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5장(4)
드레드는 마을 어귀에 들어서며 인상을 찌푸렸다.
몇 년 동안 버려진 마을이라지만 기분 나쁠 정도로 음습한 느낌.
거기에 뭔지 모를 쾨쾨한 냄새까지.
19호의 보호임무를 맡은 후에는 따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초반에는 회유와 심문을 위해 로렌스와 루퍼드가 자주 와서 좀 나았지만 며칠뿐이었다.
자신에게도 정보를 캐보라고 해서 몇 번 해봤지만 참 난감한 일이었다.
19호는 말을 못한다.
질문을 해도 돌아오는 답은 이상한 그림, 문자, 행동 등이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걸 알아듣고 추리하는 로렌스 등이 놀라울 정도.
그래서 자신은 그냥 보호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필요한 말이 아니면 별로 하지 않는 편이고 딱히 할 말도 없다보니, 19호와 함께 있으면 침묵의 시간.
할 일이라곤 개인 훈련 정도.
그러다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19호는 암살자다.
그런 자들은 기척을 숨기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들었다.
얼마나 대단한지 보려고 그에게 저택 안이라면 어디든 좋으니 숨어보라고 하니 의외로 순순히 응했다.
처음에는 그쯤이야 라고 생각했었는데 웬걸.
감각만으로는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에 시작한 일에 승부욕이 생겼고 계속하다 보니 훈련이 돼서, 그때부터는 심심할 때마다 그걸 했다.
심심한건 그도 마찬가지인지 하자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바로 숨어버렸다.
암살자라고 무시했었는데 그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됐고, 자신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 경험은 지금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사람이나 동물의 기척은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
그것도 하나가 아니었다.
드레드는 타고 있던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애마는 자신의 갑옷처럼 성에 있었고 지금 타고 있는 말은 오늘 처음 타본 녀석.
녀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런 드레드가 갑자기 말을 달리게 했다.
그러면서 등에 메고 있던 방패를 손에 들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도 뽑았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
날아오는 화살을 막고 쳐내는데 갑자기 말이 꼬꾸라졌다.
역시 자신에게 날아오는 화살은 어떻게 해도 말까지 지켜줄 수는 없었다.
그대로 몸을 띄운 드레드가 바닥을 몇 바퀴 구르다가 몸을 날려 담장을 부수고 들어갔다.
‘적어도 일곱 이상.’
방패로 막고 검으로 쳐낸 화살이 7발인데, 말에 맞은 게 몇 발인지는 확인을 못했기 때문이다.
인원도 다 확인하지 못했고 위치도 마찬가지.
자신이 벽 뒤로 몸을 숨겼으니 적들도 이동 할 것이다.
이제 숨어있지 않을 테니 그거면 충분했다.
적을 찾아 나설지 아니면 공격해오면 움직일지를 고민하던 드레드는 갑자기 섬뜩한 느낌에 몸을 날렸다.
바닥에서 쭉 삐져나온 칼.
나타났던 것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보고 검을 찔러 넣었지만 걸리는 것이 없었다.
드레드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조심해야 할 것은 화살만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표정이 굳었던 것도 잠시.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긴장감.
적이 있으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바람대로 된 것 같았다.
드레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땅속에서 자신을 공격했던 적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였다.
드레드가 문을 부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벽을 부수고 나와 들고 있던 큰 방패로 땅을 찍었다.
땅이 푹 꺼지자 뒤로 돌아 바로 검을 땅에 꽂았다.
이번엔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검을 뽑자 묻어 나오는 피.
적의 생사를 확인하기도 전에 날아온 화살을 방패로 막고 그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벽이 가로막으면 벽을 부수고 집이 가로 막으면 집을 부셨다.
달리는 드레드의 입가에 아까보다 짙은 미소가 걸렸다.
적이 몇이든 부수고 죽이다 보면 끝이 보일 테니까.
로렌스는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큰 나무위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미리 자리를 잡고 드레드가 마을로 들어설 때부터 보고 있었다.
그가 공격을 받는 것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조금 지켜볼 생각이었다.
공격을 받은 드레드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벽이 허물어지고 집이 무너져 내렸다.
“허허.”
드레드는 길리안처럼 힘이 좋고 그 힘을 이용한 공격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가 절망의 기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힘 때문이 아니라 방어력 때문이다.
갑옷은 그렇다고 치고 그가 쓰는 방패는 다른 기사들이 쓰는 방패와는 질이 달랐다.
보통 나무에 가죽을 덧대고 그 위에 또 철판을 씌우거나 얇은 철판 몇 개를 덧대기도 한다. 거기에 마법부여까지 하면 어지간해서는 뚫리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그 정도만 해도 가볍고 충분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
그런 방패를 별것 아닌 양 막 부수는 길리안이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드레드의 방패는 통 쇠로 제작됐다. 거기에 크고 두껍기까지 해서 마법으로 무게를 줄여도 무거운 편.
