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6장(2)
“형.”
“응?”
“나 넘버즈 됐어.”
길리안의 말에 윌리엄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 큭큭거리더니 큰소리로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런 형을 보던 길리안도 피식 웃었다.
치료를 받고 나오다 마주친 형.
괜찮으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니 자신을 찬찬히 훑어보고 어깨를 툭 쳤다.
오늘은 궁에 묵으라는 왕의 명을 받았다고 하니 잠시 산책이나 하자고 해서 같이 걸었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싶었는데 그런 거 같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그냥 걷다가 큰 나무 밑에 형이 기대앉는 걸 보고 옆에 앉았다.
그리고 밤하늘을 보다가 생각해보니 형에게 얘기를 안 한 것 같아서 막 말을 꺼낸 것이다.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직접 말은 해야 했으니까.
윌리엄의 웃음이 잦아들 때쯤 길리안이 뭘 그렇게 웃느냐고 볼멘소리를 하자 그가 길리안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녀석, 참 빨리도 말 하는구나.”
“윽. 말할 시간이 없었다고. 뭐 정신도 없었고.”
윌리엄이 길리안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알아. 그래, 넘버즈가 된 기분은 어떠냐?”
“음, 그게 처음엔 좋은 것 보다 너무 놀라고 얼떨떨하기도 해서 정신이 없었고, 그게 지나고 나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할까?”
“왜?”
“그게 그렇잖아. 내가 한 행동이 그렇게 잘한 것도 아니고. 분명 이렇게 되길 바라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주군을 압박하는 걸 잘했다고만은 할 수는 없는 거잖아. 그런데 너무 과분한 상을 많이 받았어. 예외넘버까지 받으며 넘버즈가 될 만큼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으냐?”
“일단 왕께서 그렇게 선언한 걸 내가 어떡하겠어. 그래서 아직 난 정식 넘버즈가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도전할 기회를 부여받은 거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리고 정식으로 넘버안에 들게 되면 열심히 해야지.”
그런 길리안을 보며 윌리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럼 축하도 정식넘버 안에 들면 그때 해주마.”
“응.”
“길리안.”
“응.”
“조심해라.”
그 말에 길리안이 자신의 몸을 보고 멋쩍게 웃었다.
“이거 많이 다친 것도 아니고 그냥 긁힌 거야. 별로 안 위험했어.”
반은 맞는 말이었다.
폭발 때문에 던전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기사인 이상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죽지는 마라.”
“노력할게.”
“아버지에겐 이제 우리뿐이다. 삼형제 중에 나는 이 모양이 됐고, 둘째 녀석은 몇 년 동안 연락도 없다. 그런데 네가 잘못되기라도 해봐라. 그땐 아마도 다시 일어나시지 못 할 거다.”
“알아. 조심할게.”
그리고 윌리엄을 보며 씨익 웃으면 말했다.
“너무 걱정 마. 후버가 삼형제 중에 내가 제일 강하잖아.”
“이제 클라우드가라고 해야지.”
“아 그랬지! 입에 붙으려면 조금 걸리겠어. 형. 그런데 아버지가 좋아하실까?”
“좋아하실 거다. 평민이 왕께 성을 하사받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지는 아버지도 충분히 아시니까. 네가 왕실기사 됐다고 고향에선 벌써 한턱 크게 내셨다고 하더라.”
“어? 정말?”
“그래.”
“거 봐. 형 때도 그랬다니까.”
“그래 이제 믿으마. 넘버즈가 되고 성까지 받았으니 이번엔 며칠 축제라도 벌이시겠구나.”
그 말에 길리안은 그저 피식 웃을 뿐.
“길리안 내가 조심하라고 한건 네 몸만이 아니다.”
“그럼?”
“이번일로 적이 많이 생겼을 거다.”
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이들이 지금의 자리에서 물러날 테고, 사형을 당하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거기에 넘버즈까지 됐으니 뼈 속까지 귀족의식으로 똘똘 뭉친 자들은 널 무척이나 싫어하겠지. 오히려 눈에 보이는 확실한 적은 별거 아니야. 뒤에서 음해하는 자들이 더 위험할 때가 많아. 정말 무서운 자들은 앞에선 웃으며 친분을 쌓고, 뒤에서는 칼을 가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정말 조심해야 하는데,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까진 알기 힘들지.”
