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6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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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은 창밖을 바라보는 길리안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왕성으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고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보상이 있을 거라고 했다.
조사단에 대한 공격은 그냥 넘어갈 사안이 아니었다.
길리안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 자리엔 넷째 왕자가 있었다.
부상을 당한 것은 미네르바뿐이지만 그녀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왕실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
그 범인을 그대로 놓쳤다면 미네르바 휘하의 기사들은 얼굴을 못 들고 다녔을 것이다. 물론 잡은 것은 길리안이지만 기사들의 입장에서도 놓친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곳에 있던 모두가 길리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 밝혀진 것은 별로 없지만 오랜 시간 암살자로 키워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었다. 그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신체 강화마법이 걸려있는 반지였다.
보통사람도 아니고 극한의 훈련을 받았을 이가 그런 아티팩트를 썼으니 보통 기사들이 그를 쫓지 못한 것이 이해가 갔다.
그걸 끝까지 쫓아 잡아낸 길리안이 대단한 것이다.
포상보다 고무적인 것은 왕이 그의 실력을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미 기사의 자리를 권하긴 했지만, 그때는 직접적인 관심이라기 보단 왕자의 청에 의해 움직였다고 보는 게 맞다.
언젠가는 왕의 눈에도 들 날이 올 것이라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관심을 가질 줄은 솔직히 몰랐다.
아카데미의 교관들도 자신도 그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총장대리로 부임한 첫해라 의욕이 충만했었다. 개인적인 목표도 있었고 장기적인 계획도 있었다.
그 첫 번째는 슈발리에를 최고의 아카데미로 올려놓는 것.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최고가 못 된다 해도 골든로드나 드니로프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명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좀 더 수월하게 해나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
그 때문에 100여 년의 전통이 깨졌고 뭔가 시작해보기도 전에 주저앉을 수도 있는 상황. 솔직히 말하면 몇 년 동안은 아카데미의 암흑기가 찾아올 것이라 예상했었다.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후원자들이 등을 돌리고, 위험한 곳에 자식들을 둘 수 없다는 이유로 다른 아카데미로 옮기는 방법을 모색하거나 안전해질 때까지 휴학을 시키겠다는 부모들이 많았다. 열심히 설득했지만 수십 명이 그렇게 떠나갔다.
신입생 중에는 합격 통지를 받고도 등록을 포기하겠다는 이들이 수백이었다.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학부도 있을 정도.
기사 학부의 경우도 성적이 우수한 이들이 대거 등록을 포기해 그보다 못한 이들이 입학했다. 이번 신입생들은 저주를 받았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다.
부임 첫해부터 찾아온 위기.
하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가지 희망적인 일이 있었다면 바로 눈앞에 길리안이 아카데미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첫날 체력시험에서 보여준 놀라운 능력.
사건 후 산행 코스가 취소되고 시험이 진행됐을 때는 시험 자체를 포기한 이들도 많았었다. 침체된 분위기를 달궈 놓은 것이 길리안이었다.
수많은 지원자 중에서 홀로 뛰어났고 홀로 돋보였다.
그의 시험성적은 점수를 결코 후하게 준 것이 아니었다. 이미 현역에 있는 어지간한 기사들을 뛰어넘는다는 교관들의 평가는 과장 된 것이 아니었다.
그건 자신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니까.
물론 부족한 부분도 보였지만 기사가 갖춰야 할 필수 능력은 모두 갖췄다는 것이 교관들의 평가였다.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충분히 놀랄 실력이지만 그보다 몇 년 후가 더 기대되는 최고의 인재.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었다. 물론 아직은 그에게 직접 뭔가를 제시한 것이 아니고 후견인인 이베트 자작부인과 먼저 접촉하고 있었지만, 그것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후견인이지만 길리안을 마음대로 휘두르기보단 그의 뜻을 존중해주겠다는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고, 그도 쉽게 움직일 만한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만큼 신경 쓰고 배려해 그의 마음을 붙잡아놔야 하지만 그 또한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아카데미가 문제가 아니었다.
습격을 당했던 일이 많이 퍼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 그리고 왕이 직접 그의 실력을 보고 인정해준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더 높아질 것이다.
어지간한 귀족 가에서만 태어났어도 루퍼드와 비교되며 예전부터 큰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나쁘지 않았다.
그를 자식처럼 여기는 든든한 후견인이 있고 뒤를 받쳐줄 힘 있는 귀족 가와 혼인으로 맺어진다면 평민의 신분이 높은 걸림돌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웃었다.
