀족이 되지 않을 테고, 상속권만 갖게 되겠지. 네게 자작 위도 주지 않을 거란다. 그리고 나중에 재산을 상속받을 권리는 네가 포기해도 되는 것이니까. 그렇다면 허락하겠니?”
“그건···.”
“네 아버지의 허락은 이미 받아 놓았으니까 걱정하지 말렴. 넌 클라우드 가의 아들이며 또한 내 아들이 되는 것이니까.”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물론.”
“그, 그렇군요.”
“그리고 정확하게 말하면 양자라기보다는 상속권자가 되는 거고, 그건 귀족들에겐 다르지만 같은 말이란다. 물론 문서상에는 양자라는 말을 추가하겠지만, 지금과 변하는 것은 거의 없을 거란다.”
“음···.”
“복잡한 귀족들의 세계를 다 알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길리안 경.”
이베트의 말에 길리안은 피식 웃었다.
“윌리엄 경에게도 말해 놓았으니 상의해보고 말해주렴.”
“예. 그러겠습니다.”
“길리안. 왜 자작 위를 그렇게 받지 않으려는 건지 다시 말해주겠니?”
“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제가 그걸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작위를 받고 성을 바꾼다고 자작가의 후손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지. 네 뜻은 잘 알았단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베트의 시선이 방안에 있던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렇다는 군요. 카라얀 폰 마르샤 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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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읍장님이 등기를 보내셨네요.
민방위 비상소집 통지서...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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