“음···.”
“여긴 우리가 나고 자란 곳과는 많이 다르다. 왕도 우리 영주님 같지는 않고···.”
“이젠 나도 알아.”
“왕은 작은 영지의 영주보다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왕국과 왕가를 위해선 가족을 희생시키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다. 넘버즈의 기사라고해서 예외일 수는 없지.”
“그렇겠지.”
“내가보기엔 이번에 널 넘버즈로 임명한 것도 정치적인 면이 커. 널 품어서 얻는 이득이 버릴 때보다 훨씬 많으니까. 네가 계기를 만들었고 기사들이 동조했고 왕비님까지 나섰다. 수많은 평민들도 힘을 보탰으니 움직일 수밖에 없었겠지. 너도 그 정도 생각은 했을 거 아니냐? 그러니 마냥 좋지만은 않았겠지.”
“형만큼은 아니어도 조금은.”
“이번 일로 왕께서 얼마나 변할지는 몰라도 넘버즈 역시 기사다. 주군의 뜻을 거스르고 기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지. 그래서 좋은 주군을 만나는 것이 기사에게 가장 큰 복이라는 말이 있는 거다.”
형의 말에 길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생각과 다르다는 거야 조금 겪어봐서 알게 됐을 테고, 막상 가까이에서 겪어보니 넘버즈도 그렇게 대단하게 느껴지지는 않았겠지?”
“음, 그건 뭐···.”
“넘버즈가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그만큼 네가 강해서 그런 거다. 네가 목숨을 걸고 얻은 경험들은 지금의 넘버즈들도 가지고 있지 못한 거니까.”
말을 멈춘 윌리엄이 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어릴 땐 넘버즈의 자리가 정말 뭐든 다 할 수 있는 위치인줄 알았다. 어차피 평민 출신이 올라가기 힘든 자리기도 했지만, 그때야 노력만 하면 될 줄 알았지. 어머니와의 마지막 약속이었으니 꼭 지키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몸이 이렇게 되지 않았어도 난 아마 넘버즈가 되지 못했을 거다. 노력만으로 또 실력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니니까.”
길리안은 말없이 형의 말을 들었다.
자신을 항상 응원해주던 형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저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로렌스 경과는 아카데미 통합 축제 때 매번 맞붙었다. 정말 죽어라 노력했는데 졸업 때까지 한 번도 이길 수가 없었지. 드레드 경이나 미네르바 경도 비슷한 시기에 아카데미에 다녔는데 난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형도 뭘 부러워하는구나.”
“녀석아 나도 사람인데 부러운 게 없었겠냐.”
“하긴.”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그때는 어렸으니까. 태생을 원망해본 적은 없다만, 그래도 부럽기는 하더라. 작은 시골영지였지만 최고의 재능이란 소리도 들었었고, 슈발리에에서도 항상 최고였었지만 그걸 로는 부족했지.”
“음.”
“처음에 아카데미에 들어갈 때만 해도 왜 평민출신 기사가 넘버즈에 오르지 못했을까했는데, 그와 몇 번 붙어보고 나서 이유를 알겠더라.”
“왜?”
길리안의 물음에 윌리엄은 피식 웃었다.
“모든 기사가 너처럼 수련한 건 아니다. 너만큼 많은 몬스터를 때려잡은 이도 없을 테고. 너도 그 정도는 이제 알잖아?”
“그야 뭐···.”
“내동생이지만 내가 봐도 네가 대단한 거다. 나도 다른 기사들처럼 수련했으니까. 물론 조금 더 많이 노력은 했지만 그거로는 부족했다. 좋은 환경에서 최고의 지원과 지도를 받은 이들이 재능도 뛰어나고 노력도 하는데, 이기기 힘든 건 어쩌면 당연한 거겠지.”
그때만 해도 길리안에게 형은 최고였다.
그런 형이 저런 생각을 했을 줄은 솔직히 몰랐다. 오늘 처음 듣는 얘기니까.
“출발선이 다르고 속도가 다르니 평민출신들이 따라잡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거다. 먹고살 걱정은 없어서 수련에 매진할 수 있었고, 여러 기사들에게 지도도 받았던 내가 그렇게 느꼈는데 다른 이들은 오죽할까.”