그의 방패를 뚫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봐야했다.
지금 적들이 쏘는 화살이 갑옷을 뚫을 수 있다고 해도, 그의 방패는 절대 못 뚫는다는 말.
그리고 그의 방패는 방어용도만은 아니었다.
방패를 앞세우고 벽을 부수며 적을 찾는 드레드는 성난 멧돼지 같았다.
“저러다 다 부수겠군.”
로렌스는 걸터앉아있던 나뭇가지에서 일어나 등 뒤에서 두 자루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오른손에 든 검을 보며 씨익 웃었다.
왕이 자신에게 던져준 검.
어제 보여준 왕의 모습이 진심이 아닐지라도 별 상관없었다.
그 정도 의지만 보여줘도 충분했으니까.
“그럼 어디 사자가 되어볼까?”
그러면서 나무에서 뛰어내려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마자 날아오는 화살.
어차피 처음부터 기습 같은 것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을 뿐.
적의 입장에선 둘보단 하나가 공격하기 좋으니 말이다.
로렌스는 웃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눈가리개가 붉은 색이라 세상이 붉게 보였지만 그것도 나름 괜찮았다.
원래는 붉은 색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신경 쓰이지가 않았다. 마음도 더없이 홀가분한 상태.
낮은 자세로 달리는 로렌스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면서도 속도는 전혀 줄지 않았다.
양팔을 살짝 벌려 늘어트리고 달리던 로렌스가 왼손에 든 검을 땅에 댔다.
몇 미터를 달리는 동안 검이 땅에 반이나 들어갔다 나왔다.
땅위에 새겨진 긴 검 자국.
잠시 후 그 자국을 붉은 액체가 채워갔다.
로렌스가 마을에 다다를 때까지 땅에 새긴 검자국마다 붉게 물들었다.
빠른 속도로 접근하자 지붕위에서 활을 쏘던 적이 돌아서 몸을 날렸다.
그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동료들의 공격.
하지만 로렌스에게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로렌스는 지금까지 활을 하나도 쳐내지 않고 모두 피하고 있었다. 지붕 위를 뛰며 적을 쫓으면서도 마찬가지.
도망치던 자가 막 다른 집의 지붕위로 몸을 날렸을 때 갑자기 집이 폭삭 주저 않았다.
이미 도약한 상태라 어쩔 수 없이 땅에 착지하려던 그의 눈에 커다란 검은 방패가 보였다.
그리고 내려설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자를 바로 뒤에서 쫓던 로렌스의 눈에 드레드가 보였다.
“오른쪽으로 높이!”
로렌스의 말에 드레드가 몸을 돌리고 방패를 비스듬하게 들었다. 로렌스가 방패를 밟은 순간 팔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몸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마치 나는 것 같군.”
날아가는 그를 보던 드레드가 다시 움직였다.
생각보다 적이 많았고 그래서 무척 바빴으니까.
로렌스는 드레드의 도움을 받아 높이 날아오르자 기분이 더욱 상쾌해졌다.
정말 날개라도 달려서 나는 기분.
아니 다리를 움직이니 하늘을 달리는 기분이랄까?
가끔 부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몸을 팽이처럼 회전했다.
따다당 소리와 함께 땅으로 떨어지는 화살들.
높이 떠올랐던 몸이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적을 찾았다.
떨어지는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적이 급히 몸을 피하려고 했지만 로렌스가 더 빨랐고, 그대로 적과함께 지붕을 뚫고 들어갔다.
쾅 소리와 함께 로렌스가 뚫고 들어간 집이 들썩 하더니 한쪽으로 쓰러져버렸다.
피어오른 먼지사이로 걸어 나온 로렌스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먼지를 털었다.
“착지는 조금 연습해야겠군.”
그러곤 다시 지붕위로 몸을 날렸다.
마탑주 치르디 자작의 저택.
저택입구에서 자작가의 기사가 앞을 막고 문을 열기를 거부하자 드겔이 바로 검을 뽑아 휘둘렀다.
텅 소리가 나며 기사가 몇 미터를 날아가 떨어졌다.
그걸 본 루퍼드는 고개를 저었다.
검 면으로 투구를 쳤을 뿐인데 저모양이다.
그리고 드겔이 다시 검을 휘두르자 두꺼운 나무로 돼있던 정문이 몇 개로 잘려 땅에 떨어졌다.
“모두 제압하라. 반항하면 죽여도 좋다. 단 저택 안에는 들어가지 말도록.”
드겔의 명에 완전 무장상태로 합류한 300여명의 기사가 말을 달려 저택의 정원으로 들어섰다.
드겔은 지나쳐가는 기사들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루퍼드도 말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지붕에서 내려온 드겔이 뺨에 상처를 입은 것을 보고 솔직히 깜짝 놀랐다.
그저 살짝 스친 상처였지만 저들의 화살 공격이 무서운 이유는 위력도 위력이지만 화살촉에 발려있는 독 때문.
