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0장(1)
“아직도 여기에 있었느냐?”
“예. 오랜만이라 드릴 말씀이 많네요.”
윌리엄의 대답에 파마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다시 오마.”
“아닙니다. 드릴 말씀은 다 드렸습니다.”
“나는 말이다.”
말을 꺼낸 파마스가 묘비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 때문에 자책하고 후회하며 이날까지 살아왔단다.”
“아버지 잘못이 아닙니다.”
“내 가족을 내가 지키지 못했다. 그러니 그건 나의 잘못이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 내 잘못으로 너희까지 상처를 받고 그런 너희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했다. 돌이켜 보면 내 삶은 잘못과 후회투성이로구나.”
“음···.”
“아들아, 너는 나처럼 살지 말거라.”
“전 아버지가 잘못하셨다 생각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계셨기에 저희가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세요.”
그 말에 파마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묘비를 쓰다듬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파마스가 입을 열었다.
“좋은 돌을 구해 묘비를 바꿔야겠어.”
“그래야겠지요. 제가···.”
“내가 할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못난 아비가 잘 자란 아들들 덕에 왕께 성을 받는 호사도 누리고, 막내의 상처도 많이 아문 것 같다니 더는 바랄 것이 없구나. 다만···.”
잠시 말을 멈춘 파마스가 윌리엄을 보며 말했다.
“이제는 둘째가 걱정이로구나.”
“제가 찾아보겠습니다.”
“아서라. 이 넓은 세상에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네가 찾겠다는 것이냐. 몸도 성치 않은 녀석이.”
“하하, 그래도 아직 제 몸 하나는 지킬 힘이 있습니다.”
“아서라. 로렌에게 부탁하였으니 너는 나서지 말거라. 네게는 따로 부탁할 일이 있다.”
“말씀하세요.”
“왕께 드릴 약소한 선물을 준비했다. 영주님께서 가져가시려 했지만, 급한 것이 아니니 따로 보내기로 했단다. 그러니 네가 가져가거라. 영주님께서 가 계시니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게다. 내일이면 준비가 될 테니 바로 출발하거라.”
“내일 바로 말입니까?”
“내일 로렌이 출발한다니 그와 같이 가라는 말이다.”
“하지만···.”
“영주님께는 내가 허락을 받아 놓았다. 이번에 올라가거든 둘째를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거나 결혼할 아가씨를 구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거라.”
“네?”
“이곳은 소식을 전하기에는 너무 멀다. 아무래도 수도가 나을 테지. 그리고 언제까지 혼자 살 생각이냐?”
“하하, 그야···.”
“이곳에 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다면 내 귀에도 벌써 말이 들렸을 텐데 그런 것도 없으니 여기서 찾는 것은 힘들겠지. 수도에는 사람도 많으니 네 마음에 드는 아가씨도 있을 것이 아니냐?”
“음.”
“막내의 소식은 더없는 기쁨이고 영광이다만, 그와 별개로 다른 소식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네 결혼 소식이란다.”
“하하하···.”
“이제 나는 너희만 행복하면 더 바랄 것이 없단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오래 사셔야지요.”
“나도 요즘은 예전 같지가 않구나. 늙어버린 게지.”
“그렇게 쉬지 않고 일하시니 그런 것이 아닙니까?”
“평생을 그리 살아왔다.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농사일밖에는 없구나. 손주라도 생기면 그 녀석 보는 재미에 어디 일 할 시간이나 있겠느냐?”
아버지의 말에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제 서른이 아니냐? 장성한 아들이 셋인데 이때껏 손주를 못 보고 있는 건 영지에서 나뿐이다. 그리고 네가 어서 결혼해야 막내 녀석도 빨리 결혼을 할 것이 아니냐. 형의 뒤만 따르는 녀석인데 네 나이까지 결혼을 안 할까 봐 벌써 걱정이구나.”
“음, 설마요.”
“그 설마가 사람 잡는 게지. 나도 설마 네가 그 나이까지 결혼을 안 하겠냐 했다만, 정말 안 하더구나. 알아서 하겠거니 했는데 그러지 않으니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것이다.”
“하하.”
“아니면 내가 정해주는 여자와 결혼하겠느냐?”
“어머니 같은 여자가 있습니까?”
라는 윌리엄의 물음에 파마스가 쓰게 웃었다.