이미 이런 얘기를 꽤 들어본 길리안이었지만 형의 입을 통해서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도 정말 죽도록 노력하니까 어느 정도까지는 따라잡을 수 있더라. 그렇게 실력 다음에 느낀 벽은 신분과 썩어빠진 세상이었지.”
“음.”
“같이 왕실기사 시험에 합격한 동기들 중에 평민출신은 대부분 국경과 다른 직영지에서 기사생활을 시작했다. 왕의 눈에 들기도 힘들고 2년에 한 번 있는 왕실 기사들의 평가나, 가을에 열리는 무투회도 지방에 있으면 참여하는 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 자체 예선도 그리 공정하진 않고.”
“그렇구나.”
“뭐, 나도 처음부터 국경에 배치 될 줄은 몰랐다. 그 다음엔 말 안 해도 너도 알 테고. 내가 이렇게 되고 고향에 돌아갔을 때만해도 네게 말해주고 싶었다. 세상도 넘버즈도 내가 듣고 꿈꾸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넌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럼 말해주지 그랬어.”
“어떻게 말 하냐? 넘버즈가 삶의 유일한 목적인 너한테서 그걸 뺏으면 네가 어떻게 될 줄 알고? 그리고 내가 말린다고 네가 검을 놓았을까?”
길리안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형의 말이 맞았으니까.
“그래도 아카데미는 다녀볼만 하고 너도 세상을 직접 보고 느끼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어린 줄만 알았던 막내가 엄청나게 강해졌더라. 널 계속 지켜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라면 가능할거라고.”
윌리엄이 길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재능도 나보다 뛰어나고 노력도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는 녀석이, 어떤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굳은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까.”
윌리엄이 손에 힘을 줬다.
“길리안.”
“어.”
“변하지마라.”
“나 안변해. 그런데 형이 보기엔 어때? 지금의 내가 예전에 비해서 많이 변했어?”
“그야··· 이제 어리숙한 촌놈 티는 벗었지.”
길리안이 피식 웃자 윌리엄도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마음 같아선 널 업고 수도를 몇 바퀴 돌면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다.”
“아직 아니라니까.”
“과정이 어떻든 간에 넌 이제 넘버즈다. 이제 기사가 되려는 이들은 너를 보며 넘버즈를 꿈꿀 거다. 그러니 세상에 보여줘라. 네가 가고자 했던 기사의 길. 네가 꿈꾸던 넘버즈의 모습. 그걸 네가 직접 보여주는 거다.”
윌리엄의 말에 길리안이 씨익 웃었다.
“응. 그럴게. 넘버즈가 됐다고 끝이 아니야. 난 안주하지 않을 거고 더 노력할거야.”
“그래. 그래야 내 동생이지. 네가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생겨도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내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올라도 난 아버지와 어머니의 아들이고 형들의 동생인 길리안이야. 농부의 아들이고 크롬의 영웅이 형이고, 기사인 길리안이야.”
“녀석.”
“형. 나 조금 욕심을 내보려고 해.”
“욕심?”
“아니 다른 꿈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면서 검지만 펴서 달을 향해 팔을 뻗었다.
“No.1이 될 거야.”
“너라면, 너라면 충분히 될 수 있을 거다.”
윌리엄은 그렇게 말하고 한동안 크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향에 다녀올 생각이다.”
“언제?”
“이삼일 내로 출발할 생각이다. 생각보다 왕께서 빨리 사람을 보내주신다더군. 겸사겸사 다녀올 생각이다.”
“안부 전해드려. 아버지께도 다른 분들께도.”
“그러마. 그래도 어머니께는 네가 말씀드려라.”
그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마 한동안 고향에 못갈 거야. 그러니까 형이 내 대신 말씀드려. 울보 막내가 넘버즈가 됐다고.”
“설마 No.1이 되기 전엔 안 가볼 생각이냐?”
“그럴 리가 없잖아. 한동안은 바쁠 테니까.”
“그렇겠지.”
“대신에 새로운 약속은 내가 직접 가서 할게.”
“그래.”
길리안은 밝은 달을 쳐다봤다.
마음 같아선 형과 함께 한번 다녀오고 싶었다.
몇 개월씩 집을 떠나 있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그립다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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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월요일은 이상하게 힘드네요.
그나마 어제 조금 써놔서 다행히...
추석 연휴는 아직 멀었군요. 충전 좀 하고 싶은데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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