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9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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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등에 메고 다니던 커다란 검은 대장간에 보내 녹여버렸고 더 크고 무거운 녀석으로 환생했다. 그 외에도 몇 자루의 검을 더 만들었는데, 지금 들고 있는 건 흔히들 쓰는 한손 검에 손잡이의 길이만 조금 더 길게 한 것이었다.
검을 몇 번 휘두른 길리안이 혼자 끙끙 거리고 있는 미네르바를 향해 말했다.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아 요즘 나온 갑옷으로 바꾸던가 해야지 몇 년 전거는 혼자 입고 벗기가 무척 불편하거든. 나중에 갑옷 맞출 때 참고하도록 해. 그보다 뒤쪽에 이것 좀 풀어주겠어?”
“갑옷은 왜 벗으시려고요?”
“명색이 넘버즈인데 무장을 다한 상태에서 너와 겨룰 순 없잖아?”
“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방어구라면 옷 속에 입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미네르바가 씨익 웃었다.
“그래? 뭐 그렇다면 그냥 시작할까? 솔직히 갑옷을 벗으면 출렁거려서 불편하거든.”
“네?”
“못 알아들었으면 됐고. 준비됐으면 언제든 시작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길리안이 검을 들어올렸다.
“그럼.”
그리고 막 한걸음을 떼었을 때.
파앙! 하는 소리가 들리며 다음 순간 눈앞에 있는 보인 것은 검의 끝부분.
미간에 닿을 듯 말듯 멈춰져있던 검이 다시 멀어졌다.
“좀 더 진지하게 임하는 게 어떨까? 난 기다려주고 받아주면서 가르치는 타입이 못되거든.”
길리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검은 빨랐다.
아니 놀라울 정도의 속도였다.
소리가 나는 순간, 움직였다는 걸 인지한 순간에 이미 미간에 닿아있었으니 말이다.
화살이나 크로스보우에서 발사되는 볼트를 피하거나 막는 훈련도 해왔지만 방금 그녀의 찌르기는 그것보다도 훨씬 빨랐다.
조금 물러나 다시 자세를 잡고 서있는 그녀를 봤다. 비스듬히 서서 오른손에 쥔 검을 위로 세우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얇은 검 뒤에 미네르바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검은 일반적인 검과는 무척이나 달랐다. 솔직히 말하면 검이라고 할 수 없어보였다.
아주 기다란 송곳 같다고 해야 할까?
무기만 놓고 보면 찌르기에 특화된 것으로 보였다.
끝은 뾰족하고 날카로운데 손잡이 부분으로 갈수록 조금씩 두꺼워졌다. 그래봐야 손가락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아 별 차이도 안 났고, 날이 서있는 것도 아니어서 정말 긴 송곳을 들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찰나 그녀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확대되는 검을 피해 옆으로 한 바퀴 돌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길리안의 검은 허공을 갈랐을 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선 미네르바가 돌아서며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넘버즈라 긴장한 건가? 아니면 여자라서 제대로 상대할 마음이 없는 건가?”
그렇게 말한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을 털자 발밑에 작은 물체가 떨어졌다.
그걸 본 길리안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바로 옷에 달려있던 단추였다. 피한다고 피했는데 완벽히 피하진 못했나보다.
솔직히 이렇게 빨리 넘버즈와 검을 섞어볼 기회가 올 줄은 몰랐기에 흥분도 됐고 긴장을 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여자라서 제대로 상대할 마음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대응하기 힘들 만큼 미네르바의 공격이 너무 빠를 뿐.
길리안은 크게 숨을 들여 쉬고 양손으로 검을 잡았다.
무심한 눈에 무표정한 얼굴.
그걸 본 미네르바의 입가의 미소가 짙어졌다.
“이제 좀 진지해졌네. 그럼. 간다?”
말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
일직선의 환영을 남기며 검을 쭉 뻗어왔다.
한걸음 물러서 거리를 벌린 후 공격을 걷어내기 위해 검을 휘둘렀지만 이미 그녀의 검은 다시 회수된 후.
거기에 자신의 검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검이 지나친 자리로 다시 찔러왔다.