19호가 잡힌 이후 바로 해독제를 만들기는 했는데 그 효과가 확실하다고 장담은 할 수 없었다.
상처를 보니 다행히 독에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포션을 건넸지만 드겔은 됐다고 하며 이동을 서둘렀고, 성에서 나온 기사들이 합류하면서 갑옷을 가지고 왔는데도 그냥 바로 이곳으로 왔다.
“조금 심하신 것이 아닌지···.”
“내가 조급해 보이는가?”
드겔의 말에 그렇게 보인다고 대답했다.
사실 처음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
“적이라고 판단되면 망설이지 말게. 그리고 경은 방금 그 기사를 보고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했는가?”
“저는 그다지···.”
사실 드겔에게 신경을 쓰느라 그 기사를 살피지 못했다.
“눈빛이 흐리고 탁했네. 억양에 고저도 없고. 숨은 쉬고 있으나 마치 인형 같은 느낌이었지. 또 경의 눈에는 저게 정상으로 보이는가?”
앞서간 기사들은 이미 전투 중.
완전 무장한 기사가 300이다.
그런데 자작가의 기사와 사병들은 적은 수임에도 망설임 없이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 영주의 영토도 아니고 수도다.
왕실의 깃발이 나부끼고 왕실기사들이 제압하려 한다고 해서, 저렇게 목숨을 걸고 달려들 귀족의 기사와 병사들은 없을 것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기사들을 보조해주고 마법물품만 만든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네. 그들을 우습게보지 말게. 마탑은 왕실의 힘이고 왕국을 받치는 기둥중 하나라네. 마탑주는 그런 마법사들의 우두머리지. 그가··· 허허. 이것 참.”
말을 하던 드겔이 허탈한 듯 웃으며 걸음을 멈췄다.
루퍼드도 저택 뒤에서 나온 것을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멈춰 섰다.
“다친 곳은?”
“없다.”
로렌스는 벽에 기대앉아있는 드레드가 정말 괜찮은지 훑어보고는 옆에 앉았다.
“몇이나 잡았나?”
“땅속에 있던 자가 열. 활 쏘는 자가 일곱. 땅속에 있던 자들은 활 쏘는 자들보다 한참 모자라더군.”
로렌스도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빨리 알아내기는 힘들겠군.”
드레드가 보는 쪽에는 두 명이 쓰러져있었다.
둘이 합쳐 처리한 적의 수가 30명이 넘었다.
적들을 다 처리하고 드레드가 한 바퀴 돌면서 숨이 붙어있는 자들을 주워온 것이 저들.
“왜 아쉬운가?”
로렌스의 물음에 드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의 본거지는 아닌 모양이다. 생각보다 별로 없군.”
“그건 좀 더 두고 봐야겠지.”
드레드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로렌스가 마을 중앙에 있는 저택을 가리켰다.
“유일하게 적이 없던 장소다. 마을의 중심부인데 적들은 외곽에만 있었지.”
“음, 그건 그렇군.”
그러면서 드레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아라. 시간은 많으니 좀 쉬었다 가지.”
드레드가 말없이 다시 앉는 걸 보고 눈을 감았다.
휴식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적들을 죽이며 생각을 읽었다.
능력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져서 가능 했던 일.
마을 중앙에 있는 저택에는 확실히 적들이 있었고 본거지라고도 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택의 지하.
문제는 얼마나 되고 뭐가 있는지를 밖을 지키던 자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
드레드와 둘이 들어간다고 해도 위험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문제는 적들이 도망치려 했을 때 다 잡기는 힘들다는 거다.
“지원을 요청하면 보일까?”
로렌스의 물음에 드레드는 고개를 저었다.
수도와 가깝기는 해도 누군가 신호를 보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근처까지 와있는 기사들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때 멀리서 뭔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저건.”
지금까지 계속 봐서 너무 익숙한 검은 옷.
19호가 있는 저택을 습격했던 자 같았다.
“참 빨리도 오는 군.”
로렌스가 일어서기도 전에 먼저 일어난 드레드가 검을 뽑아 힘껏 던졌다.
큰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검이 그자를 넘어서 땅에 꽂혔다.
그걸 보고 로렌스가 혀를 차고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말 한마리가 숲에서 달려왔다.
“뛰어가서 잡기는 귀찮으니까. 검도 주워 주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는 로렌스를 보고 드레드는 입맛을 다셨다. 역시 말은 숲에 두고 올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으니까.
이쪽에서 던진 검을 보고 방향을 틀어 숲으로 들어가려던 흑의 인이 갑자기 쓰러졌다.
“어?”
“저기 누가 또 오는군,”
드레드의 말에 시선을 돌린 로렌스가 달려오는 이를 보며 웃었다.
“길리안이군.”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본격 던전탐험 판타지 넘버즈~ 는 다음편에~
으아아아악!!!
피곤합니다. ㅠㅜ
연참대전... 시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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