“정숙하고 현명하고 아름답기까지 한 여자를 원한다면 네가 직접 찾아보아라. 단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거라. 아들들이 모두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을 보고는 싶다만, 시간이 무한정 있는 것은 아니니까.”
“음, 알겠습니다.”
“내가 지체하지 말고 복귀하라 하였거늘 나의 명이 우습더냐?”
“그럴 리가요. 저는 그러려고 하였습니다만, 볼란트 경과 티란테 경이···.”
“쯧쯧쯧.”
에런 왕이 혀를 차는 소리에 일 왕자 윈스톤은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 둘이 하는 말이면 뭐든 들어주겠다는 것이냐? 책임자는 너이고 명령을 내리는 것도 너다. 잘못하였으면 인정하고 책임을 져야지 그 둘의 핑계를 대는 것이냐? 한심한···.”
에런 왕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윈스톤의 얼굴이 구겨졌다.
“너는 국경을 돌아보며 무엇을 느꼈느냐?”
“저는···.”
그 이후로 다른 말이 없자 한동안 기다리던 에런 왕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보고 느끼고 현실을 파악하라고 지금까지 모든 왕이 그래온 것이다. 국경의 영주들과 친목을 다지라는 것이지 대접이나 받으며 그저 여행이나 하다 오라고 보낸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면서 짐 마차에 가득 실린 것들은 무엇이냐?”
“영주들이 주는 작은 성의라 하여···.”
“작은 성의? 한심한. 세상에 공짜로 호의를 베푸는 자는 없다. 나중에 네게 바친 것들을 상기시키며 네게 요구를 해올 것이란 말이다.”
“음.”
“그리고 네게 준 것을 영주들이 어디서 얻을 것 같으냐? 그들의 영지다. 빈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 추가로 세금을 징수하며 그들이 뭐라 하는지 아느냐? 왕자에게 바칠 세금을 징수한다며 네게 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거두어 들였다. 그 원망이 누구를 향할 것 같으냐? 바로 너와 왕가다. 그 소문이 이제 수도까지 퍼졌다.”
“모, 몰랐습니다.”
“몰랐다? 허허, 이것 참.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를 잘못 키웠구나. 너를 탓할 것이 아니라 잘못 키운 나의 탓인 것을···.”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의 시선이 볼란트와 티란테에게 향했다.
“내 둘에게 느끼는 실망이 무엇보다 크다. 왕자를 잘못 보필한 것도 모자라 아주 재미있는 일을 벌였더군.”
“그건 오해이십니다.”
티란테의 말에 에런 왕이 피식 웃으며 옆에 있던 크락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건넨 것을 들고 티란테를 보며 말했다.
“둘이 기사들과 나눈 맹약 서가 이렇게 있는데 오해라?”
“그건 충성의 대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단결하여 왕가에 충성하자는 취지로 한 것입니다.”
“말은 좋군. 그럼 왕실 기사시험에 힘을 행사해 합격을 시키고 그들을 휘하로 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건···.”
“그게 왕가를 위해 충성한다는 기사란 자들이 할 짓인가? 실력도 자질도 없는 자들을 휘하로 놓고 그런 말이 나오는가? 언제부터 왕실의 중앙 기사단이 실력 없는 떨거지들이 골든로드의 졸업장만 있으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되었냐는 말이다.”
“음.”
“제3, 제4 중앙 기사단의 모든 기사의 작위를 박탈할 것이다. 너희는···.”
“저희의 힘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자신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하는 티란테를 보고 에런 왕이 피식 웃었다.
“필요 없다.”
“하지만···.”
“나의 기사가 되고 싶어 하는 이들은 많고 너희의 가문이 아니라도 내게 충성하는 가문 또한 많다. 너희 둘이 넘버즈 상위 번호라 하여 대신할 기사가 없다고 생각하느냐? 너희가 대단하다 착각하지 말라. 그리고 솔직히 너희의 실력도 믿지 못하겠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실력을 의심받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볼란트의 말에 에런 왕이 피식 웃었다.
“자 그럼 어디 둘과 겨뤄본 루퍼드 경이 보기에는 어떤가?”
“분명 실력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둘을 이길 수 없는 기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둘을 대신할 기사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말에 에런 왕이 좌우에 늘어서 있는 넘버즈들을 보다 다시 말했다.
“길리안 경. 경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둘이 넘버즈에 어울리는가?”