이베트 자작부인이 다른 것은 몰라도 결혼에는 크게 관여할 것처럼 보였으니까. 파티장에서 보여준 모습이나 그가 다쳤을 때 본 모습은 누가 봐도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어지간한 가문의 여식은 그녀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길리안이 사랑에 빠져 포기할 수 없다고 하면 모르지만, 평소 그의 태도로 봐서는 그럴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
지금까지 주의 깊게 지켜보고 상담을 통해 길리안의 성격을 많이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적인 상황에서 여자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그건 대처방법을 몰라서라고 생각했다. 여자를 많이 대해보고 이런저런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생기면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지도 몰랐다.
이미 아카데미에 수많은 여학생이 관심을 가지고 편지나 선물을 통해 뜻을 내비쳐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첫눈에 반하지 않는 한 그가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진 않을 것 같았다.
한참 이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나이니 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내색하지 않고 스스로 절제하는 거라 생각했다. 정말 보기 드문 경우다.
사람들은 일생을 살면서 사랑이 한 번뿐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론 그렇지가 않다. 특히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들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다. 열 여자 마다치 않는 것이 남자들이다. 남자들이 속삭이는 사랑은 거의 여자를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길리안은 좀 다를 것 같았다.
길리안의 경우는 처음이 무척 중요할 것 같았다.
어떤 여자든 그의 마음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으면 그걸로 끝일 가능성이 컸고 결혼서약까지 하고 나면 정말 악녀가 아닌 다음에는 그의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이런 얘기는 라데카가 집요하게 물어봐서 산에 오르며 해주기도 했었다.
물론 자신의 생각일 뿐이었지만.
‘그러고 보면.’
라데카의 행동이 참 수상쩍었다.
사람들의 시선과 찬사를 즐기긴 하지만 그뿐이다. 남자에 관한 얘기를 해도 마음에 안 든다는 얘기뿐이고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유독 길리안에게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길리안이 미네르바가 아름답다고 말했을 때 라데카가 지었던 표정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수상해.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미네르바 언니도···.”
그런 생각을 하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네르바가 아름답다는 말에 상당해 좋아하기는 했지만, 길리안을 남자로 보지는 않을 것 같았으니까.
생각을 접고 길리안을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아, 미안해요. 딴생각하다가···. 긴장되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길리안을 보고 엔젤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17살의 평민 생도가 왕을 만나러 가는데 괜찮다고 한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다. 사전에 예고도 없었고 갑작스럽게 닥친 상황인데도 태연했다.
“왕께서 실력을 직접보고 마음에 든다면 기사 작위를 내릴 가능성이 커요. 이번에도 거절할 생각인가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왕께 기사서임을 받는다고 해서 꼭 왕실기사로 일선에 나설 필요는 없어요. 나 같은 경우가 그렇죠. 물론 왕께서 부르신다면 언제든 달려가 기사의 의무를 다하겠지만요.”
그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는 신분도 처지도 다르고 자신에겐 다른 목표가 있었으니까.
“아카데미에 계속 남고 싶은 건가요?”
“아직은 배울 것도 많고 그러고 싶습니다.”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해서 아카데미에 다니지 말라는 법은 없어요. 그런 경우가 없었을 뿐이죠. 방법은 많으니 지금은 실력을 인정받는 것에만 신경 쓰도록 해요. 왕께서 원하는 것을 물었을 때 솔직히 대답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도와줄 테니까요.”
“예. 감사합니다.”
길리안은 마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봤다.
오면서 창밖으로 봤지만, 왕성 내부는 무척이나 컸다. 성벽을 지나서도 한참 걸려 궁전에 도착했다.
처음엔 이 성 자체가 수도였고 사람들도 이 안에 모여서 살았다고 한다. 수도에 많은 사람과 귀족들이 모여들고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 외성을 쌓고 기존에 있던 성은 내성이 된 것이라 그만큼 규모가 클 수밖에 없었다.
안내를 받으며 도착한 곳에서 엔젤이 말했다.
“실력을 보이는 것이 먼저에요. 좋아하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들어가 봐요.”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수많은 병장기와 갑옷들. 그걸 둘러보며 조금 더 걷자 안쪽에 있는 사람이 보였다.
“형?”
놀라는 길리안을 보고 윌리엄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서 와라.”
“형이 여긴 어떻게···.”
“자작 부인께서 말씀해주셔서 알았다. 함께 왔지.”
“그, 그랬구나.”
“이 녀석. 내가 이런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어야 되겠냐?”
“그게 말할 시간이 없었어. 오늘 갑자기 이렇게 된 거라서.”
