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1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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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은 방안에 있는 이들을 둘러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에리스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쏘아붙이는 라데카와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에리스.
그런 둘이 재미있는지 미소를 머금고 지켜보는 윌리엄.
‘하아. 정말···.’
길리안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보고를 처음 받았을 때 엔젤은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길리안은 한창 떠오르는 별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고 있었고 그만큼 질시의 시선도 많았다.
작은 실수만 해도 크게 부풀려 그를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일 텐데, 오늘 저지른 일은 그 사안이 너무 심각하고 또 컸다.
길리안이 카스트로 경과 함께 마르샤 자작가로 갔다는 말에 일단 그의 형인 윌리엄경과 대책을 논하기 위해 길리안의 집으로 왔다.
길리안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만큼 자신은 무척이나 초초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찾아온 것인데 윌리엄은 의외로 너무 담담했다.
처음에는 그러는 척 하는 줄로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정말로 심각해 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대책을 논의하러 온 것인데 나서지 말라는 부탁을 받았고, 자신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란 얘길 들었다.
윌리엄이 나서면 상당수의 기사들이 나서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그가 아무것도 안하겠다는 것.
이미 몇 번 만나보고 대화를 나눠보기도 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이 바뀔 정도였다.
길리안 만큼이나 그의 형도 보통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래서 지금의 길리안이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에 찾아온 에리스.
길리안이 없기 때문에 집사의 말을 듣고 윌리엄이 그녀를 맞아 데리고 왔다. 다른 방에서 충분히 기다리게 할 수 있는데도 그녀를 데려온 것.
윌리엄을 설득하려고 했는데 그녀 때문에 이야기는 더 진행되질 않았다.
에리스는 길리안이 걱정돼서 찾아왔다고 했다.
길리안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성은 많지만 먼저 관심을 내보여도 그가 곁을 내주질 않아 대부분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정도이고, 아카데미에 있는 여성들 중 그나마 에리스가 길리안과 가깝게 지내는 정도였다.
그렇다고 둘 사이가 연인처럼 보이고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여자들에 비해 조금 가까운 정도, 정말 딱 그 정도였다.
엔젤은 에리스가 찾아온 이유를 곧이듣지는 않았다.
미모가 뛰어난 에리스는 여성 중에서 관심을 받는 이였다. 벌써 구애도 꽤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고, 바른 행실로 구설수에 오르는 일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한창 주목받는 기사의 집을 방문한다?
내일당장 이런저런 소문이 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데 찾아 왔다는 것은 둘 사이가 그만큼 발전 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단 그녀의 아버지 입김이 크게 작용한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길리안에게 자금을 지원 받아 어려움을 넘기고 그의 사업은 지금은 빠르게 안정돼 가고 있었다.
길리안이 투자한 돈이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뒤에서 이베트가 많은 지원을 해줬다는 걸 엔젤은 알고 있었다.
일전에 이베트와 나눈 대화로 그녀가 에리스를 좋게 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길리안만 좋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결혼이 가능 할 것이다.
이제는 이베트의 사람이라고 봐도 될 그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절대 나쁘지 않은 일.
에리스가 찾아와서 뭔가 도움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엔젤은 어느 정도 안심 할 수가 있었다.
신분을 떠나 상인이라는 존재들은 이익이 없는 일에 나서질 않는다. 큰 사업을 하는 이들은 약간의 손해도 감수하지만 그건 더 큰 이익을 보고 행하는 일. 그만큼 정보도 빨라야 하고 그것을 잘 활용하고 정치도 잘 해야 한다.
길리안이 벌인 일은 최악의 경우 목숨도 장담 할 수 없었다.
소문이 퍼지면 수도 전체가 그 일로 시끄러워질만한 큰일이고, 몇 시간 밖에 안 된 일이지만 벌써 알만한 이들은 다 알고 있을 일.
그런데 에리스가 길리안의 집으로 찾아왔다.