“기사는 용병도 몬스터 헌터도 아닙니다. 실력은 당연히 기본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전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실력이 좋다 하여 죄를 용서받을 수는 없습니다. 둘에게는 넘버즈의 자격도 기사의 자격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들었는가?”
그런 에런 왕과 길리안을 번갈아 보던 볼란트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했다.
“고작 저런 자에게 기사의 자격을 평가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루퍼드를 보며 말했다.
“같은 출신이고 후작가의 자제라 양보해 준 것도 모르고 자신의 실력으로 그 자리에 올랐다고 착각하고 있군.”
그 말에 루퍼드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들은 그 어떤 말보다 모욕적이군. 왕께 청이 있습니다.”
“말하게.”
“어차피 벌할 자들이라면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달라?”
“저런 말을 듣고 참고 넘길 수 없습니다. 어차피 죽일 자들이니 제가 죽이게 해주십시오.”
“허허.”
헛웃음을 흘리는 에런 왕에게 드겔이 말했다.
“그 또한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 때문에 루퍼드 경의 실력이 의심받고 명예도 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말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할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흐음.”
로렌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제가 No.4에 도전 하겠습니다. No.3도 상관없습니다.”
그러자 드레드도 앞으로 나섰다.
“전 No.7이지만 펠릭스 경이 없는 지금 No.4에 도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게 기회를 주십시오.”
“그럼 제가 No.3에 도전 하겠습니다.”
로렌스의 말에 루퍼드가 나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와 겨뤄야 하는 것은 저입니다. 실력을 의심받으며 No.2의 자리를 지킬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허허, 이것 참.”
서로 상대하겠다는 넘버즈들을 보며 에런 왕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솔직히.”
말을 꺼낸 미네르바가 앞으로 나섰다.
“두 단계씩 도전하는 법만 없었다면 제가 도전하고 싶습니다.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란 것도 한때 저런 자에게 고개를 숙였던 것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 미네르바에게 아이작이 말했다.
“그래도 규칙은 지켜져야 하지 않겠는가? 경은 내게 도전하는 것이 맞지.”
“음, 아이작 경은···.”
“잘 잘못을 떠나 상위 번호에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떤가, 미네르바 경. 나에게 도전하겠는가? 다른 넘버즈들의 대결 전에 여흥으로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 말에 미네르바가 다른 넘버즈들을 봤다.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넘버즈 No.10 미네르바 폰 발렌슈타인이 No.8 아이작 폰 보르시아 경에게 정식으로 승급 결투를 청합니다.”
“그 도전 받아들이겠네.”
그렇게 말한 아이작이 에런 왕을 보며 말했다.
“왕께서도 허락해 주시길 청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젓던 에런 왕이 작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넘버즈들이 대결을 하겠다는데 내가 어찌 말리겠는가. 둘의 결투를 허락한다. 그리고 볼란트.”
“예.”
“솔직히 그냥 벌하고 싶지만 루퍼드 경의 명예를 위해 한번 기회를 주겠다.”
“No.2 루퍼드 경에게 도전하겠습니다.”
그런 볼란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에런 왕이 드레드와 로렌스를 보며 말했다.
“드레드 경. 경의 말에 일리는 있으나 로렌스 경이 먼저 말을 꺼냈고 넘버즈의 도전 규칙에도 부합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경이 양보하라.”
“알겠습니다.”
드레드가 물러나고 고개를 숙여 보이는 로렌스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에런 왕이 말했다.
“넘버즈의 대결은 영주 회의가 시작되기 전날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날부터 모든 왕실 기사들은 실력을 재평가 받을 것이고 또 1차로 왕실 기사를 새로 뽑는 시험 또한 그날 열릴 것이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내일은 아쉽게도 일합니다. 에잇!
아무튼, 다른 넘버즈들의 대결은 짧고 굵게 가보려고 합니다.
그보다 자꾸 맞춤법 검사기가 싸움을 거네요.
(이베트-이방망이) 방망이 아니라고!
(넘버즈들-번호 자기들) 뭐?
(라이라프-라라프랑스) 거긴 어디냐?
뭐 이것만이 아닙니다.
애들 이름은 다 시비예요.
작가가 맞춤법 검사기와 싸우는 넘버즈는 계속됩니다~
이것도 검사기 돌리니 (넘버즈는-번호 드는) 아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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