‘뭐가 이렇게 빨라?’
순간적으로 길리안의 머릿속에 스쳐간 생각이었다.
아주 단순한 동작.
팔을 굽혔다 펴며 찌르는 동작의 반복인데 그게 너무 빨라서 동시에 여러 곳을 찔러오는 느낌이 들었다.
팔이 몇 개는 달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
눈에 의지해서 피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제대로 반격도 해보지 못하고 찔러오는 검을 피하기에 바빴다.
‘제법...’
미네르바는 자신의 공격을 피하는 길리안을 보며 눈을 빛냈다.
처음에는 반응도 못했고, 두 번째에는 완벽히 피하지 못했던 녀석이 지금은 벌써 십여 차례나 피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간발의 차이였지만 조끔씩 여유를 찾아가는 모습. 아니 점점 자신의 속도에 적응해 간다고 해야 할까?
흔들림 없는 무심한 눈.
생각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
얼굴 표정과 눈빛만 봐도 방금 전까지 순진하게만 보였던 그녀석이 맞는지 의심이들 지경이었다.
산에서 봤을 때도 보통은 넘겠구나했는데 지금 보니 생각 이상이었다.
‘이런 녀석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거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갈 때 길리안의 모습이 밑으로 푹 꺼지는 착각이 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어느새 다리를 베어오는 길리안의 검.
검이 막 다리를 베려는 순간, 몸을 살짝 띄워 검 면을 밟고 뒤로 한 바퀴 돌아 땅에 내려서서 길리안을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너 생각보다 대단한 아이였구나. 아니 남자... 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말하며 검을 털었다.
또다시 발밑에 떨어진 단추하나.
그걸 무심한 눈으로 내려다본 길리안이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빠르고 단순하다. 그래서...’
무척이나 위협적이고 효과적이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격이 아닌 딱딱 끊어지는 직선의 공격. 베기를 배제한 오로지 찌르기만 하는 공격.
물론 단점도 있고 약점도 보인다.
그런데 알면서도 공략할 수 없는 건 그걸 허용하지 않는 극한의 스피드 때문.
거기에 발밑을 베던 검을 밟고 날아오르며 그 와중에 옷에 달려있던 단추하나를 가져갔다.
말이 좋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미네르바만이 보여줄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넘버즈는 역시 넘버즈란 건가?’
솔직히 이렇게 빠른 상대는 처음이었다.
힘에도 스피드에도 자신이 있었는데 따라갈 엄두나 나지 않는 속도. 거기에 지금 보여주는 것이 그녀의 최고 속도는 아닐 것이다. 넘버즈에 그냥 오른 것이 아니란 걸 증명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이게 만약 실전이었다면?
처음에 미간사이에 검이 닿았고, 단추를 두 개 잃었으니 벌써 세 번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물론 실전과 이런 대련은 많은 차이가 난다.
실전에선 변수도 더 많고 마음가짐 자체가 지금과는 다를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건 목숨을 건 대결이었다면 지금 바닥에 시체가 되어 뒹굴고 있을 것은 자신이라는 것이다.
‘난 한참 멀었구나.’
수도로 올라오는 길에 현상범들을 잡으며 쌓아온 실전경험이 오히려 독이 된 느낌이었다.
몬스터를 때려잡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실전경험도 많이 쌓았다고 생각하며 자신감에 차있었다. 기사 작위쯤은 언제든 받아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지금까지 자신감이라고 생각했던 게, 지금 돌아보니 자만이었나 보다.
자만과 자신감은 어찌 보면 종이 한 장 차이.
몇 번 안 되는 공방이었지만 느끼는 것이 많았다.
그걸 깨달을 수 있게 해준 것은 고마웠지만, 아무리 상대가 넘버즈인 미네르바라고 해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는 것은 용납이 되질 않았다.
길리안은 검을 고쳐 잡고 왼손으로 허리에 묶여있던 검 집을 풀어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본 미네르바가 쓰게 웃었다.
“화가 난 모양이구나.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진 모르겠지만 나도 지금 무척 당황스럽거든?”