아마도 이베트 자작부인이 움직였고 그걸 본 에리스의 아버지가 판단했을 때 적어도 손해 볼 일은 없다고 생각했으니 지금 그녀를 보낸 것이리라.
그저 기사 작위를 반납하고 일이 마무리 되면 그것만 해도 좋은 일. 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길리안을 맞이할 대귀족도 있을 테고, 다른 길도 얼마든지 있다.
오히려 힘이 들 때 옆에서 위로가 되어준 에리스 때문에 길리안과 이베트에게 많은 점수를 딸 수 있을 테니까.
뭐 거기까지는 좋았다.
라데카가 오기 전까지 말이다.
일전에 있었던 일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려고 왔다는데 솔직히 라데카가 온 것은 의외였다.
시기가 좋지 못했으니까.
자체 조사 때 습격을 받았고 그때 라데카가 길리안의 도움을 받은 것은 알고 있어서 그러려니 했는데 문제는 그녀의 행동이었다.
자신은 둘째 치고 에리스를 대하는 태도가 거의 연적을 대하는 수준.
라데카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행동을 보고 길리안에게 어느 정도의 호감은 있는 것 같단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호감 수준이 아니었다.
‘짝사랑이라도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데카가 조교로 오고 나서부터 길리안과 마주칠 일이 많았다. 둘 사이에 뭔가가 있다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조금이라도 티가 났을 텐데 그런 것은 없어 보였다.
‘밖에서 따로 만나나?’
하고 생각해 봤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우선 길리안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고, 아직까지 그때 일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렇다 할 만남은 없었다는 것.
엔젤은 고개를 저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지금 라데카의 행동은 이해가 안됐다.
“라데카 이제 그만 좀 하지 않겠니?”
“제가 뭘요?”
“혹시 길리안 경을 좋아하니?”
“제가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요? 전 그저 신세진 일이 있으니 감사의 뜻을 전하러 왔을 뿐이에요.”
눈을 치켜뜨며 말하는 라데카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혹시 에리스 양을 싫어하니?”
“아니요. 딱히 좋다 싫다 말할 정도의 친분이나 감정이 있지는 않아요.”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그러니까 제가 뭘 어떻게 했는데요?”
“에리스 양에게 계속 길리안 경과의 관계를 추궁하고 있지 않니?”
엔젤의 말에 라데카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어머 호호호. 제가 추궁하는 것처럼 보였나요? 전 단지 아무런! 관계도 없어 보이는 에리스 양이 이런 안 좋은 시기에 이곳에 와있는 것이 신기해서 호기심에 그런 거랍니다.”
엔젤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네가 왜 여기에 있냐는 말이었으니까.
그건 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이 둘의 어린애 같은 언쟁을 언제까지 듣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마음이 급한데 이 둘 때문에 윌리엄을 설득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길리안 경은 늦을 것 같으니 둘 다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전 괜찮아요. 기다리죠 뭐.”
자신이 말을 톡 끊어먹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라데카를 보고 눈을 치켜떴다.
“감사를 전한다면 꼭 오늘 이 자리가 아니어도 되지 않니? 내일이면 또 아카데미에서 마주칠 테고, 어차피 지금까지 전하지 않은 감사라면 좀 더 나중에 전해도 상관없는 것 아니니?”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어요. 더 미루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오늘은 꼭! 감사를 전하고 싶네요.”
말은 자기에게 하는 것 같은데 라데카의 눈은 에리스에게 고정돼있었다.
엔젤은 작은 한숨을 내쉬며 에리스에게 말했다.
“에리스 양도 이만 돌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걱정해주는 마음과 다녀간 것은 전해 질 거예요.”
“저도 괜찮습니다.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조금 더 못 기다릴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길리안 경을 못보고 가면 아쉬울 것 같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에리스의 시선도 라데카를 향해 있었다.
둘 다 한쪽이 먼저 가지 않으면 안가겠다는 뜻이었다.
엔젤을 그런 둘을 번갈아보며 인상을 팍 썼다.
‘이것들이 정말!’