“주일날 나가더니 습격을 당하고 범인을 잡았다고?”
“그, 그건 말이지 비밀로 하라고 해서.”
윌리엄이 길리안의 어깨를 잡고 마주 섰다.
“혼내려는 게 아니다. 잘했다고 칭찬해주려는 거지. 네가 세운 공이고 오늘은 그걸 보상받는 날이다. 솔직히 네가 자랑스럽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네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생각해도 위에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고,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하는 일도 위에서 인정해준다면 그건 큰 공이 된다. 이렇게 인정받을 기회는 쉽게 오는 것이 아니야.”
“음···.”
“솔직히 네가 지금 당장 일선에 나서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저번과 상황이 달라. 기사 작위를 준다면 받아라. 아카데미에 남고 싶다면 그렇게 말을 해. 그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거다.”
“그럴까?”
“내가 아는 너라면 충분히 모두를 놀라게 할 수 있다. 국왕께 모든 걸 보여줘라. 감출 필요도 머뭇거릴 것도 없다. 충분히 인정받을 실력이 있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는 공을 세웠다. 네가 원하는 것을 얻고 네가 원하는 길을 가라. 내 동생이 이 정도에 만족하고 자만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준 윌리엄이 비켜서며 뒤에 있던 갑옷을 가리켰다.
“저걸 입어라. 빨리 준비하고 나가야지.”
그걸 본 길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거 형 갑옷 아닌가?”
“맞아. 아직 갑옷을 맞추지 않은 네게 제일 잘 맞는 것이 내 갑옷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투구가 왜 이래? 이거 내 가면 아닌가?”
“네 녀석이 그거 쓰고 설칠까 봐 투구에 가져다 붙였다. 그만한 방어구도 찾기 힘들고, 원래는 이렇게 해서 생일선물로 주려고 했다만···.”
“날 준다고? 정말?”
“뭐 네가 더 크면 새로 맞춰야겠지만 그전까진 입을 만할 테니까.”
“형은?”
“내가 저걸 입고 싸울 일이 뭐가 있겠냐.”
그러면서 잘려나간 팔을 흔들어 보였다.
“집에 장식처럼 세워 놓기엔 아깝잖아.”
“고마워 형.”
“더 좋은 갑옷을 입어야지. 솔직히 기사의 가장 큰 무기는 갑옷이니까. 잠깐 입는 거라 생각해.”
“아니. 내가 계속 입을래. 몸에 맞지 않으면 몰라도 그전까진 내가 계속 쓸게.”
“녀석. 잘하면 갑옷에 몸을 맞추겠구나. 나 때문에 일부러 그럴 필요 없다.”
“아니 내가 그러고 싶어. 생일선물 고마워.”
윌리엄이 길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좋아하니 다행이구나. 어서 준비하자.”
길리안은 주변을 둘러봤다.
늘어서 있는 근위대와 근위기사들.
원래는 마상 창 시합을 관전하는 곳이라 했다.
아직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꽤 많은 사람이 자리에 앉아있었고 자작부인과 카스트로의 모습도 보여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근위기사들과 겨루게 될 거다. 검술을 겨루고 나면 마상 창 시합도 해야 해.”
길리안은 형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명 귀족 가의 장남들이 기사서임을 받기 전 실력을 인정받는 방법의 하나로 약식으로 필요 능력만 평가하는 것이었다.
“긴장하지 말고 제 실력만 보여주는 되는 거다. 무리해서 꼭 이길 필요는 없어.”
“아니. 이길 거야. 나 강하잖아.”
그런 동생을 보고 윌리엄이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투구를 건넸고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때 왕이 등장하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취했다. 기사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고 길리안도 그들을 따라 예를 취했다.
탄생일을 축하하는 축제 때 왕성의 성벽에 모습을 드러내고 가끔은 사냥을 나갈 때 볼 수도 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왕을 처음 본 것인데 이상하게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인상이었다.
“모두 일어나라.”
왕의 말에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길리안에게 향했다.
“상을 내리기 전에 실력을 보고 싶어 불렀노라.”
“무한한 영광입니다.”
“기대하겠다.”
그리고 손짓을 하자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중 한 명이 길리안에게 다가왔다.
“난 근위대장인 크락시스다.”
넘버즈가 왕의 검이라면 그는 왕의 방패였다. 근위 기사단과 근위병들을 총괄하는 자리.
그가 길리안을 살펴보다 다시 말했다.
“저기 있는 근위기사 중 한명을 골라 겨루면 된다.”
기사들을 살펴보던 길리안이 한 기사의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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