솔직히 그녀도 많이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보다 위의 넘버들도 피하기보단 막거나 흘려버리는 쪽을 택하는 공격이다.
한번 피하기 시작해서 주도권을 내주고 나면 반격이 쉽지 않았고, 그렇게 두지도 않았으니까.
물론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지만 정식기사가 이렇게 피했어도 자존심에 금이 갔을 판이다.
그런데 이제 17살의 아카데미입학생이 자신의 공격을 모두 피하고 반격을 한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나마 단추를 하나 뺏어온 것으로 자존심을 챙긴 정도.
거기에 잠깐 동안에 뭘 느낀 건지 검 집까지 빼들고 서 있는 걸 보니 뭔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보고 있는 건가?’
자세를 취하고 서있는 길리안의 몸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몇 년 만 지나면 정말 괴물이 될 녀석이군.’
그런 길리안을 보고 쓰게 웃던 미네르바가 자세를 잡았다.
이쪽에서도 제대로 상대해줘야 할 것 같았으니까.
눈앞에 검을 세우고 길리안을 바라보던 미네르바가 몸을 웅크리며 무릎을 살짝 굽힌 순간.
그녀의 몸이 빛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녀가 몸을 날려 온 순간 길리안도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거리를 좁혀오는 그녀의 속도를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거리를 좁힌 그녀가 막 검을 뻗는 순간, 물러서기만 하던 길리안이 반전하며 왼손을 쭉 뻗었다.
허공에서 마주친 검과 검 집.
미네르바가 검을 휘수하려했지만 길리안이 그대로 두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다가서며 오히려 검에 검 집을 찔러 넣는 모양새가 됐다.
검 집이 검을 잡아먹은 순간 길리안의 어깨가 미네르바의 가슴을 강타했다.
뒤로 밀려나는 그녀에게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쳇.’
이미 검을 놓친 상황.
다가오는 검을 본 미네르바는 오히려 길리안에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손목과 팔을 잡고 길리안을 메치려했다.
원했던 대로 길리안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응?’
턱 소리가 나면서 몸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바닥에 널브러지지 않고 발로 땅을 디딘 길리안이 오히려 그녀를 들어 올린 것이었다.
“아악!”
“헛!”
미네르바는 비명을 질렀고 길리안은 헛바람을 삼켰다.
막 그녀를 메치려다 눈에 보인 비탈.
어찌하기엔 이미 늦어 그녀를 덥석 안고 비탈을 굴렀다.
그렇게 십여 미터를 굴러서야 바닥에 멈춰 설 수 있었다.
“윽...”
길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키려다 밑에 깔려있는 미네르바를 보고 깜짝 놀랐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대답이 없었다.
“미네르바님. 괜찮....”
“푸흣.”
그녀가 웃음을 터트리는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 그냥 좀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언제까지 내 위에 있을 거니? 그리고 손도 좀 치워주면 고맙겠는데...”
미네르바가 그렇게 말하며 밑에 쪽을 쳐다봤다.
“헛!”
그녀의 가슴에 손이 닿아있는 것을 본 길리안이 기겁을 하고 몸을 일으키며 물러났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커다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너무한 거 아니니? 꼭 못 만질 걸 만진 것처럼.”
“아니.. 전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괜찮아 어차피 갑옷인데 뭐. 그렇다고 내 가슴이 그렇게 딱딱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실제론 무척 말랑말랑하다.”
길리안은 뭐라 답을 할 수도 없어서 그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런 길리안을 본 미네르바가 씨익 웃었다.
“훗, 이런 식으로 놀려먹어야 반응이 좀 나오는군.”
“저... 정말 전 고의가 아니라...”
“알아. 괜찮다니까. 그래도 어디 가서 내 가슴 만졌다고 말하면 죽일지도 모른다?”
“물론입니다.”
정색을 하고 대답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일으켜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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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이번 편은 서로에 대해 감탄하고 서로 뭔가를 느끼고 배우는 편이랄까요.
그나저나 왜 하필 저기에 비탈이 있었을까요? 참 신기한 일이죠? 하하하;;;
내일부터 연참대전이군요. 뭐 지금처럼만 하면... 생존은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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