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4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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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길리안의 승리를 점치는 기사는 없었다.
루프란은 정식기사이고 길리안이 태어나기 전부터 기사였던 베테랑이었다. 거기에 기사단의 부단장으로 카스트로 다음가는 강자였다.
그런 그에게 기사 지망생을 상대하라고 했으니 결과는 빤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다칠 것을 대비해 길리안에게 갑옷이라도 입혀야 되지 않겠냐고 말하는 기사도 있었다.
루프란이 전장에 나설 때처럼 완전 무장을 한 것은 아니지만 훈련을 하고 있던 중이라 기본적인 방어구는 갖추고 있었고, 그에 비해 길리안은 검 한 자루 달랑 멘 것을 빼면 여행할 때 입던 옷차림이었으니까.
루프란은 카스트로의 말처럼 길리안을 벨 생각은 없었다.
말이 그렇지 진지하게 상대하라는 뜻이었을 테고, 실력을 끌어낼 정도로만 상대해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눈앞에 있는 이 애송이가 그리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리안이 검을 잡은 순간부터 기세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앳된 얼굴에 순진해보이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에 무심하고 깊은 눈빛.
기사 지망생이라지만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이쪽에서도 진심으로 상대해주는 것이 예의라는 생각에 루프란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때 검을 잡은 길리안이 걸음을 떼었다.
한 발짝 내딛는 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쏘아져오며 검을 빼들었다 싶은 순간 왼손으로도 검 손잡이를 잡고 크게 베어왔다.
이렇게 양손으로 크게 검을 휘두르는 것은 상대를 맞추면 좋지만 일격이 빗나가면 반드시 허점이 노출되기에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정면에서 상대가 대비를 하고 있는데 이러는 것은 경험이 부족하다고 밖에는 말 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상당히 빠른 베기였지만 루프란이 피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베어오는 검을 지켜보던 루프안이 옆으로 한걸음 물러나 피했다. 아슬아슬하게 검이 스쳐지나갔지만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후웅 소리가 날정도로 위력적인 공격이었지만 맞추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것.
길리안의 검은 딱 봐도 무게가 상당해 보이는 대검이었다.
무거운 검을 이런 식으로 휘두르면 멈추기도 힘들고 중심 또한 무너지기 쉽다. 잠시 후면 쾅 소리가 나며 땅을 때릴 것이 분명했다.
처음 보여줬던 기세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운 공격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루프란이 길리안을 향해 움직였다.
갑옷을 입지도 않은 기사 지망생을 상대로 일부러 상처를 낼만큼 그는 악하지 않았다.
방패로 밀어 물러나게 할 생각으로 다가선 것인데 웬걸.
분명 땅을 치며 균형이 무너져야 정상인데 어느새 거리를 벌리고 아래에서 위로 베어오고 있었다.
‘회전?’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다가서는 것을 멈추고 몸을 낮추고 방패를 비스듬히 들었다.
텅 소리가 나며 길리안의 검이 방패에 빗겨 맞았다.
‘음...’
뜻한 대로 막기는 했는데 순간 몸이 휘청했다.
빗겨 맞은 공격이고 작정하고 막은 것인데 중심을 잃은 뻔했다. 거기에 충격으로 왼팔이 저릿저릿했다.
하지만 놀랄 사이도 없이 후웅 소리가 나면서 또 위에서 아래로 베어온다.
루프란은 재빨리 뒤로 물라나며 거리를 벌렸다. 커다란 검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그 뒤로도 길리안은 쉬지 않고 베어왔고 루프란은 거리를 벌리며 피하기만 했다.
‘재미있는 녀석이군.’
길리안의 공격은 상당히 재미있었다.
검은 벨 수도 있고 찌를 수도 있는 무기이다. 끝은 뾰족하고 날이 양쪽에 있기 때문에 공격 옵션이 많다.
어떤 공격 형태든 물 흐르듯 이어지면 좋기는 하지만 그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혼자서 수련할 때야 그럴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가 피하거나 막으면 다른 동작을 취해야 하니까.
예를 들면 위에서 아래로 베었는데 상대가 피하면 곧바로 다음 동작을 취하기 위해 행동을 멈추고, 다시 검을 들어 올려 베거나 찌르거나 하는 동작을 취한다. 아니면 상대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그런데 길리안은 회전을 했다.
그 크고 무거워 보이는 대검을 들고 말이다.