엔젤이 그러거나 말거나 라데카는 지금 상당히 짜증나있는 상태였다.
누구보다 먼저 그 소식을 접했고 아버지가 이베트 자작부인을 만나러 간 것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도 할아버지가 보낸 반지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처음에는 무척 놀라셨고 그 다음에는 상당히 못마땅해 하셨다. 그래도 전혀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닌지 별다른 말은 없으셨다.
공과 사는 구별하는 분이시고 아버지는 왕가를 위해 모든 걸 바치는 분이니 길리안의 편에 서주지는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래도 할아버지를 봐서 최악의 경우는 면하게 해줄 거란 생각을 했다.
그보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는 당연히 어려울 때니 옆에서 위로를 해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계기로 혼자서만 알고 끙끙거리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큰마음 먹고 온 것이었다.
처음에 엔젤을 봤을 때는 조금 놀랐지만 그 입장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방안에 있는 또 하나의 불청객.
길리안에 관한 건 사소한 것까지도 보고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에리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귀족이긴 하지만 평 귀족이니 기사인 길리안과 별 차이도 없었다. 거기에 길리안의 도움도 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이제 이베트의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예쁘다는 것.
멀리 갈 것도 없이 아카데미에서 그만한 미모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어딜 가나 돋보이는 그녀는 길리안과의 접촉도 많았다.
아직까지 별다른 관계는 아니지만 어떤 계기가 있다면 급물살을 탈 수도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그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러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자신이 아무것도 해보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내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에리스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라데카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라데카는 자신과는 급이 다른 귀족가의 영애였다.
이렇게까지 날을 세우는 것은 좋지 못한 행동이긴 하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엄청나게 참았지만 상대가 그렇게 두질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길리안의 소식을 접하고 걱정이 되기는 했었다. 아버지가 가보라고 했을 때도 별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섰다.
솔직히 길리안에게 연정을 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결혼까지도 염두 해두라고 하셨는데 그때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아버지가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도 있었지만, 남자로서 매력적인 것도 사실. 사랑이 배제된 결혼을 한다고 해도 그와는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그런 생각을 하고 놀라기도 했었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기는 했다.
다른 것을 떠나 길리안과 있으면 참 편했다.
그리 대단한 집안의 여식은 아닌지라 고위 귀족들의 자제들이 보면 자신은 그저 예쁘지만 어려운 여자는 아니었다.
그들이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내며 환심을 사려하는 이유가 자신을 사랑해서라기 보단 어떻게 한 번 해보겠다는데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길리안은 그런 이들과 근본부터 달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봐주는 이였다.
지금 그에게 느끼는 감정도 애정보다는 우정에 가까운 느낌이랄까? 여자도 아닌 남자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이 스스로도 신기했다.
그에 비해 눈앞에 있는 라데카의 감정은 짝사랑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길리안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양보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자신과 길리안이 잘 안된다고 해도 눈앞에 있는 라데카에게 휘둘리는 그를 보기는 싫었으니까.
“후우···. 윌리엄 경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시나요?”
에리스와 라데카의 신경전을 보며 미소를 짓던 윌리엄은 자신이 호명되자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저야 이렇게 길리안을 걱정해주시는 분들이 많아 그저 기쁠 뿐입니다.”
어차피 윌리엄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주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둘에게 윌리엄이 있으니 그만 좀 하라는 뜻이었다.
“제가 있어 방해가 되신다면 자리를 비켜 드리겠습니다.”
윌리엄의 말에 엔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경이 있어 그나마 이 정도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하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이대로 두면 가뜩이나 힘든 길리안 경이 더 힘들어지겠지요?”
윌리엄은 별 대답 없이 그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거기 아가씨 둘.”
엔젤의 말에 에리스와 라데카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에리스 양. 좀 편하게 말해도 되겠죠?”
“네.”
에리스의 대답을 들은 엔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우리 좀 솔직하게 얘기해볼까요?”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미네르바까지 끼면 수라장이 되겠군요.
하지만... 그럴 리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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