처음 그렇게 크게 휘둘렀는데도 땅에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은 이유는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방금도 스치듯 검을 피하자 길리안이 몸을 회전했고 검은 다시 한 바퀴를 돌아 자신을 향해 날아왔다.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베고 난 후에 회전을 통한 다음 공격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 베는 식이다. 두 번의 공격이 합해지면 X자의 형태였다.
이런 식의 공격을 하는 이가 아주 없는 편은 아니고, 처음 겪는 상대라면 분명히 효과를 볼 수가 있을만한 공격이긴 했다.
특히 길리안을 얕보고 처음부터 검을 마주 대 막으려하거나 무리하게 거리를 좁히려 한다면 더욱.
하지만 루프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처음 한두 번이면 몰라도 길리안처럼 무식하게 같은 패턴을 고집하는 이들은 없었다.
물론 이 어린 기사 지망생에게도 생각은 있을 것이다.
그의 검은 중병기고, 그 무게에 휘두르는 힘과 회전이 더해지면 파괴력은 상상이상임이 분명했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위력이 훨씬 강할 것이다. 회전력과 힘이 계속 더해지기 때문이다.
속도도 점점 빨라지고 있는 것을 피하는 동안 느꼈다.
길리안의 회전이 계속 될수록 공기가 찢기는 것 같은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소리만으로도 소름끼칠 정도로 강한 위력이라는 것은 잘 알 수 있었다.
파괴력을 극대화한 공격.
하지만 그뿐이었다.
맞추지 못하면 소용없는 힘의 낭비일 뿐.
그리고 몇 번이라면 몰라도 계속 저렇게 빙빙 돌 수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검의 무게와 회전력을 감당하며 중심도 잡아야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공격도 해야 하기에 시간이 갈수록 컨트롤하는 것이 어려워지는 것을 불 보듯 빤한 일.
또 저렇게 회전을 하면 보통은 어지러움을 느끼게 된다. 수련을 해서 어느 정도는 괜찮다고 해도 무한정 돌 수는 없다는 말이다.
루프란이 보기에 참신하기는 하지만 조금만 피하면 스스로 자멸할 수밖에 없는 공격법이었다.
그리고 그는 길리안의 공격을 벌써 스무 번 가까이 피하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면 길리안은 스무 번 정도를 뺑뺑 돌았다는 것이다.
싱겁게 승부가 날것을 예측했던 기사들도 어느새 진진하게 둘의 대결을 보고 있었다.
물론 멋들어진 공방을 주고받는 대결은 아니었다.
길리안의 일방적인 공격을 루프란이 피하는 것이었지만 확실히 흥미진진하기는 했다.
더 이상 길리안을 애송이로만 보는 기사는 없었다.
지금 회전하는 길리안의 검을 정면으로 막을 자신이 솔직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라면 부딪쳤을 때 검이 부러지거나, 검을 놓쳐서 날아가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손아귀가 찢어질 것이 분명했다.
그들 중 누가 나섰다고 해도, 아마 방심한 채로 상대했을 테니 크게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루프란도 처음보다는 진지하게 길리안을 상대하고 있었다.
섣부르게 거리를 좁혔다간 다가가보지도 못하고 저 공격에 노출되고 만다. 처음 검을 피하고 다가섰을 때 이미 한번 당했으니까. 그때 좀 더 빠른 스피드로 공격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은 다가서는 게 쉽지 않았다.
상대하기가 꽤 까다롭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칠 때까지 피하기만 해도 되고 아니면 처음처럼 검이 스쳐지나가는 순간 거리를 좁혀 공격을 해도 된다.
물론 빨라진 상대의 스피드만큼 이쪽에서도 빠른 공격이 필요하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루프란은 침착하게 그 타이밍을 잡기위해 집중했다.
길리안의 검이 또다시 그를 스쳐지나갔다.
‘지금.’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생각보다 빠른 회전이 있을 수 있기에 방패로는 몸을 보호하고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쭉 뻗었다.
기사답게 빠르고 군더더기 없는 공격.
루프란이 움직이는 순간 지켜보던 기사들도 이제는 승부가 났구나 싶었다.
양손으로 검을 쥐고 회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길리안의 몸도 같이 돌아야했다. 그건 상대에게 등을 보이는 순간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이다.
검을 마주한 상태에서 눈을 깜빡이는 것도 위험할 때가있는데, 지금 같은 경우는 스스로 적을 시야에서 놓치는 것은 물론 약점까지 노출하는 것이다.
모두가 승부가 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어?....
즐거운 주말 되세요~
Comment '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